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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Sep 02. 2020

아주 옛날에는 바다였던 골짜기. Jacob’s well

wanderlust


동네의 이곳저곳엔 크고 작은 공원이 하도 많아 한 가족이 독차지하고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코로나가 뭐예요 락다운이 뭐예요라는 표정으로... 알루미늄 홈통을 통해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로 들어가 서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나이가 너무 많고 아이들은 다 커버렸다.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와 그 뒤의 빨간 미끄럼틀은 어딘가 모르게 댓구를 이루는 모습이다. 동네의 그 숫한 호수는 모두 조경을 위해 설계된 인공 호수이고 홍수가 날 때 배수로 역할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노고롭게 정돈한 단정함이 아닌 자연의 샘솟는 물길과 오솔길이 그리웠다. 먼 곳으로의 산책을 떠나고픈 마음을 wander+lust=wanderlust 라고 표현한 영어 단어는 재미있다. 또한 독일어의 fernweh는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이라는 뜻을 가졌다. 집을 향한 그리움 향수 homesick 에 반대되는 말이다. 간혹 아지랑이처럼 그리고 은밀하게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미지의 장소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을 이렇게 콕 짚어내다니... 독일인들은 정말로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우리말의 객창감은 여행지에서 느끼는 쓸쓸한 감정의 이름이고 독일어의 fernweh의 반대말쯤 될지도 모르겠다. 객창감은 있는데 그 반대말은 없다. wanderlust를 뜻하는 우리말이 있던가? 방랑벽이라는 단어가 얼핏 떠오르지만 이는 행동이나 습관의 이름이고 감정의 이름은 아니다. 행동의 유발은 감정이 전제 되지만, 행동은 선명히 표현되는 것이고 내면의 감정은 선명하되 겉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눈으로 확인되는 행동에 이름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이나 감각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좀 다르다. 영어에는 추상과 관념을 지칭하는 명사가 한국말 보다 많고, 독일어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긴 독일어는 철학의 언어가 아닌가.  생각해 보면 일전에 "인생의 특정한 혹은 지난 시절에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도 보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번 본 것을 필요한 시간만큼 기억하는 나이"라는 뜻의 독일어는 없을까? 단어라던가 전화번호를  필요한 시간만큼 기억할 수 있던 시절은 편했다.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의 망한 상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구름


사다리에 올라가 점프를 하면 손이 닿을 것만 같은 구름이 친근하다. 머리 위의 구름은 올해는 여느 해 보다도 더욱 청정하겠고...봉지에 담아서 판매하는 납작하게 눌린 솜사탕 같아 보이는 저 구름은 무슨 맛일지 문득 궁금했다.천문학자들이 은하의 성간 구름에서 산딸기 향을 내는 유기분자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사실에 바탕해 어떤 과학자는, 만약 우주여행이 가능하게 되어 성간 구름을 맛 볼 기회가 생긴다면 아마 산딸기 향을 내는 달달한 디저트 맛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물론 암모니아와 메탄올의 악취를 걸러 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후에야) 뜬구름 같은 상상도 펼쳤더라. 하지만 산딸기 향이라니... 너무나 우주와 어울리지 않는 향이지 않은가.



중력


집과 바다 사이의 거리는 100킬로 미터다. 100킬로미터 밖에서 대륙은 끝이 난다. 휴스턴은 평평하고 낮은 땅끝 지형이라 시내를 운전할 때 비가 오면 도로에 물웅덩이가 생기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했다. 실은 고위도 지역 온타리오의 도로 위에 물웅덩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신기했다는 것이 맞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에도 온타리오의 도로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금방 건조해지곤 했다. 해안에 비하면 훨씬 지대가 높았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이곳은 온타리오 보다도, 로키의 콜로라도나 애팔래치아보다도 지구 중심에 더 가까운 곳이고, 마음에 작용하는 중력은 훨씬 더 강하다. 그것은 십 년을 넘게 살아도 적어도 내게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등껍질을 쓴 거북이처럼 변해 버리기 전에, 땅에 붙어 움직이게 되는 일에 무감해지기 전에, 언덕이 있는 고원지대를 찾아가곤 한다. 중력을 거슬러...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중력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힘이지만, 발밑에서 너무 강하게 끌어당기는 그 힘은 마음을 어렵게 만들고, 우주공간 속을 상상하면 숨쉬기가 어렵다. 고맙게도 발터 뫼르스는 "우주에서 중력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힘이 두려움"이라고 했다. “중력은 죽은 대상들을 움직이게 하고 두려움은 살이 있는 존재들을 움직이게 한다. 오직 두려움을 아는 자만이 위대함에 이르는 능력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못하고 하릴없이 사라져 간다."는 멋진 말로 중력에 저항하는 마음을 격려한다.


지구 중심에서 멀어질 때 찾아오는 에피파니의 순간들


수십개의 필명으로, 다른 자아의 얼굴과 이름으로 글을 썼던 포르투칼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는 생각했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태어난 가치가 있구나... 가공되지 않은 땅을 밟으며 내 앞에 펼쳐진 자연의 요소들을 감각하는 것은 자연과 합일되는 순간이고, 육체에 제한된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확장되는 순간이다. 어떤 작가는 지나간 풍경은 일종의 메멘토 모리와 같아 존재의 유약함을 강렬하게 일깨운다고도. 했다. 자연의 풍경 속을 걷거나, 아직 건축물로 포화되지 않은 한적함을 유지한 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에 파편처럼 숨어있던 생각의 조각들이 어느덧 퍼즐처럼 연결되고 뚜렷한 형태를 이루는 순간들을 경험하곤 한다. 걷기는 의지적인 동작이지만 걷기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생각의 사이클은 자동반사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산에 오르거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구 중심으로부터 멀어질 때도 그런 순간은 문득 찾아오곤 한다. 나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불현듯 찾아오곤 하던 에피파니의 순간들, 예상치 못하게 새로운 관점에 눈이 떠지던 그런 순간들이 지상의 낯선 풍경들을 순례하는 여행보다 더 좋았다. 마음의 키가 한뼘쯤 더 커지는 것같던 순간들.


 중부 텍사스의 메마르고 나직한 돌산들은 어려서 보았던 아파치 인디언이 나오던 영화의 딱 그 배경과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유년시절 토요일 오후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국의 풍경은  아이러니다.  카란카와, 카두, 아파치와 코만치, 위치타의 Karankawa, Caddo, Apache, Comanche, Wichita 영토였던  . 애팔래치아의 웅대하고도 부드러운 산꼭대기였더라면 더할 나위 없는 호연지기의 순간을 만날 수 있었겠지만 나트막한 돌산의 언덕에서나마 산아래의 계곡을 강물처럼 가득 채운 숲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형용하기 어려운 편안함이다. 마침 중부고원의 아랫동네 센 안토니오의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던 심리학자 프레드 프레빅 Fred Previc은 비행중에 찾아오는 방향감각 상실과 관련한 연구를 오래 진행해 왔다. 그 역시 내가 감격해 마지않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찾아오는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는 기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내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에피파니의 순간에 관해 그는 저서 <dopaminergic mind mind in human evolution and history>에서 도파민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는 도파민적 마음 dopaminergic mind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도파민의 보상체계는 우리가 일상의 한정적인 활동범위를 넘어서 공간을 확장하는 도전을 감행했을 때 경험하는 정신적 보상을 reward 추구하는 마음의 화학적 기제다. 그 보상은 경험 자체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지식일수도, 직관적 통찰의 경험일 수도 있고, 혹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 하는 경험일 수도 있다. 인류문명은 그 결과물들의 축적이었고 그것을 향한 화학적 추동력이 도파민이었다고 프레드 프레빅은 말한다. 일련이 생물학자들이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마법의 화학물질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한다면 일련의 심리학자들은 신경전달물질의 화학적 작용이라는 렌즈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wanderlust는 도파민의 작용이고 객창감은 사적공간 peripersonal spaec  내에 머물고 싶은 세로토닌의 작용인 것이다. 이 인류의 역사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말고 당기는 줄다리기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현재로부터 미지로의 도약에는 도파민이라는 스프링보드가,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행위에는 세로토닌의 작용이 관련되어 왔던 것이다. 나는 대개는 도파민의 작용에 영향받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부류인가보다.


야콥의 우물


오스틴을 지나 도착한 곳은 꼬불꼬불 들어온 깊은 숲 속인데,  이곳이 아주 옛날에는 뭍으로 들어온 바다였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반짝 떠졌다. 사막을 상징하는 식물인 선인장이 땅에 낮게 엎드려있었고 그 동글동글하고 납작한 몸체들이 귀엽다. 아침 산책길 입구에서 만난 선인장 가족. 미키 마우스가 갸우뚱 몸을 기울여 안녕하세요 하는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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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라기보단 점프와 다이빙이 주목적이지만 물놀이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요원이 지루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씩씩하게 자라난 아가씨들 역시 9미터 깊은 우물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린다. 옛날에 들어간 아홉 명의 다이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을 정도라니 그 역시 무서운 이야기다. 신비롭게 아름다운 바다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어떤 해저 우물들 역시 다이버들을 유혹해 가둬놓는다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사이렌이 바다의 동굴 속으로 몸을 감춘 것이었을까...... 바다도 무서운데 바닷속 우물이라니 태양의 열기를 꺾을만한 막강한 냉기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The 12-foot (3.7 m) diameter mouth of the spring serves as a popular local swimming spot. From the opening in the creek bed, Jacob's Well cave descends vertically for about 30 feet (9.1 m), then continues downward at an angle through a series of silted chambers separated by narrow restrictions, finally reaching an average depth of 120 feet (37 m). Until the modern era, the Trinity Aquifer-fed natural artesian spring gushed water from the mouth of the cave, with a measured flow in 1924 of 170 US gallons per second (640 L/s), discharging 6 feet (1.8 m) into the air.


The cave is also an attraction for open-water divers, some of whom are inexperienced with the specialized techniques and equipment used in cave diving, which has resulted in nine fatalities at this site between 1964 and 1984 (eight men and one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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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날들엔 오스틴의 시내를  관통하는 강 위에서는 keep austin wiered를 외치며 자유로운 영혼들은 다리 아래로 점프를 하고, 카약을 띄우고 놀던 이들은 그런 그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건네곤 했다. 조금 더 과감한 자유로운 영혼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상의를 탈의한 채 물속으로 자맥질하곤 했다. 오스틴의 자유분방함은 거기까지가 좋았다.

 



그러니까 이곳이 아주 아주 옛날에는 말하자면 inland 해안단구? 정도 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 깊은 우물 하나 정도만 남았다는 이야기다. 흔적만 남은 골짜기의 해안단구라니 너무나 신기한 지형이지 않은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던지 나무 위에 수줍게 걸려있는 길잡이의 채도 높은 노란 화살표는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킨다. 동시에 “제대로 가고 있음”의 안도감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확신을 불러 일으킨다. 앞에서 걸어가는 남편은 많은 생각이 응축된 저 화살표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듯 하지만 내게는 아버님의 시집 표지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었다. 건축사와 기술사로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님이시지만 여러권의 소설과 열권이 넘는 시집을 취미로 발간하셨는데 그 중 한 권의 표지에는 한국의 초가를 선으로 표현하신 그림을 쓰셨다. 십자가 위에 지붕을 씌운듯한 그 그림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몇 개의 선으로 그리신 그림을 아버님의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하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으나 격식차리는 걸 싫어하시는 아버님은 그 멋진 그림을 여직 묻어두고 계시지만 말이다.

숲 속에서 마주쳤던 노랑과 빨간의 원색의 조화를 지나다 들른 캘리포니아 출신의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쳤다. 1960년대를 떠올리게하는 칼라스킴을 고수하는 그 가게는 화단의 꽃색깔마져 통일시키고 있다. 고도의 통일감이라니...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온 것은 햄버거 가게만은 아니었다.  몹시 캘리포니아스러워지고 있는 오스틴 시내의 풍경은 모종의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도로 귀퉁이 양쪽을 바이크 레인이라며 힘도 없는 트래픽 콘으로 분리해놓고 두발 달린 탈 것들을 활주하게 만들어 두었다. 이 실험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곡을 바루어서 직에지남을 면치 못하는’ 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 자동차를 운전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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