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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y 19. 2021

천재와 광인, 두 얼굴의페르소나-카라바지오



예술가의 두 얼굴

1604년 플랑드르의 전기작가 카렐 반 맨더 (Carel van Mander)가 카라바지오를 묘사한 대목은 화가의 정신적 상태가 평범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예시한다. 멘더는 작업에 몰두하는 천재 화가와 거리의 무법자 사이를 오갔던 그의 양면성을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미네르바와 전쟁의 신인 마르스에 비유했다. 멘더의 기록에 의하면 “끊임없이 그림을 연구하고 구상하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카라바지오는 두 주 간 실내에 칩거하며 그림을 그리고 나서 한 두 달간은 허리에 칼을 차고 하인과 함께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늘 호전적이었고 예고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었고 예술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 같았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1580-90년경의 밀라노와  로마는 페스트와 기근,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거리에는 폭력이 들끓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카라바지오의 불같은 성미와 폭력적인 행동은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화가와 건축가들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걸핏하면 칼을 들고 경찰과 시비를 벌이곤 했다. 어떤 미술사가는 이 시절의 밀라노의 혼란상을 줄리아니 시장 집권 이전의 폭력 범죄가 횡행하던 시절의 뉴욕 뒷골목에 비유한다. 더욱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결투의 관행이 수십만의 유럽인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명예”는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기에 누군가로부터 불쾌한 행동을 당했을 때 즉각 싸움에 임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모욕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르네상스의 금세공사이자 위대한 조각가였던 첼리니 (Benvenuto Cellini )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폭력과 살인의 경험을 과장적으로  서술하기도 했지만 카라바지오처럼 극단적인 폭력을 지속해서 반복하고 그 결과로 도주하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 <세례  요한의 참수> 1608, 유화, 성 요한 성당,  발레타, 몰타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등 뒤에서 공격하거나 사소한 일로 결투를 벌여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BBC 다큐멘터리에서 공개한 이탈리아 경찰 기록에 의하면 카라바지오는 6년간 15번의 폭력 전과를 기록했다. 기근과 질병의 만연으로 사회 전반이 불안정하고 폭력이 들끓는 시대였다고는 하더라도, 현존하는 범죄의 기록은 그의 적대적 귀인 편향성을 의심하게 한다. 타인의 우발적 행동을 적대적이거나 자신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인지적 성향을 적대적 귀인 편향 (hostile attribution bias)'라고 한다. 적대적인 귀인 편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정보를 처리할 때 타인이 자신을 해하려는 부정적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사회적 공격성이 높은 청소년들은 모호한 사회적 상황과 타인의 행동을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데 사회적 공격성을 보이는 현대의 청소년들에게서 이런 인지적 오류는 흔히 발견된다. 두뇌발달이 진행 중인 청소년들이 간혹 적대적 귀인 편향을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일관되고 높은 수준의 적대적 귀인 편향을 보이는 성인들은 이런 인지적 편향으로 말미암아 공격 행동을 보이는 것은 문제적이다. 특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가정에서 아동 학대에 노출된 아동은 높은 수준의 전반적인 피해 의식과 더불어 적대적 귀인 편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고 공격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에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 행동의 예방과 치료적 개입의 목표는 이런 인지적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다. 한편 카라바지오가 현대에 살았다면 폭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한  폭력성, 충동과 분노 조절의 곤란 등으로 인해 전두엽의 기능 이상으로 진단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1591년과 1592년 두 차례에 걸쳐 살인으로 투옥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탈옥에 성공하여 로마로 도주했다. 여러 차례의 폭력과 살인 전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탁월한 성화 제작자였던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살인의 기억과 참수형의 공포 속에서

반복되는 수감 생활과 교수형을 언도받고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행한 살인의 기억과 다가올 참수의 공포는 그를 불안과 편집증 상태로 몰아 마침내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잠을 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의 그림에선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 등장한다. 1607년과 그가 죽기 직전인 1609년~1610년 사이 두 번에 걸쳐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을 그렸는데, 참수형을 면죄 받고 정상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그린 두 번째 골리앗은 유작이 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충격적인 것은 목이 잘린 골리앗의 황망하고 참혹한 얼굴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동일하다) 자신의 얼굴이다. 젊은 다윗의 표정에는 비극적 운명에 놓인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동정과 비애감이 가득하다.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표정으로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젊은 다윗의 얼굴 역시 젊은 시절 자신의 얼굴이다.  (혹은 그의 조수이자 동성의 애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페이소스 (Pathos)가 짙게 밴 이 그림은 자기 처벌적 심정에서 그려졌거나 자신 역시 목이 잘리고 말리라는 공포였거나, 혹은 두 가지 심정이 모두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삶을 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면을 추진했던 보르게세 (Scipione Borghese) 추기경에게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을 선물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 선상에서 지방 경비대장에게 체포되고 그림을 잃어버린다. 그림을 꼭 찾아서 로마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그림이 탑재된 배의 경유지 포르토 에르꼴레 (Porto Ercole)로 향하던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로마를 떠난 후 4년간의 도주 생활을 객사로 마감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천재의 안타까운 요절이었지만 16세기 이탈리아라는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부랑자로, 살인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탈옥과 도주에 놓인 범법자로서의 위태로웠던 생활방식을 생각하면, 그가 거의 40년을 살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홀로페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8-1599, 유화, 내셔널  고미술  갤러리, 로마  이탈리아  


예술 창작물 속에는 작가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할 때 카라바지오 성화에 투사된 폭력성과 그의 현실 행보가 갖는 공통분모가 폭력과 살인이라는 점은 임상적 주의를 끈다. 카라바지오는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화가였다. 카라바지오의 폭력성은 정치적 혼란과 폭력이 횡횡이라는 16세기 후반 이탈리아라는 공간의 영향이 있겠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행동을 훨씬  뛰어넘는다.  체식 Chessick M. 과 같은 정신의학자는 그가 경계성 성격장애를 앓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카라바지오의 반복되는 폭력과 살인으로 인한 투옥과 도주의 기록은 경계성 성격장애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핵심  정서는 불안이고 특정 대상과의 관계에서의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먼저 관계를 떠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카라바지오의 편집증적 불안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과 살인으로  표출되고 ,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측불허의 충동성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  경계선 성격장애가 불안과 정서적 혼란이 증상의 핵심이라면, 카라바지오의 폭력성은 충동 조절의 실패로 인한 인지행동 장애에 가깝다. 이런 행동 양상은 전두엽의 통제능력 결함과 관련된 인지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천재적 재능에 힘입은 가톨릭의 지지와 회화교의 슈퍼스타라는 사회적 인정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지오의 정신과 행동 양상은 통제 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 폭력과 살인이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허물고 도주범의 신세로 전락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반복하는 것은 판단력의 심각한 결함과 통제 불능에 놓인 충동과 폭력성을 의미한다. 규율과 법을 무시하는 반사회적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고 타인의 권리와 사회의 안녕을 침해하고 해를 가하는 모습은 흔히 사이코패스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현대의 정신의학에서는 사이코패스라는 진단명을 사용하지 않으며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반사회적 성격장애”로 진단한다. 16세 미만 아동과 청소년의 경우는 이에 상응하는 증상을 보일 땐 "품행장애"라고 진단을 내린다.


현대의 정신의학에서는 사이코패스를 정신과적 장애의 진단명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그 개념과 용어의 기원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립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 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정신병원에서 냉혹하고 차분하게 개를 발로 차서 죽이는 사람을 관찰하고, 정신착란이 아닌 상태에서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는 광기를 보이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로 지칭했다. 이후 독일의 정신병리학자 커드 슈나이더 (Kurt Schneider, 1887– 1967)는 병원이나 감옥이 아니라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사회에서 성공하거나 입지를 높인 사람 중에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많음을 일찌감치 지적했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시대를 겪은 그가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이코패스들을 간파하지 못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허비 클랙클리는 (Hervey Cleckely, 1903-1984) 사이코패스를 관찰하고 이를 저술한 1941년 저서  <제정신을 가장한 가면-Mask of Sanity>>에서 사이코패스의 핵심적인 문제인 감정 결핍을 매우 상세하게 지적한다. 그들은 지적이면서 매력적인 외모를 하고 있지만, 감정과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자기중심적이면서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못한다.  


        "사이코패스는 인간적인 가치를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묘사된 인간의 비극이나 행복 또는 고통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또한 삶의 모든 측면에 무감각하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사랑과 공포, 유머를 피상적으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기에 이런 감정으로부터 영향받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감정도 인식하지 못한다. 뛰어난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대해서는 색맹과도 같다. 그에게 감정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애당초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그 단어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를 일으키지 않고 정상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이코패스에 관한 이런 정의에 의하면 카라바지오는 사이코패스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카라바지오의 경찰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의 범죄는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차분하게 계획된 범죄였다기보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에 뒤따르는 자기 파괴적 행동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반복되는 우발적 충동은 결국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도주 중에 객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는 사이코패스였다기보다는 천재성에 가려진 정신과적 장애를 앓고 있었던 불운한 사나이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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