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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n 27. 2016

정보화 시대에 국경 통행권 얻는 일

바다 건너 이사하는 일과  대룍 건너 이사하는 일

애초에 익명의 온라인인 이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던  마음은 아는 사람 없는 바닷가에 나와 앉아 파도 위에 혼자만의 독백을 기록한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스스로를 위한 글쓰기에서 독자들을 염두에 둔 글쓰기로의 코드 전환은 예상치 않았던 일이고 또 쑥스러움과 어색함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버퍼링의 간극을 극복한 것은 글쓰기가 제공하는 치료효과와 그에 더해 전 지구적 공간에서 엮어가는 소소한 생활의 즐거움을 우리말로 나누는 일, 감성을 충전하게 만드는 글들과, 나아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많은 좋은 글을 공유하게 된 일이다. 당신들의 삶의 현장과 좋은 글을 공유하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지금 꺼내놓는 이야기들은 비록 눈곱만 한 정보이지만 정보의 공유라는 차원에서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는 그런 이야기도 있구나 하는 재미로 읽으셔도 괜찮을 듯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우리가 알려고 하기 전에는 숨겨져 있던 국제사회로 향해 열린 좁은 통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한다. 정보가 공유된 국제사회에서 살아가는 혜택에 관한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구글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국경 통행권에 관한 이야기이다.


http://www.cic.gc.ca/english/information/applications/prcard.asp


푸른 바다 저 멀리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서류를 준비하여 몇 가지 서류를 법무사에게 공증받아 캐나다 영주권을 지원했고, 영주권이 승인되기까지 두세 달이 걸렸고, 8개월 후에는 이삿짐을 싸서 장거리 이사를 했다. 공부를 마친 남편은 레쥬메를 백여통을 뿌리며 오타와와 온 토리오를 중심으로 직업을 알아보았으나, 정작 그를 반기던 곳은 대륙의 반대편, 석유와 정유 산업의 메카인 도시였다. 해양공학과 선박 전문가인 그에게는 최상의 자리였지만 내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아이들과 캐나다에 남겠다고 했다. 미국이라니! 그것도 텍사스라니! 그것도 휴스턴이라니!!!  가보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정글이었고, 지리적으로는 북미대륙의 던젼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주를 벗어나는데 동서로 달려 여섯 시간, 북서로 달려 열한 시간이 걸리는 그 레빗 홀로 내가 내려가야 하는 거뉘? 거길 가자고 내가 이민을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내려왔고, 십 년째 살고 있고 이젠 정이 들 정도다. 해를 더해 갈 수록, 주를 벗어나 외지로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이 동네에 대한 애향심이 더해가는 아이러니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은 이렇게 적응이 뛰어난 믿지 못할 존재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존중

작은 아이는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되고, 큰 아이는 공원의 잔디밭을 마구 마구 뛰어다니며 축구를 하던 때였다. 그 무렵 남편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고,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번거로움을 건너뛰고, 한국에서의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땅에서의 경력을 이어가 보고자 하던 중이었다. 캐나다에서 취업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전문 분야를 불문하고, "다소간의 캐나다 경력"이었다. 이해가 가는 규범이다. 주정부 기관의 하나인 Children's Mental Health Ontario에서 심리학자가 되기 위한 인턴 쉽을 일 년째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 기관은 심리적 정서적 문제로 인해 일반 학교 커리큘럼을 따라가기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대안 학교를 함께 운영하는 동시에,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심리평가와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한국에서 금방 온, 어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 내 영어가 극히 제한적이었을 것임은 자못 분명하지만, 그리고 내가 작성한 스무 장짜리 심리평가 보고서는 피드백으로 받은 빨간 잉크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 누구도 내 언어가 문제적이라는 인상이나 눈치를 주는 캐네디언은 없었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너그러움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기회를 주셨던 고마웠던, 인자하셨던 슈퍼바이져 비하리 여사.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인데 인도 출신의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인도식 라스트 네임을 얻게 된 분이다. 엉터리 오문 투성이었을 것이 분명했을 내 보고서를 읽기가 짜증이 날 법도 하셨을 텐데, 어느 하루는 이런 말로 기운을 북돋아 주셨다. " 내가 만약 프랑스로 가게 돼서 불어로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면 이렇게는 못할 거야. You must be a beautiful writer!"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을 일찌감치 교육받아 몸에 익힌 그들의 정신이 그립다.


신규 전입자들을 위한 정부의 세세한 보살핌

Children's Mental Health Ontario에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것은, 친목 모임에서 알게 된, 하이디라는 이름을 가진 캐나다 복지제도 이행기관의 꽤 고위직에 있으면서 체제 수호(!)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가진 캐나다 할머니의 후원도 한 몫을 했다 (미국에 내려온 후에도 때가 되면 카드를 보내곤 했으나 오피스를 옮겼던지, 카드가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곤 했다). 아울러 캐나다로 신규 전입한 여성들의 제자리 찾기를 돕는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했던 덕분이다. 정부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레쥬메 쓰는 법, 인터뷰하는 법 등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였고, 내가 교육받는 동안 두 아이의 데이케어 비용까지 수천 불을 지급을 하였다. 큰 아이는 이미 비용을 지불하고 사립 유치원을 다니고 있던 때였는데, 내가 교육을 받는 두 달 간 주정부였던지 시정부였던지에서 지불한 데이케어 비용이 유치원으로 자동 입금되었고, 매월 자동 납부되던 유치원 비용이 내 통장으로 되돌아 들어왔었다. 의욕 있는 신규 전입자들을 위한 국가의 감동적인 보살핌이었다. 남편이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은 고비율의 세금을 주정부와 연방정부에 납부하는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사회의 건설적인 구성원이 되어 당당히 세금도 납부하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고 또 언어를 익히며 인턴쉽에 주력했다. 결과적으론 엉뚱하게도 텍사스에 세금을 내고 있지만.... 이곳에 내려왔을 때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크고 화려하였지만, 신규 전입자를 위한 정부나 커뮤니티의 배려는 전무하였다. 제로였다. 자본주의의 정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학위 검증/공증 서비스

교육받은 전문가들에게 이민을 개방한 캐나다에서는 그들의 새 출발과 취업을 돕고자, 개인들이 각국에서 받아온 학위가 캐나다 대학에서 받아온 학위와 동등한 지, 부족하다면 어떤 과목을 더 이수해야 동일 학위로 인정해 줄 것인지를 평가하는 학위 검증/공증 서비스를 제공한다. 캐나다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매처럼 지냈던 비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 출신의 간호사는, 인근 대학에서 다섯 과목을 더 이수하라는 요구를 받은 후 캐나다 동등 학위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병원의 수술실 간호사로 여러 해째 근무를 하고 있다. 비비안뿐만 아니라 독립이민을 감행한 많은 신규 전입자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캐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 최소한 내가 보아온 통례이다. 가장 가까운 곳이 토론토 대학이었던 터라, 나는 그곳에서 학위 비교 서비스를 미리 받아두었다. 결과는 학위증서랄까 졸업장이랄까 하는 서류처럼 생긴 학위증서 같은 것이 발행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뜻밖에도 그 콧대 높은 토론토 대학의 인증이 찍힌 학위를 두 개나 받아 든 셈이 되었다. 추가 과목에 대한 별다른 이수 요구 없이 곧바로 학위 인증이 되었던 이유는 모교가 Association of Common wealth University 커먼웰스 대학연합이 갖고 있는 기준을 모두 준수하는 커리큘럼을  갖추었다마 뭐라나 하는 이유였다. 커먼웰스 대학 연합? 그게 뭔데 어째서 모교가 거기 일원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내게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세상은 넓고 국제사회에는 이 외에도 공생을 위한 여러 종류의 동맹과 평화적인 연합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였다.


비자라는 이름의 국경 통행권과 나프타 (NAFTA)

어쨌건, 토론토 대학이 발급한 두 장의 졸업장을 가지고서 캐나다에서의 인턴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경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내려와 곧 남편의 비자와 별개로 독립적인 비자를 얻게 되었고 취직을 하였다. 우리는 아쉽게도 캐나다의 시민이 되기 위한 선서를 마치자마자 다시 이사를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캐나다인들을 위해 발급하는 비자를 받게 되었다. 북미 자유무역협정에 의거해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된 캐나다인 전문가들위한 비자가 남편이 얻었던 TN visa이고, 그 가족들에게 발급하는 수동적인 비자가 TD 비자이다. Dependent의 그 D인데 나는 D자가 싫었다. 디펜던트라니... 굉장히 부담스러운 이름의 비자였다.

미국에 내려와서 얼떨결에 일을 시작하면서 비자를 바꾸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이었다. 첫 한 달간은 문화적 충격에 넋을 잃고 있다가, 충격을 타개해보고자 일을 삼아 재미 거리를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마침 아시안들을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 기구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발런티어라도 할까 하고 전화를 넣었다가 바로 인터뷰 약속이 잡혔고 인터뷰 후에 곧바로 잡 오퍼를 받았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TD의 기분나쁜 D를 N으로 바꾸는 일이었는데, 이런 일에 답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변호사를 찾는 대신 구글 신에게 물어보았다. 구글은 역시 현대의 신이다. 몇 가지 서류를 갖추고 국경의 이민국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허가를 받아오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서류 모으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구글 신이 머잖아 이민 변호사라는 직업도 없애버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http://www.nafsa.org/_/file/_/amresource/8cfr2146.htm


토론토 대학이 발급한 학위증명서의 공신력은, 미국에서 전문직에 취업한 캐네디언들에게 발급해 주는  TN visa issuance를 위한 자료로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한국 학위를 캐나다 동등 학위로 맞바꾼 후, 미국에서는 그 캐나다 동등 학위로 캐나다인 전문직 종사자에게 발급하는 TN visa를 발급받은 셈이다. 이 과정이 흥미로왔던 것은, 상대국 국민들의 자국 내에서 서비스 제공에 관한 국가 간의 협의와 그것에 대한 순조로운 일처리였다.


https://travel.state.gov/content/visas/en/employment/nafta.html#doc


구하면 구해질 것이고 찾으면 찾아질 것이라는 믿음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아이들 하교 전까지만 근무하는 파트타임이었고, 만족할 만한 액수는 아니지만 월급이 매달 나왔고 혼자 쓸 수 있는 오피스도 주어졌다. 어쨌건, 마음은 하루에도 여러번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는 나날이었을지언정, 오 년 만에 다시 대륙을 종단한 국경을 건너는 이동은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소프트한 랜딩이었다. 돌아보면 감사한 일인데, 그때는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넘쳐흐르지는 않았다. 캐나다에서 너무 멀었고, 무엇보다도 가을과 겨울을 잃어버린 정신은 생각의 초점이 잘 안 잡혔고, 태양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에서 일 년 반을 나름 보람차게 근무를 하며, 지역 신문에 정신건강 관련 칼럼도 기고를 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정신건강 교육과 치매 예방 교육을 했고, 마음이 궁지에 부딪힌 개인들 면담하였다. 적당한 자기발전의 공부 거리도 찾으려면 충분했고, 근무 시간도 적당 하였고, 사회적인 자아도 되찾아 가는 중이었고, 일 년이 지나서는 마침내 원하는 곳에 보금자리를 짓는 일도 완성이 되었다. 그런데, 하는 일이 아무래도 성에 안찼던 나는 서른일곱이 되어 마침내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물론, 남편이 우리가 한 약속을 지키겠다며 아내의 사회적 성장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박사 공부를 시작하도록 아침저녁으로 나를 닦달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내 아이 둘을 낮선 나라에 와서 혼자 키우며 서툰 영어로 일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에게 공부를 더하라고 부추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은 정말 좀 과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결국은 나도 노후를 위한 보험으로 생각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읽고 쓰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하지만, 세 가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은 실로 레빗 홀로 빠져들어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다니게 된 학교는 부시일가가 이사진으로 있는 참 마음이 난처해지는 학교였다. 내게는 집에서 통근 할 수 있는 유일한 학교였고, 편도 한 시간 반을 운전하는 것 외에는 달리 교통편이 없었다. 6년의 시간이 흘렀고, 학위를 받아들었고, 다시 가르치는 자리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은 7년이라는 통계에 비추어보면 나쁘지 않은 속도전이었다. 하지만 엄마이자 아내였던 내게, 누군가는 "거기에서 멈추고 적당주의와 지금/현재를 즐기는 쾌락주의를 배우라"고 말해 주었더라도 좋았을 뻔했다. 그런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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