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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y 29. 2016

정보의 파도를 타고 바꾼 삶의 무대: 오, 캐나다

나는 정보화 사회가 좋다

        인류가 지난 수천 년의 시간을 나누어 온 기준은 지져스 크라이스트의 탄생 이전과 탄생 이후인데, 청년기가 한창 진행 중인 삶의 한 가운데서 21 세기로 진입한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인터넷 개통 이전 시대와 개통 이후 시대로 나누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아이폰 시리즈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사고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한 애플의 기기들의 작동원리에 놀란 나는 그가 내놓은 기술의 혁신이 몰고올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각해 보며 인류의 새로운 역사는 스티브 잡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가까이 들어다 보자면, 애플이 내놓은 기기들은 당장 심리치료실의 모습조차 변화시켰다. 어린 클라이언트들을 만날 때 사이컬러지스트들의 손에는 종종 아이패드가 들려있다. 박애주의적인 태도를 지닌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수많은 치료 매뉴얼들과 치료 모듈을 대중과 공유하며, 이 소프트웨어들을 손에 넣은 치료자들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아이패드를 앞에 놓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시청각 치료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클라이언트를 치료하기도 한다. 연애시절부터 모아 온 수백 장의 시디는 아이폰 속으로 들어가 운전 중이든, 잠자리에 들기 전이든 언제든지 원하는 곡을 때와 장소 불문하고 들을 수 있으며, 한때 서재 한쪽을 자랑스럽게 차지하고 있던 시디 수집장은 지금은 통째로 창고 속에 들어가 있다. 수백 권의 책들은 내 계정의 클라우드 속으로 띄워 올려져 서재의 빈 공간을 다시 넓혀주었으며, 개별적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은 초등학교에서 킨들과 아이패드는 학생들의 필수 학용품이다. 더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과 편의를 도모하려는 의도들이 궁극에 닿은 자리에선 인지공학과 정보기술의 힘을 빌려 인류가 새로운 종으로 탈바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발 하라리의 최근의 저서 "사피엔스"의 마지막 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러한 징후를 알리는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으며, 그의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아도, 인터넷과 정보 과학 기술이 이끌어가는 지금의 시대가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흥미로운 시간이라는데 인류는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요히 카누를 저어가는 이분은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전 수상.  현 수상의 아버지이자 1960년대 멀티컬춰럴리즘의 토대를 일구고 다져놓으신 캐나다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십니다.



        전 지구적인 정보의 결집이 조만간 우리 삶의 형태를 어떤 새로운 지형 위에 올려놓을지 두고 볼 일이다. 되돌아보건대, 인터넷이 주도한 정보가 넘치는 사회는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던가? 인터넷을 통한 거대한 정보의 흐름에 발끝을 담그다가, 급기야는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와 멕시코만 연안의 이 평평한 동네에까지 이르게 된 그 애초의 시작은 월드와이드 웹이 구현되기 시작하던 그 해, 대학원에서의 첫해를 보내던 그 때다. 나는 연구실에 앉아 참을 인자를 여러 번 그려가며 인터넷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서히 나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한 정보의 파도는, 몇 년 후 나를 태평양을 건너 북미대륙의 오대호 연안에 착륙시켰다가, 몇 년이 지나 이번엔 북미를 종단하여 대륙의 남쪽 끝자락 멕시코만 연안에 안착시켜 놓았다. 전근대성을 근대성과 구별하는 확고한 한 가지 기준은  타고난 귀속지위로 부터 사회적 노력의 결과로 획득지위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정보화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혜택은, 태어날 때 자동적으로 부여받은 국적이 아닌, 우리 이성의 논리로 국적을 선택하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일을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단독으로 수행한 프로젝트인 대규모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한 경험 연구를 바탕으로 한 논문을 마친 뒤 탄력을 받은 나의 두 번째 단독 프로젝트는 영주를 목적으로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사를 하는 일이었다. 경험 연구의 진한 통증과 주목할 만한 결과라는 열매를 맛보며 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길고 건조한 과정에서 보상이 되었던 것은, 인터넷으로 심리학 문헌들을 찾아 읽고 지구 건너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는 즐거움이었다. world wide web 이 내 눈 앞에서 구현되기 시작하던 그 해 그 순간, 이제 막 우리 앞에 열린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어 영어로 작성된 정보들을 한잔씩 떠서 맛보는 즐거움이란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담그는 흥분같은 것이었다. 길었던 논문을 끝내고 졸업을 하였고,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만나고, 첫 강의를 시작하던 순간은, 십 대에 꿈꾸어왔던 장래희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장래희망이었던 엄마가 되는 일도 예상치 않게 곧 뒤따라왔다. 결혼을 하였고 이듬해는 첫 아이도 태어났다.


        남편은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의 성과와 관련해 회사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며, 한국의 바다를 지키게 될 전투함을 설계하느라 바빴고, 그때나 지금이나 일중독이긴 마찬가지지만  건강이 염려되기 시작하는 최근까지는 그런 남편을 만류하거나 제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기가 태어나도 남편의 일중독은 여전했다는 사실이다, 아기는 하루에 한 시간도 얼굴을 대하지 못하면서 아빠라고 까꿍대는 아저씨를 낯설어하며 고개를 돌렸고, 나 또한 남편을 기다리는 그 긴 저녁 시간, 나를 위해 재미있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계획할 필요가 있었다. 유달리 건강한 첫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열기 가득한 젊음이었나 보다, 그때의 나는.  


어저씨  누구세요?
아저씨 까꿍하시네요? 저를 아시나요?



        그런 저런 여타의 이유들로 시작해 캐나다의 시민이 되기 위한 전 단계로 그 나라정부로부터 영주권을 얻는 일이 나의 과제가 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과밀하고 치밀한 한국에서 느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나 요즘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고, 모든것이 과밀한 한국의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을 낮춰주는 것도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했었다. 요즘 세태는 과감하게도 북유럽으로 이사 가는 일에 관심들을 보인다는 소식이다. 학교에서 조차 배워본 적이 없을, 영어도 아닌 생소한 언어를 쓰고는 몹시도 추울 그 나라로 이사 가고 싶어 하는 청춘들의 엉뚱한 용기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때의 나는 캐나다가 궁금하였다. 캐나다에 대한 이전의 어떤 경험이 있어서였던 것은 아니었고 미국에 오래 살게 된 지금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지만, 이십 대를 지나오는 동안은 매체나 짧은 역사공부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게된 미국 사회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고, 미국의 영향을 깊이 받은것이라 여겨지는 한국의 어떤 부분들이 무척 피곤했다. 그랬기에 미국으로 남은 공부를 마치러 가자는 남편의 계획에 반대를 하려면 어떤 것이라도 대안을 내놓아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글을 잘 쓰시던 홍세화 선생의 글이 그때의 내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캐나다에 마음이 갔던 것은, 파리 건너 영국, 영국과 유사한 시스템을 가진 캐나다 절반쯤 사회주의인 그 체제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사회가 나도 궁금하였고 소문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넷이 있었기에 확인해 볼 엄두를 내었던 것이다.


        우리가 공부 하기 위한 캐나다의 대학원들을 알아보았고, 캐나다 대사관도 알아보았고, 24시간 온라인으로 열려 있는 캐나다 대사관이 공개하는 각종 자료들을 읽어 보다가 영주권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하나씩 출력해서 쌓아두었다. 출력해 두고도 계속되는 출강과 병원에서의 환자 만나기, 그리고 집에서는 아기 돌보는 일로 많이 바빴던 몇 달간은 서류 위로 먼지가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학기가 끝나고 겨울을 지나고, 아기가 8개월이 되던 어느 봄날 저녁, 문득 생각이나 서류를 한 장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캐나다 정부가 이사를 오라고 한다는데 어디 한번 그런가 보자 하는 호기심. 눈 앞에 크로스워드 퍼즐이 인쇄된 신문이 던져져 있을 때, 대게는 무심코 연필을 들고 단어 퍼즐을 맞추기 시작하듯, 나는 인터넷 상에 떠있는 공개된 자료를 발견해서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그 작업은 하루에 한 종목씩 채워 나가는데 한 달이 꼬박 걸렸다. 낮에는 아기를 안고 은행과 등기소, 졸업한 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요구되는 한글 서류를 준비하고, 밤에는 아기를 재우고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서류의 빈칸을 채우고 번역해 가며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갔다. 내가 한 달에 걸쳐 만들어 놓은 전화번호부 두께의 영주권 서류들을 남편이 마지막으로 확인 검토하는데도 일주일은 걸렸고 마침내 봉투에 넣어 보냈다. 캐나다는 Merit Base 라고 할 수 있는 이민 선별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그 나라에 보탬에 되는 사람들에게 이민을 허락하겠다는 정책이고, 내가 알고 있던 기준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큰 돈을 정부에 투자하고 이사가는 투자 이민, 두번째는 그 나라에 가서 사업을 일으켜 캐나다 경제에 이바지 해 보겠다는 사람들에게 열어주는 기업이민, 그리고 세번째로는 많이 교육받고 고도로 훈련된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의 건강한 휴먼파워가 되어 미래의 세금납부자가도록 문호를 열어주는 독립이민이라는 세가지 형태가 있었다. 삼십대에 갓진입한 우리에게 큰 돈이 있었을리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남편과 나 각자의 학위 두 장, 그리고 학위를 바탕으로 한 남편의 전문경력 칠년과 나의 파트타임 전문경력 3년이 모두 였으니 우리는 독립이민으로 지원을 했다.   


        몇 주가 지나 답이 왔다. 인터뷰는 필요치 않을 것 같으니 언제든지 이삿짐 싸도 좋다고. 하라는 대로 하니 정말 되는구나. 신기했고 기뻤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정보가 공유되고 공개된 사회에서는 국적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하는 일이 책상 앞에 앉아서도 가능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놀라워라.  물론 영주권 = 캐나다 시민권은 아니나, 영주권 + 4년 채류= 캐나다 국적 취득이라는 공식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영주권을 얻고 캐나다 본토에 체류 기간이 4년 이상이면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지 시민권 취득이 가능했다. 

집 앞의 스미스 스펜서 공원, 거대한 놀이터와 아이스링크  포장된, 산책로, 입구의 자그마한 미술관. 저녁 산책을 나온 동네 주민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던 던 공원과 산책로



그리고 도착한 신세계는 정말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따뜻했다. 눈이 녹고 거리가 깨어나 꽃바구니들을 주렁주렁 달기 시작하는 5월에 도착한 그 호숫가 동네의 거리와 하늘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키 큰 나무들과 새소리와 맑은 바람들이었다. 꽃피는 봄에 도착하여,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가을에 둘째를 낳았다. 바다 같은 호숫가에 면한 조셉 브렌트 병원이었다. 바다 같은 호수 위가 붉게 물들며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 여섯 시가 되자 아기는 태어났고, 전화기 건너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이름은 아기 이름은 해 뜨는 동쪽이라고 지어주셨다. 태어난 아기는 해 뜨는 동쪽으로 다시 꼭 돌아오라는 뜻이셨을까?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는 벌링턴 (보림동) 임씨의 시작이었다.


여름 호숫가 비치는 이런 모습이었고.
벌링턴에서 나아이가라로 내려 가는 길목. 저 물은 온타리오 호수입니다. 호수에도 잔잔한 파도는 일었고 비치의 모래는 깨끗했습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적진 않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었고, 캐나다 토박이들은 멀리서 온 우리를 환한 미소로 환영했고,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도 무척 성숙한 인격들이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인 환경들은 충분히 훌륭했고, 그에 대해 감사했고, 대자연은 나를 무념무상의 투명한 마음에 들게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떠나온 그 나라에 대한 오래된 미련과 긴 아쉬움을 짧고 건조하게 표현하자면, 개인의 삶에 국가의 간섭이 심하다는 소문은 (좋은 쪽으로) 대체로 맞는 것 같았고, 어린 아이들과 엄마를 위한 국가적인 배려는 참으로 세심한 것이어서 그 많은 세금이 어디에 사용이 되는지 묻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사회의 느려 터짐은 천천히 여러 번 생각하는 내 성격과도 잘 맞는 듯하였고,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라고는 없어 몇 년을 살았지만 광고전화 하나 걸려오는 일이 없었기에 친구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소리는 무조건 반가웠던, 그 소음이 제거된 고요도 좋았다. 사회를 이루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말이 많고 잘 웃었던 것도 좋았다. 나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말하자면 너무 사랑했으나 현실적인 이유로 떠나야 할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 같은 아쉬움과 미련의 결정체이다. 오, 캐나다!


캐나다는 작년 선거의 결과로 세계에서 가장 젊고 가장 훈남인 수상을 배출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세계도 그를 주목하고 있다. 피에르 트뤼도 수상의 아들이며, 1960년대의 아빠 수상이 그랬듯이 (젊은이들에게 있어 피에르 트뤼도 수상님의 인기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수상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빚바랜 대학생들의 사진이 그 소문을 증거하는듯 하다) 21세기 캐나다의 아이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저스틴 트뤼도 수상. 아직 검증되진 않았지만,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눈과 귀가 즐겁다. 그의 목소리는 불어를 하기에 최적화되었으며, 배우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도 엿보인다. 어쨋건 가치평등의 멀티컬춰럴리즘의 진정한 토대를 다져놓은 아버지의 레거시를 고스란히 발전시켜나가는 캐나다의 젊은 수상은 보고 있노라면, 현재 미국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만들어내는 공해로 인해 괴로운 눈과 귀와 마음이 정화되고 안정을 찾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트뤼도를 응원하며 작년 선거전에서 열광했던 캐나다의 내 친구들에게 질투가 난다.



내 생의 다음 장은 어디서 펼쳐질지, 이 손끝에서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가 이번에는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 Yoon Hyunhee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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