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바다 Oct 15. 2020

나의 인생이 프라이밍 당해 온 거라면

정말로 자유의지 같은건 없는지도 모른다


많은 환경 요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감각에 스며들어 행동과 감정, 그리고 의사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때로는 피부에 닿는 미약한 온기만으로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을 더 크게 느끼고, 미약한 냉기가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외로움과 고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믿는다. (그 유명한 예일 대학 존 바그의 따뜻한 커피 실험이다) 모두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프라이밍 효과는 감각 기관에 입력된  물리적 자극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성적인 의사결정이나 판단, 그리고 행동에도 암묵적인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차일드 하삼 -보스턴 공원의 황혼-1885 유화

하삼의 이 그림은 눈쌓인 겨울 공원의 냉기와 오렌지빛 황혼과 가로등의 온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따뜻한 커피 한잔 손에 들고 싸늘한 거리를 걷고 싶은 기분이 된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심리학 연구들에서 검증되고 있는 시절이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아동기는 과거에 종료된 시간이 아니라고 말했고 이것이 그가 말한 무의식의 개념이다. 현대적으로 재정의 하자면 무의식은 유년기의 기억에 의한 특정 대상과 사건에 대한 프라이밍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유년기의 기억과 감각 경험은 우리의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개인의 취향과 감정, 의지와 진로의 방향성, 그리고 미래를 위한 의사결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프라이밍은 과거 시제를 가지기도 하고 현재 시제를 가지기도 하고 미래시제를 가지기도 한다. 우리의 이성은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며 육체를 관장하는 힘이라기보다는 의식적 경험과 미세한 감각체험에 의한 무의식적 경험들의 총합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고도로 진화한 알고리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이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한 어디까지나 최신식의 전문가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것.

흥이 난 어느 날은 그간 그린 그림들을 벽에 죽 걸어놓고 아들에게 전활 걸어 “너만을 위한 virtual exhibition”을 해주었다. 화면속에서 빵긋웃는 스무살짜리의 모습은 어랫만에 보여주는 아기같은 모습이었다. 인디애나 퍼듀 공화국에서 3학년을 시작하는 큰 아들과 통화에서 내 미래를 소리 없이 프라이밍 했던 일화가 떠올랐다. 아이가 다음 학기부터 유체역학 실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반가운 마음에 랩의 웹페이지를 방문했더니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인종의 전시장 같았다. 장 자크 모시기, 임마누엘과 소사, 포르투갈과 인도 출신으로 내가 읽어온 논문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라스트 네임의 총집합... 이탈리아계 젊은 지도교수의 똘끼 가득한 눈은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살짝 우수에 젖어 보였다. 홈페이지는  compressibility of fluid, turbulance, vortex..... 이런 단어들로 도배되어 있어 어질어질했다. 그가 최근에 받아낸 펀딩은 초음속 관련한 연구였더라.
기가 질린다.


중학교 3학년 때 기계설계를 전공하는 외삼촌의  연구실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공대 건물의 그 많은 방들에 각각 추상적인 영어 단어들이 붙어 있었다. 어떤 단어였던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영어 단어가 붙어있는 방을 가리키며 왜 저런 단어가 저 연구실 문에 붙어있는지 여쭈었다.  외삼촌은 대답은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면 다리가 무너지는지... 물살이 얼마나 세게 흐르면 건물이 무너지는지 뭐 그런 걸 계산하는 연구실이라고 대답하셨던 것 같다. Fatigue! 그 대답은 중학생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형태도 없는 추상적인 힘을 계산까지 해내다니... 나는 그래서 공대생들은 천재인가 보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게 되었던가 보다.  그때의 충격은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이른바 내 무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확신할 수 있다. 대학 때도 주로 공대 후배들과 친하게 지냈다. 내가 이것저것 물으면 시원시원하게 대답 잘해주는 그 아이들의 샤프하고 단순 명료한 사고방식이 좋았고 깍듯한 예의도 좋았다. 공대 후배들은 심리학 전공하는 나를 심리적 지주라고 불렀다.


남편은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었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이 사람이 업으로 삼는 일이 그 바람과 물살의 세기를 버티는 건축물의 힘을 계산하는 일이었더라... fatigue 전문가.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런데 아들이 터뷸런스... 볼텍스... 하이퍼 소식 이런 어지러운 현상을 잡겠다 하니, 중학교 3학년 때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 오는 것이었다. 형태가 없는 자연현상을 통제하겠다니.


그래서 따뜻한 커피 온도를 손에 쥘 때 개인이 느끼는 세상의 온도도 올라간다는 프라이밍 연구의 일가를 이룬 예일 대학의  존 바그는 자유의지 같은 건 일루젼일 뿐이라는 극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팔자라고 주로 한탄하는 인생의 경로는 의식적 경험과 미세한 감각체험에 의한 무의식적 경험의 총합위에 길을 내며 걸어간 지극히 사적인 오솔길 같은 것인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루이스 글락 - 스노우 드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