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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Nov 01. 2020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고전 사례: Alias Grace


어떤 작가들은 (대체로 작가들은) 심리학자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문학은 관념의 숲을 거니는 예술이고 심리학은 측정 가능성, 예상 가능성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 또는 정신의학이기에,  두 분야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접근법을 달리하고 두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인정한다.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때로는 암시적이고 모호함을 내포해야만 하는 작가들의 언어 예술을 나도 사랑한다. 작가들은 심리학자들이 언어를 무지막지하게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고, 누가 들어도 명명백백한 평면적인 것으로 납작하게 질식시켜 놓는 것이 싫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심리학에 투신했던 사람으로서 <알리아스 그레이스>라는 명성이 자자할 뿐더러, 주인공이 가지는 모호한 정신세계가 스토리의 동력인 이 작품을 앞에 두고서 나는 콘크리트 하기 그지없는 심리학 해석을 반사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음에 웬일인지 문학의 애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법이 존재함은 지당한 사실이니 심리학적 해석이 꼭 나쁜 일은 아닐 것...


Alias Grace (가명 그레이스)

A novel translated into visual language on Netflix by Sarah Polle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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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먼로 여사와 더불어 캐나다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여성 작가인 마가렛 엣우드의 전작들은 자주 영상언어로 옮겨져 왔다. 올초에 훌루에서 제작되어 방영된 <시녀 이야기>는 무성한 화제를 낳고 올해의 에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이미 1980년대에도 영화화되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캐나다 아역 배우 출신의 사라 폴리 감독의 총지휘 하에 제작되어 이달부터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Alias Grace 가명 그레이스>는 지난 9월 토론토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이후로 뉴욕 타임스, 아틀란틱 매거진, 뉴스 위크 등 미국의 전통 있는 시사 매체들로부터 쏟아지는 호평을 받고 있다. 각본을 쓰고 총감독을 했던 사라 폴리는 원작의 텍스트를 영상언어로 옮겨오는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난한 하층민 이민자 소녀인 소설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자신을 초대하지 않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추락하고 부서져 갔지만, 그녀의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길어 올린 독백들은 예리하고도 아름답다.


"Sometimes when I have seen the pure white clouds billowing in the sky after a rain, I used to think the angels themselves were hanging out their washing." - Grace


''When we had a wash hanging out and the first drops began to fall, we would rush out with the baskets and gather all in as quickly as we could, and then haul it up the stairs and hang it out anew in the drying room, as it could not be allowed to sit in the baskets for long because of mildew.... The shirts and the nightgowns flapping in the breeze on a sunny day were like large white birds, or angels rejoicing, although without any heads. But when we hung the same things up inside, in the gray twilight of the drying room, they looked different, like pale ghosts of themselves hovering and shimmering there in the gloom.''- Grace


대기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아이리쉬 이민자들의 절박했던 현실과 빅토리아 시대 캐나다의 계급의식 충만했던 사회상 등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차분한 연출은 미니시리즈 여섯 편을 눈을 떼지 않고 한자리에서 끝낼 수 있을 만큼 흡입력이 강한 드라마로 탄생시켰다.


Alias Grace

Novel by Margaret Atwood (1996)


Margaret Atwood의 원작을 아직 읽지는 않았다. <시녀 이야기>에 드리운 몰시대적/시대착오적인인 배경과 디스토피아적인 잔인한 기운이 내게는 썩 어필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작품들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온타리오 고딕 스타일"의 작가 반열에 함께 이름을 올리고는 있지만, 마가렛 엣우드는 엘리스 먼로 여사와는 무척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작가는 Alias  Grace 의 출간에 앞서 이미 동일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시집과 다른 한 편의 소설을 출간한 바가 있기에 Alias Grace는 작가의 평생에 걸친 연구의 결과물인 듯하다. 마가렛 엣우드 여사는 야심 차게도 이 소설 속에서 19세기 사회에도 이민자들의 현실로 대변되는 계급 불평등의 잔혹한 현실, 피지배 계급 내에서도 약자인 여성들이 겪는 착취와 부조리, 이로 인한 사회적 소요와 갈등, 급진적 민주주의를 향한 피지배층의 갈망 등 많은 거시적인 주제들로 큰 틀을 짜고 있는 듯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에 갇힌 19세기 하층민 여성들의 일상은 마치 탈레반 치하의 중동국가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리치먼드 힐의 살인사건


소설은 1843년 토론토 북쪽의 리치먼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아일랜드계인 그레이스와 가족은 대기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로 향하고, 와중에 어머니는 배 안에서 열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12세의 장녀 그레이스는 살아남아 밑으로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항해 도중 난간에 기대선 동생들을 보며 그들 중 한두 명을 바다에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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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처한상황은 극악했다. 동생 한 두 명이 없어지면 그만큼 빨래를 덜해도 되고 먹을 것에는 조금은 여유가 생길 테니까..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하여서도 자신을 향한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과 강간의 위험은 계속되고, 어린 그레이스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살해 욕구를 느낀 날도 있었다. 결국은 아버지에 떠밀려 동생들을 남겨둔 채 부유한 집안의 가정부로 들어가 일을 하며 급료를 가족에게 보낸다.


처음 들어간 집에서 만난 메리 위트니라는 이름의 메이드는 급진적인 정치관을 가진 여성이었으며 그레이스의 단짝이 된다. 그러나 메리는 주인의 아들인 파킨슨 씨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가지고, 불법 유산 시술을 하고 돌아온 그날 저녁 목숨을 잃는다. 그레이스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에 이은 유일한 의지처였던 친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상실이다. 메리가 죽어있음을 발견한 다음날 아침, 그레이가 충격에 휩싸인 채 "(니 몸속으로) 들어가게 해 줘"라는 메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환청이다. 이후 기절을 하다 다시 정신이 들기를 며칠간 반복하는 등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데,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레이스는 어디로 간 거냐? 나는 메리다."라고 하는 등 착란 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이 험난했던 개인사는 그레이스의 내레이션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메리는 좀 더 나은 급료를 받고 리치먼드 힐에 있는 농장주 토마스 씨네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집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지만 조금 더 경력 있는 낸시 몽고메리라는 여자와 마구간 지기 제임스 맥더멋, 그리고 플루트부는 소년 이웃집의 제이미 월시를 만난다. 주인인 토마스 씨와 내연 관계있던 하녀인 낸시의 존재는 손가락질당하는 죄의 현존이었고, 임신까지 하게 된 낸시는 그레이스를 사사건건 자극하고 괴롭힌다. 그리고 어느 날 토마스와 낸시는 죽어서 발견되고, 제임스와 함께 도주 중에 소환되어 온 그레이스는 살인이 일어나던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간의 증언은 변호사가 시켜서 한 말이라고 구술한다. 제임스와 그레이스는 살인사건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상황이다. 교수형이 마침내 선고되었을 때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한다. 이후로도 그레이스는 충격을 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실신을 하곤 한다. 제임스는 곧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그레이스가 여자이고  16세의 소녀라는 점을 감안해 평생 종신형에 처해진다.


그녀가 15년쯤 복역을 하고 난 상황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한 종교단체의 노력의 일환으로 매사추세츠 로부터 날아온 정신과 의사 싸이먼 조던 박사와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때는 아직  프로이트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 그러나 이미 꿈과 기억을 단서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 했던 시도들은 진행 중이었으니.... 싸이먼은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그레이스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레이스가 하녀로 일하던 시절, 떠돌이 박물장수였던 제레마이아는 어느덧 당대의 최신 의학이라는 neuro hypnotist가 되어 그레이스 앞에 나타나, 그녀를 최면 상태에 놓고 기억을 살려내려는 시도를 한다. 그레이스를 구해내려는 종교단체의 커미티 앞에서 행해진 이 최면 요법에서 그레이스가 최면에 들었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메리 휘트니 Whitney 였다. 메리 위트니는 살인을 자신이 계획했다고 고백을 하면서 그레이스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레이스의 입으로 전해졌던 살아생전의 메리 휘트니는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앙하는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레이스의 고용주 토마스가 하층민들이 소요를 진압하는데 앞장서는 기득권 남성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과, 미혼으로 생활하면서 자신의 메이드를 임신시킬 수 있는 성격의 남성이었음과, 상위 계급인 주인 남성을 가운데 놓고 두 하녀 벌어지는 감정적 줄다리기 등등은, 수동적이고 자기 방어에 충실했던 그레이스에게 보다는, 메리 위트니에게는 매우 자극적인 살인의 동기부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빅토리안 사이코 스릴러 추리 소설>의 탄생


이 이야기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을 감안한다면, 마가렛 엣우드 여사는 <빅토리안 사이코 스릴러 추리 소설> 정도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할리우드의 흔한 남자 감독이 제작을 했더라면, 화려한 미장센과 어지러운 정사신과 피칠갑이 된 화면으로 가득한  <빅토리안 사이코 스릴러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딱 맞아떨어질법한 흔한 분위기로 연출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라 폴리는 주인공을 젊고 아름다운 사이코 하녀 이야기이기로 풀어나가기보다는, 시대의 억압과 지배구조에 내몰린 인간이 어디까지 파괴될 수 있는지, 초대받지 못한 세상에 내던져진 쓸쓸한 영혼이 끝 간 데 없이 부서져 갔을 때, 그 분노와 시대의 억압 아래 숨겨져 있었어야 할 에너지는 어떻게 발산되었을지를 질문하고 그 복잡하고 알듯 모를듯한 여자의 내면을 추적해간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실은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레이스라는 가명을 쓴 메리 휘트니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가명 그레이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메리 휘트니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Alias Grace = Mary Whitney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고전적인 예


사회의식과 페미니즘적 관점에 입각한 역사 소설이기도 하고 새로운 형식의 추리 소설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레이스의 의식의 심연에 깔린 기제가 궁금하고 그녀가 보이는 일련의 이상행동들과 병리학적 증상들에 우선 초점을 맞추기 쉬울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캐나다의 계급의 사다리 가장 밑바닥이자 가장 천대받던 아이리쉬계 이민가정의 장녀였던 하루하루를 목숨을 버텨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그레이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엄마와 절친한 친구는 그녀가 사춘기를 맞기도 전에 비극적으로 갑자기 죽어버리고, 운신의 폭은 지극히 제한되어있을 때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인생으로부터 더 이상 내몰릴 곳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억눌리고 숨죽여 왔던 수동적인 자아의 에너지는 그레이스로부터 떨어져 나와 메리 휘트니라는 적극적인 인격을 쓰고 반격에 돌입한다. 사라 폴리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To be a woman in that time, or any time, there are parts of your personality and responses to things that you’re expected to suppress..... So what happens to all that energy and all that anger? What do you do with powerlessness? The idea of having more than one identity, the face you show to the world and the face that’s deep within, captivated me.”                                             ‘Alias Grace’New York Times, by Katrina Onstad, OCT. 25, 2017


1800년대 중반 캐나다에서 실제의 살인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마가렛 여사가 기술하는 그레이의 행동 양태는, 실제 기록에서 가져온 것인지, 작가가 그 장애의 병리학적 증상들을 연구하여 소설 속 캐릭터로 패치워크 하여 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병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레이스의 일대기가 해리성 정체성 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er (구 다중인격장애. 2013년 재발간된 정신과적 장애의 통계와 진단편람 5판에서는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 5) 에서는 이전의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다중인격 장애를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해리성 정체성 장애로 개명했다)의 역사적인 사례 연구로 읽히기도 한다.


증상

잦은 실신으로 대변되는 히스테리 증상

살인 사건의 경위에 대한 기억 상실

사건 후의 도주

몽유병이라 불리는 sleep walking

종신형 선고 후 감옥으로부터 정신병원으로 이동 수용되었던 경력

최면 상태에서 불러 내어진 분열된 자아 Alter ego 메리 휘트니..


그레이스의 증상과 관련된 유년기의 심각한 트라우마는 엄마와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을 것이고, 그녀가 처한 삶의 현실은 매일매일이 트라우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에 관한 연구는 1880년에서 1920년 사이 그리고 1944년에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알려진 사례들에 67% 가 이 시기에 보고 되었다고 한다. 그레이스에 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1800년대 중반에는 이 같은 정신과적 현상에 대한 이해와 진단 체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그녀가 보였던 이상 행동과 증상들을 기록해 두는데 그쳤던 것일 수도 있다. 미국 심리학회의 2013년 보고에 의하면 북미에서의 유병율은 0.1% 에서  2% 정도이다. 2003년 캐나다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정신과 입원환자의 약 6%가량이, 미국에서는 정신과 외래 환자의 약 6% 가량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것을 보고된다.  


미국 작가 프렌신 프로즈는 1996년 12월에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던 서평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독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따분한 시도이며... " 소설적 흥미를 잔뜩 고양시켰던 그레이스의 내레이션과 미스터리 한 성격의 원인을 한 단어의 정신과적 장애로 못 박아버릴 수 있는 기분 나쁜 암시로 받아들이며 "disheartening suggestion that the key to her amnesia may involve the most faddish of 20th-century psychiatric diagnoses."로 폄하에 가까운 평을 하기도 했다. 프렌신 프로즈가 그레이스의 이상 행동과 정신과적 장애를 연결시키게 되는 이 같은 암시를 비하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같은 해 봄에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 Primal Fear가 개봉되어 애드 워트 노턴에게 아카데미 조연상 노미네이트와 골든 글로브 조연상 수상을 선사했던 터라 소재의 동시발생을 식상하게 여겼던 탓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기록을 바탕으로 마가렛 여사가 그레이스를 재구성하여 1996년 출간 한 것은 1973에 <사이빌>이라는 책의 출간 이후로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진단이 극적으로 증가했던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중학교 때 보았던 <사이빌> 미니 시리즈는 미스터리 한 인간의 정신세계로의 첫 입문이기도 했고, 심리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이기도 했다. 학부를 다니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사이빌의 원서를 찾아서 읽었으나, 중학교 때 받은 충격을 되살려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국의 정신과 병원에서 길지 않은 임상 경험을 하는 동안 다중인격장애 환자를 만나볼 기회는 없었으나, 다중인격장애로 진단된 환자를 최면치료 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공부할 기회는 있었다. 그 환자는 세명의 분열된 자아를 alter ego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무척 폭력적이었고 자신의 폭력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세한 내용은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지극히 고통스러운 환경에 의해 찢기고 상처받은 영혼들은 탈출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아를 분열시켜 다른 인격체를 불러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대처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의학적 진실이다.


백세 시대의 노익장들, 캐나다의 작가 할머니들과 젊은 감독


 내각의 절반을 여성으로 구성하고 있는 캐나다의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생각하면 마가렛 엣우드의 소설에 반영된 불과 한 세기 반 전의 역사는 격세지감이다. 한편 마가렛 여사의 통렬한 페미니즘과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다시 영상 언어로 번역되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서 열광을 받기 시작하는 현상은 트럼프 당선 이후 북미에 불어닥친 정치적 돌풍, 그가 벌이는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일련의 넌센스 액션들로 (가혹한 이민정책과 낙태 금지법, 여성들의 피임 비용을 의료보험에서 삭제하는 방안 등) 우리들의 피를 끓게 하고 있는 시대적인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았을 때, 현재 지구 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캐나다에서 백칠십 년 전의 여성들의 삶은 어떠했던가를 볼 수 있다. 트럼프가 유발한 정치적 소용돌이가 아이러니하게도 77세의 노 작가 마가렛 엣우드에게는 그녀의 작품들이 재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적 호재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대 80대에 이르러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인생 최고의 피크를 올리는 캐나다 할머니 작가들의 근년의 행로는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좋은 롤모델들이다.  


독립 영화라는 참호를 파고, 자신의 인생과 일을 별개가 아닌 하나의 정체성 속에서 풀어나가는 사라 폴리 역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하는 훌륭한 감독이다. 나이 17세에 <Alias Grace 가명 그레이스>를 읽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자기에게 "영화권"을 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썼던 당찬 소녀는 20년이 지난 서른여덟이 되어서, 딱 적절한 시기에 그 계획을 완성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인생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사라 폴리가 앞으로는 어떤 작품들을 가지고 돌아올지 귀추를 주목한다.

아서 갠슨의 작품 세계를 통해 보는 아스퍼거의 내면세계


몇 해 전 여름, 동부의 여러도시를 돌아보던 가족여행에서, 보스턴을 향한 우리 여정의 목적지는 MIT Museum으로 정해졌다.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내아이 둘과 엔지니어인 남편이 우선적으로 흥미를 보일 장소는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하여서다. 숙소를 떠나 죠지 위싱턴 다리를 건너 세 시간 반 drive, 메사추세츠 에비뉴256번지에서 대면한 것은, Arther Ganson이라는 작가의 Kinetic Sculptures exhibition이었다. 생소하고 낯선 쟝르라 흥미가 돋우어졌고, 움직이는 작품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데, 우선 그의 움직이는 조형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작품명: 생각하는 의자 Thinking Chair.


시작점도 끝점도 없는데... 두 다리로 뒤뚱거리며 느리게 걷고 있는 동전 크기의 노란색 나무 의자. 작고 귀여운 노란 의자가, 울퉁불퉁한 암반 위를 끝도 없이 느릿 느릿 걸어가는 형상의 작품. 동력은 의자에 연결된 메탈 축과 그에 연결된 체인과 여러가지 기계들의 연쇄작용이다. 의자는 기능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데 있지만, 역설적으로 의자가 두발로 걷고, 생각을 한다니... 호모 에릭투스,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왠지 모를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정작 작가는 이 작품을 자화상이라고 한다. 자신이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자신의 스튜디오 옆으로 난 숲 길에 놓인 납작한 암석 위를 원을 그리며 빙빙 돌면서 걷고 있는 자신 발견한다고, 그러한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적고 있다. 혼자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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