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바다 May 22. 2016

천사에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시간들의 기록

시작하는 글

세상의 반은 여자이고 여자의 대부분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된 사람들에게는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라는 축복이 내려진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어떠니 어떠니 해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아이를 낳아키우는 일이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신세계에 도착하여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는 얼마나 맘 편하고 행복할까.


한 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달콤하고도 선동적인 광고 카피 문구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을 즈음, 세상을 좀 살아본 현실적인 누군가는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직언을 남겼다. 열심히 일했던 우리는 서른을 갓넘긴 시점에 또다시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나 온타리오 호숫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둘째를 낳았고, 남편은 공부를 더 했다. 그리고 얼마간은 개고생을 경험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말 설고 물선 땅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의 망망대해에서 동동떠 있던 날들은, 엄마라는 새로운 자아를 얻은 대신, 한 순간에 침몰해 버린 반짝이던 나의 사회적 자아가 시간의 강물 위를 동동 떠내려 가는 것을 쓸쓸하게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심리학을 가르치고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던 사회적 자아를 위한 자리는 막 당도한 캐나다에는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대신 가정과 양육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사회적 자아가 고립되었던 그 위태롭던 시간들을, 엄마라는 자아는 "지금은 아름다운 지구인을 키워내야 할 시간들"이라 정의하고 떠내려가던 사회적 자아를 건져올려 최선을 다해 재미있고 아름답게 지구인들을 키워내기로  마음먹었더란다. 내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만큼 환해지는 세상을 그려보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이 세상 예쁘고 선한 것들과 친해지도록 소풍을 다녔다. 그때는 사람들에게 내가 선택한 두번째 직업이 domestic engineer 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고 다녔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고 빨리 지나갔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남편과 애초에 약속했던 대로 내가 하던 공부도 끝을 맺고, 이 사회에 발도 살짝 담가보았지만, 엄마와 전문가로서의 나의 두 자아는 여전히 갈등 중이다. 그러니까 이 매거진은 천사의 모습으로 내게 보내진 두 아이들이 사춘기를 거치며 인간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본 날들의 기록이며 내 안에서 벌어진 전쟁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전쟁은 길고, 치열하고, 엄마들을 지키게 한다..... 두 자아의 전쟁을 겪은 많은 이 세상의 엄마들에게도 격려와 찬사를 드리며 그분들의 무용담이 궁금하기도 하다. 무용담은 군필자들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옮겨 다니며 유년기를 보낸 나의 아이들은 이제 아빠보다도 더 깊은 목소리를 내는 나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자랐더라면, 더 많은 가족과 친척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을 텐데, 그 기회를 주지 못했기에 늘 미안하고 아쉽다. 사춘기 아들 둘을 키우면서 새삼 "육아"라는 단어를 가만히 되뇌어 보니 생뚱맞기도 하지만, 정신적 육아의 과정은 더 힘들어지고 있으며 아이들이 내 품에 있는 한 육아는 계속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몇 년 후 대학을 가고 드디어는 돋아난 날개를 펴고 날아갈 때가 되면, 육아란 내게서 잊힌 단어가 되겠지만, 그 시간이 당도하기 전에, 몸이 너무 힘들긴 했지만, 마음은 행복으로 물들어 있던 그 아름답던 시간들을 조금씩 기록해 보려 한다. 미국에서 아이 키우는 일을 궁금해했던, 그리고 내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궁금해했던 친구들의 청에 이제는 조금씩 대답을 해 줄 여력이 되기에, 캐나다와 미국이라는 다른 환경이 아이들을 어떻게 성장시켜가는지 캐나다와 미국의 학교 안과 학교 밖의 교육 환경을 생각나는 만큼, 아는 만큼 기록을 해보고자 한다. 행여 읽으시는 독자들께서도 조금의 힌트를 얻으시게 된다면 감사한 일.


엄마에게 온통 촞점이 맞추어진 착한 첫째, 보헤미안의 기질을 선보이는 둘째가 어느 날 공원의 꽃밭에서




육아와 관련하여 머릿속에 꼭 박힌 설치작품의 기억이 한 가지 있다, 뉴욕의 현대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제목도 없는 이 작품은, 관객이 보는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라는 의도인가 보다. 작은 아이가 두 살 생일을 지난 겨울, 우리는 뉴욕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유치원엘 다니던 큰 아이는 겨울방학을 앞두고서 친구들과 "우리는 겨울 방학에 좋은 데 간다, 우리는 더 멋진 데 간다." 하는 식의 대화를 하던 중에, "우린 뉴욕엘 갈거야라"라는 날조된 계획을 발표해 버렸고 그걸 들은 선생님은 엄마에게 한 마디 인사를 건넸다. 아이를 거짓말쟁이로 말들 수 없으니, 엄마 아빠는 뉴욕엘 가야 했다.

Marcel Broodthaers. Armoire blanche et table blanche (White cabinet and white table). 1965.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2016 Estate of Marcel Broodthaers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BAM, Brussels


네 살 난 큰 아이가 즉응적으로 기획한 그 겨울의 여행에 "작은 녀석 기저귀 뗀 기념 여행"이라는 주제를 걸었던 내게, 마치 "오느라 수고 많았어. 너를 위해 준비했어. " 하는 듯 인사를 건네는 작품이었다. 이 하얀 계란 껍데기 하나하나가, 동그랗게 말아놓은 기저귀처럼 보였던 나는 설치 미술 앞에서 혼자 한참을 웃었고 그날의 감상문을 짧게 적어 놓았다. 겨우 기저귀를 떼고 모유를 뗀 것으로도 육아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때의 나는 어렸고, 삶의 길이도 짧았던 때다.

"내가 기저귀를 갈아 채웠던 횟수만큼의 계란 껍데기를 이 케비넷 안에 넣어두라.  내 인생은 기저귀를 간 시간들의 총합, 아이에게 먹일 식사를 준비한 시간들의 총합,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 시간들의 총합, 그 외의 다른 소소한 일들을 한 시간들의 총합인 것, 인생은 그런 것."

                                            © Yoon Hyunhee all right reserv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