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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n 24. 2020

비 개인 저녁은 로스코 (실은 코요테와 도룡뇽 이야기)

낯설음이라 부르는 대상들에 관한 짦은 생각


정원의 관목을 흠뻑 적신 빗방울에 몸이 닿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 차에 올랐다. 쇼팽의 발라드가 빗방울 소리와 잘 어우러지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고 습기 가득한 날은 라흐마니노프가 적격이지만, 차에 오르면 자동 선곡으로 흐르는 곡이 오늘은 쇼팽이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현을 때려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언젠가부터 조금 듣기 힘들어져 최근에는 피아노곡을 멀리하고 있는데..... 비 내리는 날에는 피아노 선율의 쨍한 긴장감도 습기에 누그러드는 듯, 빗방울 듣는 소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빗방울은 오전의 시간들을 흡수하곤 알알이 낙하하며 부서졌다. 6월의 하루하루는 물 흐르듯 그렇게 경계도 구분도 없이 술술 흘러간다. 실내에 있으니 답답하고 하루를 고스란히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 집을 나섰다.


길게 이어지는 호수를 따라 10분쯤 천천히 차를 몰았다. 호수 건너편의 무성한 숲은 봄을 지나고 여름을 맞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숲은 일어서면서 서늘해졌고 호수의 물길도 더불어 서늘해졌다. 저 호수 뒤의 울창한 숲길을 걷다 보면 야생의 동물도 마주치곤 했다. 숲 속에서 마주치는 거북이 토끼 사슴까지는 반가웠지만 여러 해 전 코요테와 눈이 마주친 이후로는 저 깊은 숲에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그날은 짙은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며 강아지 콩이를 데리고 걷던 중이었다.  낯선 모습의 한 마리 들짐승이 전방에 서 있었다. 아이들이 카이요티라 발음하는 코요테는 개와 늑대 사이쯤 되는 동물이다. 그날 맞닥뜨린 녀석은 무심해 보였지만, 그 털빛은 내가 난생처음 보는 야생성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코요테는 나를 보았지만 키가 작은 강아지 콩이를 미쳐 발견하지는 못했던 순간이라, 나는 콩이를 숨기듯 품에 안고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숲을 돌아 나왔다. 그것이 저 숲 속의 마지막 기억이다.  코요테는 전혀 공격적인 낯빛을 하고 있지 않았고 무심히 서 있었지만, 낯선 동물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오로지 그 울긋불긋한 무섭고 낯선 털빛을 향해 있었다. 코요테의 털빛이 흰색이었다면 혹은 사슴의 그것처럼 부드러운 갈색이었다면 코요테를 맞닥뜨린 기분이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나 감탄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인간의 경계심이나 두려움은 상대방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텐데, 이 경우에는 난생처음 보았던 코요테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털 색깔이 무시무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저 숲에 발길을 딱 끊었으니... 나는 얄팍한 인간이다. 시카고나 뉴저지에서는 사람들이 모인 인가에도 코요테가 종종 출몰하고 사람을 해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는 생존본능일 테지만, 조금만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필요 이상의 경계태세를 갖추느라 지나친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는 바보스러움은 나만 가진 것은 아닐 터...

지난 겨울의 메마르고 키작은 숲

게이코는 손가락 길이만 하고 연필 정도의 굵기를 가진 도마뱀의 일종인데,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이 동네로 이사 왔던 십오 년쯤 전이다. 텍사스의 정원에는 나비보다 흔한 것이 게이코지만, 처음 보는 도롱뇽처럼 생긴 생물이 백 야드로 통하는 부엌문이 열린 틈을 타 실내로 들어왔을 때의 두려움은 과장 없이 손에 땀을 쥐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녀석이 움직이는 방식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고, 도롱뇽도 아니고 도마뱀도 아닌 그 초록색 생물의 이름도 몰랐을 때니까.... 나는 그 녀석이 집안으로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랬는데... 그 녀석은 부엌의 벽과 천정 사이에 딱 붙어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애지간해서는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지만, 그날 케이코와의 한발 물러설 수 없는 대치 상황에서는 sos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한심한 행동이었지만, 옆집 이웃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일하다 뛰어온 남편이 게이코를 백 야드로 몰아내고 사태가 해결되었고 그날 밤이 되어 생각했다. 만약 개구리가 들어왔더라면 그토록 놀라진 않았을 텐데, 내가 왜 그렇게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 그 손가락만 한 생물이 움직임과 동작은 무척 낯설었고, 그 생물 자체도 낯선 대상이었다. 그것은 게이코만을 향한 두려움이었다가보다는, 어쩌면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 대한 긴장이 손가락만 한 낯선 침입자에게 몽땅 투사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두려움이란, 고작 대상이 내게 익숙치 않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대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나름 진지하게 깨달은 사건이었다. 대상이 손가락만한 생명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활동체든, 사회 현상이든 마찬가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낯설은 대상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채 시간이 알려주는 상대에 대한 지식만 냉정하게 흡수하면, 정신이 나갈만큼 혹은 온몸이 굳어버릴만큼 두려운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초면엔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게이코가 이제는 귀엽기만 하다. 벽에 붙어서 벽돌과 같은색으로 몸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춘데다 사람이 안 볼 때만 사사샥 움직이는 것이 귀엽다. 자꾸 보면 정드는 것은 진실...  


지난겨울 어느 아침엔 코요테가 살고있는 그 숲으로부터 호숫가로 산책 나온 사슴 가족을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더 이상 가지 않는 깊은 숲에는 또 어떤 동물들이 이주해 들어와 있을지 궁금해진다. 깊어진 숲을 지나와 매일같이 거닐던 오솔길에 도착했을 땐 정오를 지난 시간이었지만 내가 매일 걷는 길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있었다. 하얗게 포장된 산책로만 외롭게 빚나고 외길은 텅 비어 있었다. 차에 앉아 눈으로만 길을 따라가며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비 오는 날의 산책을 위해 고무장화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쯤 운동을 했다. 주말에 몇 레인이 찼던 수영장은 다시 텅 비었고, 비 개인 후라 눈이 부시지 않았고 배영으로 물속을 천천히 떠다니기에 좋았다. 대게는 운동이라기보단 시절의 요청으로 몸을 안 움직이고 생활한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레인을 천천히 왕복하는 정도이지만 집에 돌아왔을 땐 좀 지쳐있었고 엄마 눈꺼풀이 눈을 반쯤 덮고 있다고 걱정하는 아이의 잔소리를 들었다. 비가 멎은 오후에는 발목 위로 올라오는 앵클부츠 모양으로 만든  까맣고 반짝이는 비 장화를 신고 다시 호숫가를 산책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마크 로스코의 색 면화 같은 하늘이다. 하늘색이 이렇게 다채로워도 마음이 요통치기보단 차분해지는 건 텍사스의 하늘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나 한국의 다채로웠던 하늘은 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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