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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y 01. 2016

미국이라는 아이러니

All systems are wrong, but some are useful.

                                                                         --George E. P. BOX



한국에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들은 미국에 관한 농담이 있었는데, 그것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10여 년을 살아 본 다음에야 실감하게 된다. 내용은 이러하다. 한국 유학생이 방학을 이용해 생활비를 벌어보고자, 집 짓는 공사팀에 들어가 페인트칠을 담당하게 되었더란다. 사람들이 상당히 느긋하고 천천히 일을 하길래, 또 영어가 능숙한 것도 아니라 그들과 같이 농담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뭣해, 한국인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며 열심히 일 하다보니  남들 놀 때 혼자 그날 분량의 일을 다 해치웠더란다. 으쓱해하며 칭찬을 기다렸으리라 아마도. 그랬더니 공사팀을 이끄는 보스가 와서 임금을 미리 지불하고 내일부턴 나오지 말라더라는 것이다. 이유인 즉, 팀 전체가 일할 분량을 혼자서 다 해 벼렸기 때문에, 자기들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며, 다른 팀원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정말이지 뭥미적 이유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스물 몇 살 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농담이라 생각했다.



미국 직장의 다이내믹을 기막히게 표현한 해학적인 이 사진은 한 때 인터넷을 달구었다. 이십년전 유학생의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었다.


생활인으로 살면서 객체로서 느끼게 되는 미국이란 나라는 전체적으로 느리고, 뭔가가 엉성한 구석도 많고, 특히 병원을 방문하면서 느끼게 되는 의료계 전반에 대해 느끼는 그 답답함과 황당함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러나 한걸음 다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로서 그 시스템을 속속들이 경험하다 보면, 그 전문 분야의 다양성과 관리 유지의 엄격함과 철저함에 또다시 고개가 흔들어진다. 적어도 학부모로서 내 아이가 공부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된 미국 교육의 엄격함과 철저함, 또 심리학을 공부하며 박사과정 중에 겪은 고등교육과 훈련과정의 엄격함, 마지막으로는 현장에 나가 교육제도를 이끌어가는 일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면서 알게 된 것들도 맥락을 같이 한다. 철저하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기록한다. 그런데 왜 동일한 사회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주체와 객체로서 입장 차이에 따른 이러한 괴리가 생겨날까…


소아 청소년들 정신건강을 담당하는 심리학자가 되기위해 공부하며 수련하는 동안 의문은 더 커져갔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은 이토록 진이 빠질 정도로 치열할 텐데,  그 전문가들이 막상 현장으로 나와서는 왜 그런 식으로 일할까?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다. 수퍼비전을 받는 훈련과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프랙티스가 가능해졌을 때는, 라이센스 유지할 정도의 최소한의 것만 하면서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으려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문가들의 일하는 모양새는 자기들 본위로 느긋하고,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는 듯 엉성하다. 너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고 과하다 싶을만틈 많은 인력들이 과정에 개입되어 있다.


미국 생활 초기에, 남편의 회사에서 아웃 소싱한 로펌에서 (변호사가 할 일이 너무 많았던지, 너무 편하게 일했던지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우리 가족의 비자 문제를 늑장 처리해 국경을 넘을 때 곤경에 처한 경우가 몇 번이었으며 , 신경치료를 잘못해 크라운을 두 번이나 교체하고도 결국엔 이를 뽑아야 할 지경에 이르는 8년의 시간 동안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알기 위해 찾아다녔던 치과의사의 수가 무려 몇 명이었던가…  치과의사의 세부 전공분야가 그토록 다양함을 그때 알게 되었다. 일차적인 치과 문제를 전담하는 일반 치과의가 있고, 교정만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있고, 신경치료만 하는 전문의가 있으며, 잇몸과 치아/턱의 뼈만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럼 충치치료부터 신경치료까지 그 자리에서 다 하는 한국의 치과의사 면허증은 전지전능 얼마이티 라이센스라는 말인지…. 시스템이 이리 다르다니 치과들을 방문하면서 환자로서 배신감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크라운 아래에 있는 신경에 염증이 재발한 문제를 알아내기 위해 8년 이상 치과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을 몇 명이 있어야 되는가?  극심한 치통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각종 치과 전문의들을 방문하는 동안, "내일 아침이면 나는 죽어있겠구나."라고 생각할 만큼 통증에 시달렸다. 물론 내가 운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주체로 겪게 되건 객체로 겪게 되건,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되는 것은 참 많은 심리적 대가를 치르게 한다. 어렵다.


아이가 손가락을 다쳐 소아과 주치의에게 간 적이 있는데,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아이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아과 주치의가 길 건너 건물에 있는 방사선 엑스레이 센터에 의뢰를 하고, 그 건물에 들어가서 다시 등록을 하고 엑스레이 테크니션이 엑스레이를 찍고, 방사선 진단의가 필름을 보고 진단을 내린 후, 보고서를 작성하면, 내 아이의 소아과 의사가 그 엑스레이를 판독 보고서를 다시 받아서 읽어본 후 내게 보고를 해주는 식이다. 물론 카이로프랙터라는 틈새시장에 있다. 카이로프랙터에게 가면 엑스레이를 통한 진단과 물리치료가 한자리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운이 없었던지, 카이로프랙터들이 모종의 정책 변화가 있었던지 그 날은 내가 다니던 두 곳의 카이로프랙터 모두 엑스레이 촬영이 불가능한 날이라 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의 학교에는 선생님, 학생, 양호 선생님, 서무실 직원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전문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특수교사, 특수 교사 보조, 사서 선생님, 일반 선생님을 보조하는 선생님, 언어치료사, 직업 치료사, 심리학자, 심리학자와는 별개로 카운슬러가 존재하고, 또 교육진단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상주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다. 아이가 학업을 못 따라가거나 행동에 문제가 있어 수업에 곤란을 받으면, 이 아이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고 학습 커리큘럼을 따라가 성공적으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는데, 이 많은 전문가들이 모두 달려든다. 일반적으로 한 학교의 10% 정도에 달하는 아이들은 여러가지 양상으로 학교 적응에  곤란을 보인다. 이를 해결하도록 고안된 엄청난 고비용의 시스템이다. 뒤쳐지는 이들이 뒤쳐진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기회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미국 교육법의 근간이다.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교육철학이고 대단한 시스템이 아닌가. 만약에 우리 아이가 발달이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 하여 개별화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그간 낸 교육세가 아깝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부모들은 그런 교육법에 고마워하며 학교에 더욱 많은 기부금을 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교육법의 해택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부모들은 10% 정도라는 것의 반대 급부는 나머지 90%의 부모들이 감당해야하는 고비용의 교육세이다.   


고도로 전문화 세분화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필요한 서비스를 받는 일은, 모든 것이 빨리빨리 처리되는 한국이라는 익스프레스 국가에서 나라에서 살다 온 나에게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잡한 과정이고, 종종은 혈압 솟구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유 없이 혈압이 올라하룻밤 ER을 방문했던 친구는, 각종 검사를 통해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정책상 그 다음날 저녁까지 꼼짝없이 병원에 갇혀있어야 했고, 병원비는 기천만원이 청구되었다. 친구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혈압을 상승하게 했던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특별히 비정상인 원인이 없는데도 자신을 다음날 까지 "감금해" 두는 의사와 병원의 정책 때문이었다고. 심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들로서는 환자의 안전을 100%책임지도록 고안되어 있는 프로토콜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마음 차분할 때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런 극히 전문화 분업화된 시스템과 교육제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입장을 바꾸어 주체로서 기능하면서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면, 쉽게 말해 직업을 구하고자 한다면, 큰 노력들이지 않고도 고를 수 있는 직업이 많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내가 만난 학부모가 의료계에 종사한다 하여, 그가 의사 아니면 간호사이겠거니 추측할 필요는 없다. 의료계에는 무궁무진한 job title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IT 관련 일을 하고 싶다 하여 모두가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할 필요는 없다. IT 업계에 무궁무진한 타이틀을 가진 역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미국이라는 시스템은, 사회의 객체로서 보다 직업을 가진 사회의 구성 주체로서 살아가기가 더 편리하도록 고안해 놓은 시스템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각자가 가지는 삶의 지향점이 아닐까. 조금 먹고 많이 놀고 편한 삶을 택하여, 편한 직업을 택할 수도 있고, 세상에 나를 증거 하며 존재를 알리겠다 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해서 그렇게 하면 된다. 선택지가 매우 다양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저변의 인프라와 고용창출을 최대화하고, 좀 덜 똑똑해도 한 가지만 잘하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사회를 꾸려가는 것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편한 구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또한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개인이 인간으로서 가진 권리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있으며, 개인은 노력하는 한 원하는 바 무엇이나 될 수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독립선언문에서 주창한 이 나라 건국의 철학이 구현된 실체가 아닌가 하는데 까지 생각이 옮겨간다.. 그것은 어쩌면 “여럿이 함께…. ” “대동단결 대동 투쟁”이라고 자판기 커피 컵에까지 세겨져있던 90년대 대학시절의 모토로 우리의 지향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가?  여럿이 함께 천천히 나아가는 시스템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반대급부는 무한 인내심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개개인의 예리함과 날렵함은 감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작 조직이나 시스템의 상부로 가게 되면 바운다리를 넘나들며 통합하고 새 바운다리를 창출해 내는 개인들이 빛을 발하고 조직을 이끌기 되겠지만 말이다. 무디고 평범한 다수가 별 깊은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며, 누구 눈치 볼일 없고 그렇게 산다고 누가 뭐라하지도 않는 시스템.



© Yoon Hyunhee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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