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 목성과 초승달이 나란히 서는 달
이웃동네 나들이를 했던 지난 주말의 아침과 저녁 풍경.
11월의 텍사스 지평선 위로 해가 내려앉는 시간은 짧아서 아쉬운 풍경이었다. 매일같이 해는 뜨고 지는 것이지만, 내륙의 프레이리 이리 깊은 곳에서 불타는 해가 내려앉는 풍경은 너무 짧은 아쉬움이다. 잎을 떨군 오크 나무는 가지가 드러낸 프랙탈의 수만큼 그 여명과 황혼의 장관을 지켜보아 왔을테니, 정작 그 장관의 풍경이 아쉬운 것은 지나가던 행인만의 마음이었던지도 모른다.
애교 많고 호기심 많은 강아지 몰리는 오로지 주인 아저씨 말만 듣는 깍쟁이. 강아지도 마쵸는 마쵸성을 여성은 여성성은 분명히 드러낸다는 사실. 생명의 신비여.
저녁 산책의 시작을 고사리손 갈대가 반겨주었고, 매일같이 함께하는 동네의 익숙한 황혼 위로는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비행기도 많이 많이 뜬다.
북아메리카 오대호 부근에서 강력한 부족을 이루고 살았던 모학족 네이티브 어메리칸, 즉 인디언들은 10월을 가난해 지기 시작하는 달, 11월을 많이 가난한 달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겐 가난해서 슬퍼지는 계절의 시작이라 생존이 걸린 문제였겠지만, 너무 솔직한 작명에 후대인은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진다. 먹을 것을 걱정해보지 않은 현대인에게 10월과 11월은 낭만적 감성으로만 채색된 시간이니까. 그보다 조금 더 북동쪽에 살았던 알곤퀸족 인디언들은 10월을 풀잎과 땅에 흰 서리 내리는 달, 그리고 11월은 지난 달과 별 차이 없는 달이라고 불렀다. 상대적으로 기후가 따뜻해서 이들보다 사정이 좀 나았던 미국 남부의 크릭족 인디언들은 10월엔 큰 밤을 따고 11월엔 낙엽이 물 위를 덮어 물이 검어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아라파호족에게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었다. 위도와 기후에 관한 정보와 계절의 변화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정서까지 녹아 있는 시간의 이름이라니....그들은 역시 시인들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2020년의 멕시코만을 살고 있는 나는 "토성 목성과 초승달이 한줄로 나란히 서는 달"이라고 11월을 이름짓겠다.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의 싯구가 자연스러 읊조려질것 같은 지상의 저녁 풍경과 미약하지만 분명한 하늘의 별빛과 달빛은 언제나 마음을 환하게 만든다. 아직 오지 않은 많은 것을 여전히 기다리는 달.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