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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Nov 19. 2020

국민에 대한 국가의 바람직한 간섭을 바란다


사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다 되어 가면 아이들을 돌보면서 엄마로서 누렸던  아기자기한 행복은 안녕을 고해온다.  엄청 굵은 목소리도 "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 라는 저항의 감정을 실어 보내면 엄마는 무섭기조차 하다. 간사한 엄마는 "너희들이 그렇다면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테다."로 맞선다. 친정 아버지는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셔서 내게 긴 방황의 시간을 주셨지만,  다행하게도  시아버님은 정정하셔 감사한 마음이 무척 크다. 사랑이 깊으시고 넘치시는 시아버님을 따라다니며 비서 노릇을 해도 무척 재미있고 발전적인 시간을 보낼것임이 확실하다. 아들이 굵은 목소리로 나를 밀쳐내면 마음은 부모님 곁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최근에 한국소식에 열심히 귀기울인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최근들어 한국정부가 국민들의 삶에 심한 간섭을 해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개인의 삶에 대한 바람직한 국가적 간섭이 되려면 간섭할 대목을 재고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잊을만하면 터져나오는 한국의 아동학대와 방치, 학교 폭력으로 인한 사고의 소식은, 멀리 있으면서 내가 직접 도우지도 못한다는 부채감만 안고 살게 한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는 한국의 현재를 냉정하게 진단했으면 좋겠다. 한국식 쇼비지니스가 세계를 평정했다고해서, 대통령이 외국 순방 때 그 자랑스런 연예인들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국가의 선진성을 말해주진 않는다. 성공한듯 보이는 한국형 쑈비지니스 모델을  정치가 따라한다고 해서, 무슨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정치팬덤을 거느렸다고 해서 그 국가를 선진국이라 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공적인 사회화의 장에서 난무하는 아이들의 폭력과 간접적인 살인행위, 겨우 돌 지난 아기가 양부모에게 살해 당하고,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려다 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인지...아동보호국이 학교, 치료기관들, 경찰서와 혼연일체로 움직이며 개인이, 특히나 자기 방어능력도 없는 청소년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사회 저변의 안전망을 형성하고 관리하는 국가에서라면 일어나기 어려웠을 일들이다....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제발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간섭을 좀 해주시면 고맙겠다. 이런 개인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임무가 아닌가. 개인이 최소한으로만 불행하도록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간섭하기를 마다 않는 사회를 선진국이라고 한다.


하이디 여사는 독일계 캐나다인으로 중년의 사회복지사였다. 키가 굉장히 컸고 자상하고 친절했으나 감정 표현을 쉽게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여성들의 사교 모임에 초대를 받은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는 동시에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환자를 만나던 덕분에 정신과 사회복지사들과 잘 알고 지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하이디 여사에게 금방 친근감을 느꼈다. 이후 하이디 여사의 추천으로 온타리오 주정부 산하 아동정신건강 센터에서 임상경력을 쌓을 기회를 가졌다. 내 수퍼바이져였던 파멜라 여사와 하이디 여사는 오랫동안 함께 지역의 정신건강 방어의 최전선에서 일해 온 동료였고, 절반쯤 사회주의 체제인 캐나다에서 그들은 국가기관의 일원이기도 했다. 지역 아동복지국의 중책이라는 직업은 하이디 여사의 친절하지만 엄격한 성격을 설명했다. 아동 학대와 방임을 범죄로 다루는 아동복지국의 일이 그리 웃고 즐길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도시마다 경찰서가 있는 것처럼 미국과 캐나다에는 아동복지국이 도시마다 있고 관여하는 일의 성격도 경찰과 마찬가지였다. 심각하고 투철한 소명의식이라든가 특별한 직업관이 없지 않은 다음에야 평생을 바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아동 범죄에 대한 처벌의 심각성과 사회적 민감도가 미국보다 훨씬 철저한 캐나다에 있어서 아동복지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들이 가지는 사회적 책임과 법적인 영향력도 상상을 넘어섰다. 미국의 아동복지국의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는다. 20세기 초의 뉴욕만하더라도 공교육이며 학제가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않았고, 저소득 가정의 학령기 아동이 노동에 투입되고 착취되는 문제가 만연했다. 이런 아동을 위한 사회의 안전망이 만들어진지 100년도 더 되었다.


캐나다 시절 큰아이는 오전에는 워털루  대학 부속 사립유치원을, 오후에는 동네의 공립유치원을 다녔다. 오후 학교 수업을 관람하던 어느 날, 네살 아이를 대하는 선생님의 언행이 매몰차고 과격해서 놀란 일이 있었다. 또 마침 내아이가 다니던 공립학교의 교장은 내가 상담치료를 돕고 있던 학생 하나를 퇴학시키겠다고 상담센터에 통보를 해 온 일이 있었다. 두 가지 문제로  고민하던 나는 어느 날 하이디 여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이디 여사는 엄격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나는 의논할 상대가 있음에 감사하고 자리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는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학교로 돌려보내겠다는 편지를 교장선생님에게 보내고 오후의 공립유치원을 중단했다. 일년 후 학교로 되돌아 갔을 때 알게 된 사실은, 우리 아이가 유치원을 쉬는 일년 동안 교장 선생님은 정직 상태였고,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도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음해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개인으로 하이디 여사에게 조언을 구했을 뿐이지만, 실은 그녀는 눈과 귀가 활짝 열려있는 국가의 감독기관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의 감독기관은 현장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조용히 해야할 일을 했던 것이었다.


한국의 그 불쌍한 형제들과 살해된 아기에게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국가의 사전 개입이 이루어질 기회는 충분히 많았다. 아동의 어머니는 학대로 신고 접수가  되었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고 심리상담을 받기를 권유하는 판결이 내려졌으나, 아동들은 어머니의 불충분한 보호아래 다시 맡겨졌고 학대받고 방치되었다고 한다.  삶에 내몰린 어머니가 아이들을 충분히  돌보기는 어려웠을 것임은 이해가 간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이런 시점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그 불쌍한 형제가 캐나다 사회에 있었더라면,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있었더라도 비슷한 절차를 겪었을 것이다)

아동학대로 최초 신고가 되었다면 아동보호국에서 그 가정 전담 사회복지사를 배정을 하고, 주기적으로 가정을 방문에 생활 제반 환경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어머니에게는 복지기관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비롯해 아동을 위한 최저수준의 생계비 지원이 뒷따랐을 것이다.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임대주택도 제공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아이들을 방임하고 집을 비우는 대신 전담 사회복지사의 방문 서비스를 통해 마땅한 직업에 정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직업 알선을 받았을 것이다. 그 사이 형제는 아마도 시에서 관할하는 상담센터같은 기관에 의뢰되어 방과 후 심리치료와 함께 충분한 간식을 제공받고 심리적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주의력결핍 과잉활동 장애가 있었다는 형은 국가 공무원에 준하는 가정의의 처방으로 약물치료를 추가로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는 사이 상담사는 학교의 선생님들과 아동보소국의 담당 복지사와 아동의 치료 상황을 보고하고 아동의 학교 생활이 호전되는지에 관한 피드백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반복해서 학대하는 것이 확인된다면, 어머니는 법의 심판을, 아동은 대리양육을 맏아줄 가정에 맡겨져 국가의 보호를 받게되었을 것이다. 그 절차들을 밟아 나가는 동안 형제들은 얼마간은 슬프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보호자 없이 방치된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려다가 비극을 당하는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무책임하고 자기 한몸 거처하기도 힘든 부모들에게서 구조되어 국가에 맡겨진 아동들을 많이 만났다. 아이를 친부모에게서 빼앗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자기 자식에게 애정이 있는 부모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삶을 교정하고 아이를 되찾아 간다. 또 운이 좋으면 정말 인정많은 부모에게 입양되어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들도 있는 것이다. 친구 중에는 허리케인 때 수해를 당한 가정의 신생아들 돌보다가 결국은 길고 길고 지루한 법적 수속을 마치고 입양해서 자기가  낳은 두 아들까지, 아들 다섯을 키우는 친구도 있다. 입양한 세 아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생모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는 아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을 다 받아가며 최선을 다해 키운다. 미국과 캐나다의 중산층 부모들 중에는 패망한 공산국가의 고아들을 입양해 정성을 기울여 행복한 사회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사람들도 숫하다.그런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 약물에 노출된 부작용이 성장하면서 드러나 부모들이 애를 먹고 나는 그런 부모들을 클라이언트로 만나왔다. 캐나다와 미국의 학교와 지역사회는 그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숫한 인적 자원을 투입하고 있고, 학교와 사회의 그같은 심적, 정신적 지원을 믿는 부모들은 그런 선한 양육을 자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익광고가 바이러스 확산방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가정폭력 아동폭력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무지한 부모들은 그렇게나마 교육시킬 수 있고, 폭력방지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을 고조시킬 수 있다. 지금도 캐나다 방송에서 가정과 학교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공익광고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수시로 방송에서 교육성 광고가 나왔었다.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십니까? 손가락질을 하십니까? 친구가 위기에 처했는데 모른채 방관합니까? 이 모든 것이 학대와 방임의 행위라는 것을 알고는 계십니까? 이런 직접적인 광고로 인한 폭력 예방효과는 굉장한 것이다. 도로의 빌보드 판에 눈그림만 포스팅해도 범죄율이 떨어지고  가로등의 불빛만 경찰 사이렌등과 같은 색으로 바꾸어도 범죄율이 떨어질 만큼 사람들은 설득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행복한 나라는 국민이 사회에 신뢰를 가질 수 있을 때 만들어진다. 수입의 50%를 세금으로 내게  되더라도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댈 언덕이 있음을 아는 사회의 국민들은 행복을 말할 수 있다. 국가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국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대다수가 행복한 국민은 못되더라도, 기댈곳 없는 국민들이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받을 수 있어야  선진국이고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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