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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Jan 22. 2021

카라바지오-회화계의 쿠앤틴 타란티노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화가들이 그린 빛의 역사

이탈리아의 사진작가 롱기 (Roberto Longhi)가 1950년대 카라바지오 전시를 개최하면서 재주목 받기 시작한 이후 서구의 영화감독과 사진작가들은 그의 예술과 기법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암흑과 빛이 교차하는 연극의 스틸컷 같은 그림은 신앙적 단죄를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보여준다. 영국의 영화감독 데릭 저먼이 1986년 제작한 <카라바지오>는 화가를 둘러싼 살인과 폭력, 동성애의 주제를 연대기적으로 풀어가며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투사했다. 헐리우드가 아닌 유럽적 정서를 담은 영화로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재현하는데 화면의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미술관에 직접 갈 수 없더라도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연극처럼 진행되는 독특한 스크린플레이를 선보이는 이 영화에는 유명한 여배우 틸다 스윈턴이 거리의 여인 역할로 등장하여 마리 막달레인의 모델 역할을 한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카라바지오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암흑세계를 그려냈다’고 말한다. 카라바지오가 창조한 빛과 암흑의 대립은 마치 현세기의 헐리우드 조명을 보는 듯하다는 평가는 카라바지오가 빛을 연출한 기법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성과 폭력성의 상품화라는 미국 영화산업의 주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그를 회화계의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말하듯이 카라바지오가  20세기 후반에 가장 주목받는 거장으로  부활한 이유는 바로 그가 다룬 주제와  헐리우드의 키워드가 맞물린다는 사실에 있다. 카라바지오의 흡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대립을 통해 들려주는 폭력적 단죄의 이야기보다도 더 드라마틱했던 것은 화가의 삶이다. 가톨릭의 총애를 받는 천재화가로서의 삶이 빛이었다면 폭력과 살인전과에 따른 수감과 도주를 반복하다 객사한 그의 삶은 암흑의 그림자다. 빛과 어둠의 극단적인 대립구도로 성과 속에 속한 두 세계를 조명하는 바로크의 빛을 창시한 그의 예술성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를 추종하는 숫한 카라바지스트들을 양산할 정도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통제되지 폭력적인 광기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았다.  여성성과  남성성, 천재성과 광기를 동시에  지닌 양면성의 신, 바쿠스의 자화상으로 미술계에 등장한  카라바지오는 도발적이고 속된 캐릭터로 그림에 등장하다가 유작이 된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에서는 마침내 다윗의 돌에 맞아 죽은 괴물 같은 골리앗으로 등장한다. 준엄한 자기 정죄의 마음을 담은 듯한 유작 속 다윗과  골리앗의 자화상은 천재 예술가와  광인의 삶을 동시에 살았던  인간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록한 자화상이다. 양극단을 오갔던 그의 이중적인 삶은 그 어떤 대가들보다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림에 투사된 지속적이고 일관된 폭력성의 흔적은 병리 분석적 접근의 단서를 제시한다. 슈퍼스타였던 한 화가의 반사회적 폭력의 광기는 가톨릭의 엄호로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이었고 죄의 댓가로 받게 될 참수형의 공포는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지오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  1610, 유화


예술가의 두 얼굴


1604년 플랑드르의 전기작가 카렐 반 맨더 (Carel van Mander)가 카라바지오를 묘사한 대목은 화가의 정신적 상태가 평범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예시한다. 멘더는 작업에 몰두하는 천재 화가와 거리의 무법자 사이를 오갔던 그의 양면성을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미네르바와 전쟁의 신인 마르스에 비유했다. 멘더의 기록에 의하면 “끊임없이 그림을 연구하고 구상하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카라바지오는 두 주 간 실내에 칩거하며 그림을 그리고 나서 한 두달간은 허리에 칼을 차고 하인과 함께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늘 호전적이었고 예고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었고 예술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 같았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1580-90년 경의 밀라노와  로마는 페스트와 기근,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거리에는 폭력이 들끓었지만 그중에도 카라바지오의 불같은 성미와 폭력적인 행동은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어떤 미술사가는 이 시절의 밀라노의 혼란상을 줄리아니 시장 집권 이전의 폭력범죄가 횡행하던 시절의 뉴욕 뒷골목에 비유한다. 더욱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결투의 관행이 수십만의 유럽인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명예”는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기에 누군가로부터 불쾌한 행동을 당했을 때 즉각 싸움에 임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모욕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르네상스의 금세공사이자 위대한 조각가였던 첼리니 (Benvenuto Cellini )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폭력과 살인의 경험을 과장적으로  서술하기도 했지만 카라바지오처럼 극단적인 폭력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그 결과로 도주하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등 뒤에서 공격하거나 사소한 일로 결투를 벌여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BBC 다큐멘터리에서 공개한 이탈리아 경찰 기록에 의하면 카라바지오는 6년간 15번의 폭력전과를 기록했다. 기근과 질병의 만연으로 사회 전반이 불안정하고 폭력이 들끓는 시대였다고는 하더라도, 현존하는 범죄의 기록은 그가 타인의 우발적 행동을 적대적이거나 자신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적대적 귀인 편향 (hostile attribution bias)을 가졌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적대적인 귀인 편향은 개인이 사 회적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정보를 처리할 때 부정적인 해석으로 치우치는 인지적 경향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회적 공격성이 높은 청소년들은 모호한 사회적 상황과 타인의 행동을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공격성을 보이는 현대의 청소년들에게서 이 같은 인지적 오류는 흔히 발견된다. 두뇌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은 간혹 적대적 귀인 편향을 보일 수 있지만, 일관되고 높은 수준의 적대적 귀인 편향을 보이는 개인들은 이런 인지적 편향이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가정에서 아동 학대에 노출된 아동은 높은 수준의 전반적인 피해의식과 더불어 적대적 귀인 편향이 생길 가능성이 높고 공격적인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기에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 행동의 예방과 치료적 개입은 이 같은 인지적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 목표다. 더불어 그가 현대에 살았다면 폭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폭력성, 충동과 분노조절의 기능 이상은 전두엽의 기능 이상으로 진단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1591년과 1592년 두 차례에 걸쳐 살인으로 투옥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탈옥에 성공하여 로마로 도주했다. 수차례의 폭력과 살인 전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탁월한 성화 제작자였던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내 이웃의 얼굴을 한 성화 속 인들물


종교적 초월의 세계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당대의 여느 성화들과는 달리 카라바지오는 순교와 개종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단죄의 현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묘사했다. 주제를 담은 장면에 강력한 빛줄기가 쏟아지고 이를 근접 묘사한 거대한 화면  앞에서 관객들은 육체의 가해지는 생생한 고통의 충격을 경험한다. 시각적으로도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신체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 화면은 이보다 더 실감 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카라바지오는 유독 목을 베는 장면에 집착했는데, 이는 자신이 저질러 온 살인에 대한 기억과 교수형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거나 목 부위에 이상을 느끼는 감각이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가 실제로도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이 목 부위의 감각이상을 느끼는 환각과 피해망상이 결합되어 적의 목을 침으로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이 아닌 상상이나 의심에 근거해 타인에게 적대적 위해를 가하는 것은 현실 검증력이 교란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피해망상의 한  형태로  조현병의 핵심증상이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들은 치료를 받지 못했을 때 폭력적 행동을 보인다.  <성 세례 요한의 참수>에서 살인자는 이미 죽어 쓰러진 세례 요한의 목을 한번 더 자르기 위해 허리에서 단도를 꺼낸다. 카라바지오는 세례 요한의 목에서 흐르는 피로 자신의 서명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냈다. 5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작품은 카라바지오가 서명을 한 단 두 점의 작품 중 하나다. 실물 크기로 묘사된 참수의 현장 앞에 서면 얼마나 생생한 공포가 엄습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진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지오 <성 세례 요한의 참수> 1608,  유화 361 *  520 cm 성요한 대성당 발베타, 이탈리아


성 마태오의 연작은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출세작으로 성 마태의 선교와  순교의 일대기를 기록한 연작으로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에 소재하고  있다. <성 마태와 천사> <성 마태의 순교> <성 마태의 소명>은 천사에게 영감을 받아 복음서를 저술하고 에티오피아로 선교를 떠난 마태가 복음을 전파하고 왕의 딸을 실리는 기적을 행하자 왕이 마태에게 교회를 지어주려 하나 이를 질투한 권력자들이 마태를 참수한다는 일대기를 담고 있다. <성 마태의 순교>에서 중앙에 선 칼을 든 근육질의 우람한 자객의 공격적인 포즈가 압도적이다.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마음과 혼란상을 면전에서 목격하는 듯하다.  타임지의 예술 평론가였던 휴즈 (Robert Studley Forrest Hughes)는 그림의 자객이 칼을 든 각도로 보아 화가가 가장 효율적으로 목을 벨 수 있는 방법을 실제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토록 잔혹하고  생생한 살해의 현장 앞에서 관객들은 전율한다. 그림은 마태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각각엔 성서의 교훈을 담았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지오  <성 마태의 순교> 1599, 유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San Luigi dei Francesi) 성당,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의 체라시 (Cerasi) 예배당이 소장한 <바울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순교>는 종교의 교육적 기능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압축적인 공간감을 조성한 화면에서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바울이 말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는, 신체적 충격과 함께 주의를 단숨에 집중시킨다. 거꾸로 매달리는 베드로와 말에서 추락하는 바울의 몸 위로 쏟아지는 빛줄기는 개종과 순교의 성스런 순간을 조명하며 그림의 주제의식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그는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화면을 꽉 채운 근접과 압축으로 좁은 공간감을 조성하고 실물 크기의 이미지를 정면에서 관람하게 해 관객들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상황을 목격하는 기분을 조성한다.  <바울의 회심>을 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말발굽에 깔린 듯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말의 몸체에 반사된 빛의 홍수는 낙마한 바울의 몸 위로 흘러내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진정한 생명의 빛을 다시 보게  될  것을 상징한다. 사도들의 소명과 일대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들은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 전파하려 했던 복음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 나아가 자신들의 소명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아울러  <목이 잘린 메두사>와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피가 뿜어져 솟구치는 잔혹성의 정점이다. 암흑을 배경으로 신체적 처벌을 받는 주인공에 비추어진 하이라이트는 충격과 공포를 전달한다.


전성기에는 가톨릭의 지도자들에게 환대를 받았으나 1606년 로마에서 리누치오 토마소니 Ranuccio Tomassoni를 테니스 경기 도중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게 되자 다시 한번 탈옥하여 로마와 나폴리를 거쳐서 몰타 섬으로 도주했다. 그 당시 살인자가 사면과 복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 일이었는데, 그의 천재적 재능은 다시 한번 구원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몰타에서 그는 기사단 (Knights of Malta) 단장의 부탁으로 <성 세례 요한의 순교>를 그려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37세인 1608년  교황 바로로 5세로부터도 준기사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통제 불가능한 충동과 폭력성은 불치병과도 같아 그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또다시 동료를 중상을 입히고 도주 길에 오르고 만다.


반복되는 수감과  교수형을 언도받고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행한 살인의 기억과 다가올 참수의 공포는 그를 끝없는 불안과 편집증의 상태로 몰아 마침내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잠을 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의 그림에선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 등장한다. 1607년과 그가 죽기 직전인 1609년-1610년 사이 두 번에 걸쳐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를 그렸는데, 두 번째 골리앗은 참수형을 면죄받고 정상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충격적인 것은 목이 잘린 골리앗의 황망하고 참혹한 얼굴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동일하다) 자신의 얼굴이다. 젊은 다윗의 표정에는 비극적 운명에 놓인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동정과 비애감이 가득하다.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표정으로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젊은 다윗의 얼굴 역시 젊은 시절 자신의 얼굴이다  (혹은 그의 조수이자 동성의 애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페이소스 (Pathos)가 짙게 베인 이 그림은 자기 처벌적 심정에서 그려졌거나 자신 역시 목이 잘리고 말리라는 공포였거나, 혹은 두 가지 심정이 모두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삶을 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면을 추진했던 보르게세 (Scipione Borghese) 추기경에게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을 선물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 선상에서 지방 경비대장에게 체포되고 그림을 잃어버린다. 그림을 꼭 찾아서 로마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그림이 탑재된 배의 경유지 포르토 에르꼴레 (Porto Ercole)로 향하던 그는 말리리아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만다. 로마를 떠난 후 4년간의 도주생활을 객사로 마감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천재의 안타까운 요절이었지만 16세기 이탈리아라는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부랑자로, 살인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탈옥과 도주에 놓인 범법자로서의 위태로은 생활방식을 생각하면, 그가 거의 40년을 살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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