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슬론의 맨해튼 연대기 2
이번에도 라과르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유태인들의 거리를 지나고 브루클린을 빠져나와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 남부 금융 디스트릭트로 들어왔다. 지금은 유럽으로부터 몇 시간의 비행이면 대서양을 건너 도착할 수 있는 뉴욕이지만 이 곳을 향한 초기의 이민자들은 생사를 건 몇 달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빌딩 숲으로 들어오자 시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마천루들 사이로 과거와 현대의 조화가 보인다. 그 많은 행인들의 행렬에 잠시 눈이 아찔해진다. 이것은 대도시 교외 지역의 느긋하고 조용한 그간의 생활 동안 기억에서 지워져 있던 풍경이다. 거리에는 바이크를 타거나, 거리 음식을 먹으며 금요일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행인들로 가득하다. 행인들은 거리의 나무 수만큼이나 많다. 백수십백 년의 더께가 앉은 워터 스트리트의 거대한 빌딩 숲 사이를 조심스레 빠져나가는 동안,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보았던 백 년 전 이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거리를 바삐 움직이는 현대의 어린 누들스들을 만난다. 맨해튼이 전 세계로부터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이유야 백가지도 더 될 테지만, 이 도시가 나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현대 인간정신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맨하탄의 건축과 조경, 골목의 풍경은 끊임없이 사유하는 인간의 본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서 펄펄 뛰는 인간 욕망이 압축된 지층의 횡단면이기도 하다. 맨하탄의 숱한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 역시 그 욕망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노동자 혁명을 꿈꾸던 시인 박노해의 맨하탄 방문기는, 지구 상의 가장 열등한 것들이 모여 지구 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들을 구현해 낸 이곳에서 인류의 유토피아를 발견한다는 고백이었다. 시인의 맨해튼 감상기는 이 도시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화가 존 슬론은 박노해 시인이 말했던 바로 그 맨하탄의 정체성이자, 열등한 존재들이 모여 유토피아를 건설하던 그 시절의 현장 기록을 담고 있다. 그는 가난했으나 재능이 있었고, 재능과 노력으로 사회의 변화를 꿈꾸었고, 도시의 서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았던 화가였다. 뉴욕의 화려하지 않은 주변부의 삶과 서민 정서가 깊게 베인 풍경을 연민을 담아 그려냈던 존 슬론의 작품들은 20세기 초기의 뉴욕의 풍경을 보여주는 연대기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14번가와 6번 애비뉴 사이에 있는 플랫 아이언을 닮은 건물 꼭대기 층에 작업실을 꾸몄다. 슬론은 그리니치 빌리지와 첼시를 오가며 생활했는데, 당시의 그 지역은 보헤미안의 집산이었다. 산업혁명이 종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며 도시화를 향해 달려가던 19세기 초반 서구에서는 주류사회와 전통의 가치, 그리고 자본주의적 지향에 대항하는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보헤미안들이 생겨났다. 삶으로부터 정신적 도덕성과 예술적 감수성을 지켜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던 그들은 기성 제도권에 들어가 안정적인 직업과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리는 일을 거부함으로써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려고 했다. 개인이란 거대한 기계의 볼트와 너트의 역할정도를 할 뿐인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누구나 퇴사의 욕망을 가슴 한편에 품고 다니는 것 아닌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은 하버드를 나와서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에 손수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글을 썼던 19세기의 데이비드 소로우인데 “영혼을 사는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는 그의 말은 보헤미안의 정신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동료 보헤미안들로는 시인들인 랄프 왈도 에머슨, 월트 휘트먼 , 그리고 작은 아씨들을 썼던 소설가 루이자 메리 올롯의 아버지 아모스 브론슨 올콧 같은 초월 주의자들이 있다. 초월적 정신세계와 이상주의적 지향, 그리고 독자적인 이들의 삶의 방식은 조선의 선비 집단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아모스 올콧은 급기야 1844년 동료들과 함께 실험적 공동체 프릇랜드 (Fruitland)를 건설하고 최소한의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삶을 실험했다. 작은 아씨들의 후속 편에서 나오는 조가 설립한 학교는 프룻랜드를 성격을 조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도덕적 지향은 다소 과격한 데가 있었는데, 노예 노동으로 생산되는 면옷을 거부했고, 육식이나 유제품을 먹지 않았고, 찬물에 목욕을 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을 찬양했다. 이 같은 현실을 초월한 극단적인 실험은 지속 가능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인 것이어서 7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술은 지배계급과 종교 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아왔고 주류사회의 가치를 대변했고, 근대에 와서는 부르주아들의 취향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를 거쳐 19세기로 들어오면서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부를 축척하고 구매력을 갖춘 시민계층이 성장했다. 이에 따라 미술시장을 통한 직거래가 형성되자 예술가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관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신의 귀족을 지향하는 보헤미안들은 산업사회를 거부하며 원초적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적 예술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넓어진 시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 20세기 초반 뉴욕의 슬론과 그의 동료 화가들은 말하자면 매사추세츠 정신적 계보를 잇는 뉴요커보헤미안들이었다. 주류사회에 저항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는 아카데미즘에 저항하였고, 자신의 주변과 삶의 현실에 눈을 돌린 사실주의적 도시 화풍을 시도했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저서 불안에서도 썼듯이 “보헤미아의 역사는 품위 있는 계급을 약 올리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1917년 뉴욕의 일부 예술가들은 예술 사랑 아름다움 담배에 바쳐질 “자유롭고 독립적인 그리니치 빌리지 공화국” 창설을 선언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워싱턴 스퀘어 아치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위스키를 마시고 장난감 총을 쏘고 독립선언문을 읽는 등 짓궂고 기발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삶의 한 가지 방식이었고, 회화란 화가의 삶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표현이었다. 예술이란 창작자의 가치관과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들에겐 생활 주변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이 예술의 주제였다. 다다이즘을 선도했던 프랑스의 마르셀 뒤샹은 1915년 그리니치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진정한 보헤미아를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