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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Jan 17. 2021

카라바지오, 예술과 광기의 드라마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화가들이 그린 빛의 역사 -


팬데믹의 역설과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영구한 시간의 흐름에 인간이 임의로 설정해 놓은 하나의 경계를 넘어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한에는 중요한 함의를 지닌 시간적 의례임은 분명하다. 전 지구적 억울함의 해로 기록될 지난해를 뒤로 하고  백신 개발의 성공과 함께 시작하는 2021년은 그 어느 해보다 반갑고 특별한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실험적 과학기술을 적용한 백신의 개발 성공과 상용화 소식은 인류 역사가 병원체와 인간의 진화적 경쟁관계로 이어져 왔음을 상기하게  한다. 팬데믹은 역사의 변곡점을 가져오곤 했던 바, 21세기 초반 팬데믹의 종료와 함께 도래할 새로운 삶의 양식과 문화적 면면들이 자못 궁금하다. 인류사 최악의 팬데믹이었던 중세 페스트의 여파가 르네상스 문예부흥이라는 놀라운 역설을 가져왔던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힌트 일지  모른다. 21세기 팬데믹이 불러온 하나의 역설적 현상은 사회적 공간의 폐쇄와 국경 봉쇄의 여파로 인해 초고속 통신기술을 이용한 유비쿼터스적 생활양식이 전면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리적 거리는 더 이상 장애물도 아니고 의미가 퇴색되어간다.


14세기 이후의 문예부흥을 불러온 페스트의 창궐은 몽골군이 유럽으로 전파한 전염병에서 연원이 찾아진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교역로 비단길을 통한 전염은 물론 몽골군이 흑해의 카파항에서 페스트 병균을 유럽의 군대에 옮겨준 것은 치명적인 세균전으로 작용했다. 같은 시기 1347년 제노바의 상선이 카파항으로부터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으로 실어 날랐던 것 역시 값비싼 교역품과 더불어 선실 밑바닥에 묻어온 페스트균이었다. 당시에도 유럽 전역의 각 도시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이 죽어나갔고, 1351년까지 무려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던 것으로 기록된 바 있다. 이후로도 페스트는 약 10년 간격으로 대유행을 반복하며 유럽을 도탄에 빠트렸고 이는 대대적인 사회구조적인 변화와 경제적 변화로 귀결되었다. 대책 없는 전염병의 창궐과 일상적인 죽음의 행렬 앞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절대적 권위는 무너져 내렸고, 그에 대한 반동은 두 가지 다른 양태로 나타났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종교에 대한 한층 강화된 몰두를 보이거나 반대로 반종교를 외치며 과학과 이성의 세계로 귀의하는 지식인들도 늘었다. 신앙의 힘에 기대어 팬데믹을 극복하고자 하던 14-15세기의 부유한 상인과 귀족들은 고가의 예술작품들을 제작해 교회에 기부함으로써 종교 미술과 예술 부흥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탈리아인들은 종교 예술을 통해 상한 정신의 치유를 염원했던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심리적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현대인들의 전략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즈음이고 보면, 예술이 가진 힘은 시대를 막론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0세기가 재발굴한 바로크의 수퍼스타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는 반복되는 전염병의 창궐로 유럽이 소용돌이치던 시절에 태어났다. 매우 심히 격정적인 인간적이었던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관을 성화 제작에 투영함으로써 이성적 논리와 합리적 균형을 예술적 정수로 삼는 르네상스적 세계관을 전복하고 한 단계 나아간 새로운 패러다임 바로크의 시대를 열었다.

젊고 병든 바쿠스

카라바지오는 1571년 북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고,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의 밀라노는 정치-경제적으로 아수라장이었다. 그의 출생을 전후로 엄청난 기근과 흑사병으로 인해 도시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 (Fermo Merici)는 밀라노의 영주  스포르자(Sforza) 가문의 영지 관리와 석공일을 겸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흑사병은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남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홀로 된 어머니가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를 비롯한 4남매를 키워야 했다. 전염병이나 긴 전쟁의 후과는 결정적 기회를 상실한 차세대, 잃어버린 세대를 양산하는 것은 현대나 그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혹독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으나, 형은 신부가 되었고 자신은 화가가 되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대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1564년)와 구별하고자 마을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지오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라 불렀다.  13세에 페테르 자니 (Simone Peterzano)의 공방에 들어가 4년간 도제수업을 하며 그림을 배웠는데 페테르자노는 티치아노의 화풍을 모방하는 매너리즘 화가로 기량이 대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588년 페테르자노의 공방을 나온 후의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카라바지오는 어린 나이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하거나 분탕질을 치고 다니며 감옥을 전전했던 전력이 있고, 스물한 살 무렵에는 어머니에게서 돈을 훔쳐 가출해 로마로 갔다.

sick and young bacchus 1563, oil on canvas, borgese, rome  italy


로마에 도착한 다음 해 카라바지오는 <병든 바쿠스>를 들고 로마 화단에 등장했다. 부랑자에 가까운 신세로 거리를 떠돌던 당시의 처지를 고스란히 담은듯한 바쿠스는 파리한 입술, 황달과 간염으로 인한 병색이 완연한 촌스러운 젊은이의 모습이다. 빈민 구제소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직후의 자신의 모습으로,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드러내고 관능적인 미소로 관객을 유혹하겠다는 듯하다.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인 바쿠스는 생산과 수확, 그리고 풍요의 열매로 빚은 술 (와인)의 신인 동시에 광기의 신이다. 디오니소스가 회화에 등장할 때는 흔히 술잔을 들고 나타나는데 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광기는 양면성을 가진다. 술은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과음하면 취하고 몸을 해치듯이, 광기 역시 창조적 에너지인 동시에 통제를 상실할 땐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디오니소스가 한이 많고 억압당한 인간의 욕망과 광기를 도취적 상태에서 해방시킨다고 믿었던 그리이스에서는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디오니소스 밀교가 성행하기도 했다. 관능적인 포즈로 관객과 눈을 맞추는 병든 바쿠스의 도발적인 시선은 마치 비록 지금은 초라한 행색이지만 곧 세상을 유혹해 보겠다는 청년의 욕망을 대담하게 드러낸다. 그 시절 어떤 화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너무나 인간적이고 호소력 강한 카라바지오적인 바쿠스의 모습이다. 반면 17세기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는 신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의 바쿠스 (디오니소스)가 농부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 수확과 풍요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재현했다. 건강한 남성미와 익살미를 가진 주신으로서의 바쿠스는 생동감과 활기찬 공동체적 의식을 보인다.


기원전  성행하던 디오니소스 밀교와 축제는 그리스 비극으로  발전했는데 연극이란 결국 인간의 광기를 순화된 형태로 승화시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예술이다.   예술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광기가 긍정적 카타르시스로 표출된 형태인 반면 출구를 찾지 못하고 통제되지 못한 광기의 폭력적인 힘은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바로크의 빛을 창시했던 천재적 창의성과 통제 불가능한 폭력과 파괴적 에너지의 극한 대립 사이에서 침몰하고 말았던 카라바지오의 삶을 반추해 보건대,  병든 자신의 모습을 바쿠스에 투영했던 것은 자기실현적 예언 (self fulfilling prophecy)의 시작이었던지도 모른다. 현세적이고 격정적인 바로크의 빛을 창시한 그의 예술성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자리 잡아 숫한 그를 추종하는 숫한 카라바지스트들을 양산한 반면 일상에서 통제되지 못한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광기는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콜럼비아 대학의 예술평론가 사이먼 샤마 (Simon Shama)는 병든 바쿠스에 대해 카라바지오가 “신화적 인물을 선택해 차려입긴 했으나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침의 바쿠스”로 묘사함으로써 신을 “꼴불견인 인간”으로 바꿔 놓았다고 평한다. 불멸하는 이상화된 신이 아니라 더럽고 초라한 인간의 모습대로 신을 그림으로서 르네상스적 가치인  “현실의 이상화”를 뒤집어 “이상을 현실화”한 혁명적인 의미를 담은 바쿠스로 말이다.

Bacchus, 1596, OIL ON CANVAS, uffizi, florence italy



회화계의 쿠엔틴 타란티노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에 그려진 마태 연작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의 체라시 (Cerasi) 예배당이 소장한 <바울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순교>는 종교의 교육적 기능에 가장 충실한 작품들이다. 종교적 초월의 세계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당대의 여느 성화들과는 달리 카라바지오의 성화는 단도직입적이고 폭력적 단죄의 현장을 묘사함으로써 육체의 가해지는 고통의 충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바울은 말에서 추락한다. 성 마태는 목이 잘리고 눈이 뽑힌다. <목이 잘린 메두사>와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피가 뿜어져 솟구치는 잔혹성의 정점이다. 암흑을 배경으로 신체적 처벌을 받는 주인공에 하이라이트를 비추어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드라미틱한 감정의 전달이 극대화되고 강력한 호소력을 띤다.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소재한 <성 베드로의 순교>는 늙고 주름진 노인이 되어버린 초대 교황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순교를 하기에 자신은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청했던 장면을 묘사한다. 맞은편에 걸려있는 그림은 <바오로의 개종>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빛에 눈이 부셔 말에서 떨어진 후 개종한 사울을 그렸다. 사도들의 소명과 일대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들은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 전파하려 했던 복음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 나아가 자신들의 소명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성 마태의 일대기를 기록한 연작 <성 마태와 천사> <성 마태의 순교> <성 마태의 소명>은 천사에게 영감을 받아 복음서를 저술하고 에티오피아로 선교를 떠난 마태가 복음을 전파하고 왕의 딸을 실리는 기적으로 왕을 탄복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이 마태의 선교를 돕기 위해 교회를 지어주기로 하자 권력자들은 질투하고 그를 경계하여 결국 마태의 목을 자른다. 타임지의 예술 평론가였던 휴즈 (Robert Studley Forrest Hughes)는 참수에 묘사된 자객이 칼을 든 각도로 보아 화가가 가장 효율적으로 목을 벨 수 있는 방법을 실제로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분석했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카라바지오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암흑세계를 그려냈다’고 말한다. 암흑과 빛이 교차하며 연극의 스틸컷 같은 호소력으로 무장하고 신앙적 단죄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난무한다. 카라바지오의 빛과 암흑의 대립은 마치 현세기의 할리우드의 조명을 보는 듯하다는 호크니의 평가는 카라바지오 회화의 핵심을 짚어 낸다. 16세기 밀라노 출신 카라바지오가 창조해낸 바로크의 빛은 자연의 광휘를 모방하던 플로렌스의 빛과도 달랐고, 신성을 상징하던 로마의 빛과도 달랐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대립을 통해 들려주는 성서의 이야기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것은 화가 자신의 삶이다. 가톨릭의 총애를 받던 최고의 성서 화가이자 폭력 전과와 살인으로 얼룩진 범죄자의 두 얼굴이 교차했던 삶 말이다. 병들고 방탕한 바쿠스의 자화상으로 화단에 데뷔한 이후 온갖 범속한 죄인들로 얼굴로 그림 속에 등장하다가 참수된 골리앗의 자화상으로 인생을 마감한 카라바지오. 슈퍼스타 화가의 반사회적 폭력성의 광기는 가톨릭의 엄호로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이었고 참수형의 공포는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가톨릭의 총애를 받는 천재화가로서의 삶이 빛이었다면 폭력과 살인전과에 따른 도주와 반복되는 수감 중 객사로 끝난 그의 삶은 암흑의 그림자다. 카라바지오의 극단적 삶의 행로는 정신병리학적 주제를 던지고  그림에 투사된 일관된 폭력성의 흔적은 병리 분석적 접근의 단서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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