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바다 Nov 01. 2020

기억의 현재

환자  H.M. 영원한 현재를 살았던 남자가 남긴 레거시

Exhale the fast and inhale the  future


기억의 실체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왔으나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했던 남자 헨리 몰레이슨 (Henri Molaison 이하 H. M.)은 심리학과 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타임머신은 공상과학 소설의 주된 소재였고, 현대의 물리학은 모든 시간의 동시적 열람이 가능한 공간을 상상하기도 하지만, 과거와 미래로의 진행이 자유로운 생체적 타임머신은 우리의 뇌 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다. 인간의 뇌는 과거와 미래로의 이동이 자유로운 타임머신이다. 그러나 뇌 속의 타임머신이 망가졌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십 대의 어느 겨울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뇌 손상을 앓은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간질발작을 앓던 남자의 이름은 헨리 몰라이슨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서야 일생을 H. M.으로만 알려져 있던 남자는 정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에게 닥쳤던  비극은 자전거 사고 후유증으로 얻은 심각한 간질 발작이었다. 어려서 입은 두뇌의 외상은 점점 악화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무력화시켰다. 20대의 어느 날 당시에 유행하던 뇌 절제술의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던 스코빌 박사를 만나게 된 사건은 비극이었을지 행운이었을지 우리로서는 말할 수가 없다. 해마라를 뇌 기관의 기능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시절, 그는 수술상의 실수로 해마와 연결된 아미그달라, 그리고 아미그달라 앞에 위치한 후각 경험 중추인 후구 (olfactory bulb)의 일부를 절단당했다. 그 시건이 가져온 그 결과는 그의 삶이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시간 속에 정지해 버린 것이었다. 수술 이후 그의 현재의 경험은 기억으로 넘어가는 기억의 통로를 상실했고 차곡차곡 쌓인 기억을 통한 시간여행은 완전히 차단당했다.


영원한 현재의 순간에 갇힌 그의 기억 현상에 관한 연구는 맥길 대학의 심리학자 밀러 박사와 MIT의 수잔 콜킨 박사에 의해 1950년 경 시작하여 그가 사망한 2008년까지 진행이 되었다. 그의 삶은 본의 아니게 인류의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주는 혁혁한 공로를 남아있지만, 그의 뇌는 살아생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수천 장의 슬라이스로 박제된 그의 뇌 표본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과 뇌 표본의 소유권을 놓고 신경해부학자와 심리학자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과 자존심 싸움 진행 중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엄격한 윤리적 제재와 규칙이 많이 제정되어 왔지만, H. M. 의 사후 그의 뇌 표본의 소유권을 둘러싼 법적 윤리적 공방을 보고 있자면 윤리적 제제와 규칙을 제정하는 일은 갈길이 먼 것 같기도 하다.


수술을 집도했던 스코빌 박사와 맥길 대학의 심리학자 브렌다 밀러 여사는 Henri Molaison의 임상사례를 평생토록 연구하여 인간의 기억을 여러 종류의 차별적인 형태로 개념화하였다. Henri Molaison는 뇌 속의 해마- 히포 캄푸스- 부위가 심각한 손상을 입은 후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게 되면서 해마가 단기 기억 (새로운 경험)이 장기기억으로의 (익숙한 기억 또는 추억) 전환 (기억 응고) 일어나는 장소임을 확인했다. 상이한 기억의 종류들로는 사건과 경험에 관한 기억을 일화 기억 episodic memory, 독서나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을 개념 기억 declarative/conceptual  memory, 그리고 우리가 운동 기억이라고 일컫는 몸이 기억하는 procedural memory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사건들과 가족과 관련된 일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고,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수술이 있던 해와 16세 이후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심리학자였던 브렌다 밀러가 주도하는 실험의 일환으로 H. M. 은 큰 오각형의 별이 두 줄로 그려진 형상을 제시받고 두 줄 사이에 별을 따라 그리는 작업을 매일 되풀이했다. 이 과제는 그에는 늘 새로운 검사였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그가 별을 그리는 데 있어서 실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또한  생의 후기에는 테니스도 배워서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되었다. Henri Molaison가 자신이 어제도 이 검사를 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기억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해마가 일화 기억이 응고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그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별을 그리는 스킬은 점점 나아졌다는 것은 일화 기억과는 다른 또 다른 종류의  암묵적인 학습을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언어적 회상을 통해 기억의 생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외현적인 일화 기억은 달리 언어적으로 재현될 순 없지만 운동신경과 근육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절차를 기억하는 암묵적인 종류의 상이한 기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신체의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익힌 기억은 언어를 매개로 복기될 수 있는 명백한 기억과는 별개로, 절차기억 (procedural memory)이라는 기억의 (implicit memory) 한 형태로 개념 정립이 기능하게 되었다. 운전을 하는 법, 자전거를 타는 법, 치매가 발생해서 생애의 기억을 잃어버린 기타리스트가 자신이 좋아하던 곡을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근육을 구성하고 있는 감각-운동 뉴런에 세겨진 절차적 기억이다.


한편, 해마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한 연구들은, 어떤 종류의 새로운 훈련이나 학습을 경험한 후 수면시간 동안 해마의 전기적 활동이 유의미하게 증가함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해마에서 새로운 훈련에 관한 정보처리가 활발하게 진행됨을 의미한다. 학계는 이를 기억 응고 -새로운 경험이 공고해져 기억으로 전환되는 과정-일어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해마 자체에 기억이 저장된다기보다는, 새로 입력된 경험을 정리해서 임시 보관했다가 궁극의 기억저장소로 발송하는 일종의 기억의 쉬핑센터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브렌다 밀러가 H. M. 에게 시도하였던 또 한 가지의 테스트는 길 찾기 테스트인 종이 위에 그려진 미로 찾기였는데, 동일한 테스트를 252회 반복해서 시행하였음에도 그의 미로 찾기 실력은 조금도 향상되지 않았다. 이후에 진행되어 온 공간인식 기능과 관련한 해마의 기능에 관한 연구결과들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기억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심리학 서적들에 늘 등장하는 환자 H.M. 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루크 디트리치였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  H.M. 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후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  결과를 집대성한 책 환자 H. M. 을 출간했다. 한국에는 동녘  사이언스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미국사를 전공한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루크 디트리치의 외할아버지는 바로  당대의 뇌 절제술의 대가로 유명한 스코빌 박사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별 볼일 없는 일을 전전하며 20대 초반을 보내다가 뒤늦게 저널리즘에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H.M. 의 생애는 물론 편집증을 앓았던 자신의 외할머니 역시 남편이었던 스코빌 박사로부터 뇌 절제술을 당했던 과거를 확인했다.


전성기의 스코빌 박사가 예일 의대에서 연구와 수술로 바쁜 시간을 보낼 동안 스코빌 박사의 어린 딸 (루크 디트리치의 어머니)은 이웃집 수잔 콜킨스와 절친으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한다. 수잔 이모는 엄마가 주최한 파티의 손님 리스트에 가장 첫자리를 차지하곤 했던 엄마의 절친이자,  MIT에서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저명한 심리학자이다. 이웃집 이모였던 수잔 박사가 오랜 시간 연구해 왔던 대상은 바로 자신의 외할아버지 스코빌 박사가 1952년에 뇌절제 수술을 시행했던 헨리 몰레이슨이었다.  수잔 콜킨은 헨리의 사후 그의 뇌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대륙의 반대편에 있는 신경해부학자와 소송전을 불사한다. 스코빌 박사의 딸이 낳은 아들 루크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엄마의 절친인 수잔 콜킨스를 인터뷰하고  H.M. 의 일대기를 추적한 결과를 상세하게 저술해 실존했던 인간으로서 헨리 몰레이슨 우리에게 소개함으로써 그의 존엄성을 조금이나마  되살렸다.



20세기 중반, 정신질환을 앓던 환자들은 더 이상 수용소가 아닌 환경과 치료법이 한결 개선된 요양원이나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곤 했다. 의료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재고가 일어나던 이 시기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뇌절제 수술이 한 가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에 축척된 임상 연구의 결과들은 현재의 신경과학과 행동과학에서의 기억 연구의 분야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은 괄목할만한 의학적 성과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뒷면에는 온갖 비인간적이고 실험적인 치료법의 임상실험은 물론 뇌 절제술의 주 대상이 사회적 마이너리티 입장에 있던 죄수, 여자,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던 환자들이었다. H.M. 의 저자 루크는 인권에 대한 숙고나 의료 윤리적 제재가 전무 또는 미미했던 의료계의 풍토를 보고한다. 저자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스코빌 박사와 당대 의료계 슈퍼스타들의 에고이즘과 질투, 자존심을 건 경쟁 등 이 환자 개인들의 일생을 바꾸어 놓은 일, 의사들 간의 자존심 경쟁과 같은 미시적인 문제 역시 놓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기억과 뇌기능에 관한 현재의 지식 기반을 서술한 과학서인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일과 과학의 진화 사이에 놓인 딜레마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문학적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서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의 통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