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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y 20. 2021

몸이 전하는 서사의 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을 떠난 적이 없지만, 암스테르담은 세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운하를 따라 아름다운 저택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도시로 탄생하던 17세기는 흥미진진한 시공간이었다. 렘브란트의 성공은 네덜란드의 독립에 잇따른 경제적 성공과 궤를 같이 한다. 그가 태어나기 전 1567년 더치 공화국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신성로마제국의 종교적 억압과 과도한 세금 수탈 등 재정적 폭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 전쟁을 감행해 독립국가의 위상을 갖추어 가고있었다. 1581년경에 위트레흐트 동맹이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어낸 이후 80여 년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1648년경에 공식적으로 끝낸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독립된 신생국가는 선진 선박 제조술과 직조기술 등을 무기로 세계 무역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베리아로부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의 금융자본과 무역  기술, 그리고 북해 무역을 통해 축적된 금융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와 은행을 설립했다. 또한 민간 무역회사를 설립해 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그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무역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네덜란드에서 일이다.  그들은 북유럽과 러시아 내륙의 농산물과 공산품을 싣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지중해까지 진출해 이탈리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지중해 무역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 동인도 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중심으로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물류와 유통으로 21세기 최대 거부가 된 기업 아마존의 17세기 버전이라 할만했다. 


네덜란드의 경제적 부흥 그리고 회화의 황금기는 동인도 회사의 부흥과 때를 같이 했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한 사회의 주된 담론이 정치적, 종교적 논쟁보다는 개인의 일상성에 관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독립 후 폭발적으로 국가적 부를 축적해가던 더치 공화국의 상공업자들과 시민계급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대상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로 대표되는 북유럽 바로크는 변화한 시대의 가치관과 경제부흥을 반영하며 생활 밀착형의 주제를 전개했다. 시민들은 자신의 가정을 장식할 문화적 콘텐츠가 필요했고, 따라서 길드와 시민 상공업자들의 단체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그리고 바니타스 회화가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에서 예술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렘브란트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   전세계에서 수입된  교역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의 수집품 중에는 코끼리의 상아는 물론 이탈리아 화가 만테냐의 드로잉화,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의 투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현했고, 17세기의 네덜란드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할 무렵엔 암스테르담이 그러했고, 1-2차 대전을 전후로 뉴욕이 그랬듯이... 렘브란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였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상공업자들은 렘브란트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기다리며 그 앞에 줄을 섰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를 따라 걷는 길은 시간의 초상화가 전시된 박물관을 걷는 기분이었다. 종 모양 혹은 엎어 놓은 꽃송이 모양으로 장식된 박공의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은 아름다웠고, 그중에는 시간을 증거하듯 옆으로 살짝 휘어진 나무 건물도 있었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개성 만발한 건물들은 네덜란드의 경제 부흥기를 증거하고 그중에는 바로크 회화의 황금기를 선도했던 렘브란트의 저택도 있었다.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4층 건물은 각층에 네 개의 창문이 나 있고 이마에는 1606년이라는 건축 년도를 세기고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지 4년 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렘브란트는 이 공간에서 <야경꾼>을 그려 신생 더치 공화국의 정체성을 가시화하고, 그의 근대적 자아는 새로운 회화를 실험했다. 지금은 한적한 이 공간은, 한때 도제들과 그림을 사려는 고객들로 붐비던 예술의 전당이었다. 그 시절의 이 공간은 동방의 의상들과 아프리카로부터 온 상아에 이르기까지 렘브란트가 수집한 전 세계의 진귀한 물품으로 가득 찼다. 약관의 20대에 명예와 부, 행복한 결혼 모두를 성취했던 렘브란트는 서른 살 무렵의 이 고가의 건물을 사들여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지만 두 명의 아내와 수많은 자녀를 이곳에서 떠나보내는 아픔 또한 겪어야 했다. 박물관으로 재단장한 이 건물의 2층 스튜디오에는 렘브란트의 작업장이 있었고, 건물 꼭대기 스튜디오는 도제들의 작업장이 있었다. <황금 방울새>를 그린 파브리티우스도 (Carel Fabritius, 1622 ~1654)도 이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배웠다. 파브리티우스는 그 후 델프트 화파의 일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베르메르와 피터 드 호흐 같은 델프트 유화의 화가들에게 빛을 그리는 방식을 전했다. 2017년 미국의 베스트셀러 소설  <황금 방울새>는 델프트 화제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파브리티우스의 그림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몸이 전하는 서사의 힘-해부학 강의  


Rembrandt van Rijin <The Anatomy Lesson of Dr. Tulp> 1632, oil on canvas, Mauritshuis, The Hague, Netherlands


렘브란트 <튈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5, 유화마우리츠위스헤이그네덜란드


당시의 유력한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반 오일렌부르흐(Van Uylenburgh)와 협력한 렘브란트는 유화는 물론, 판화, 복사화, 트로니 등을 제작하며 초상화가로서의 기반을 닦는다. 상공업자들의 조합이나 자치 단체들로부터 대형 단체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에 몰두했다. 네덜란드 국립 미술관의 벽을 장식한 넓이가 4-5m에 달하는 무수한 단체 초상화는 그 시절 시민계급과 중산층의 증명사진이다.  26세의 렘브란트는  <해부학 강의> 제작에 착수했다. 해부학 분야의 전문가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외과 의사 조합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장면을 담은 이 단체 초상화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는 암스테르담 최고의 초상화가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화면의 중앙에 놓인 시체의 몸에선 빛이 발산되고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은근한 빛이 어려있다. 그 빛이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인위적인 장치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주인공들이 일렬로 늘어선 여느 단체 초상화와는 달리 오른쪽에 여백을 둔 비대칭적인 구도에선 역동성이 두드러진다. 해부학 수업 참가자들은 자연스러운 자세로 강의에 열중하고 있으며 그들의 표정에 드러난 몰입과 호기심, 놀람의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화면 상단의 두 사람은 수업에 집중하는 대신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 마치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는듯하다. 렘브란트는 사람의 미묘한 몸짓과 표정을 포착해 관객의 공감을 유발하는데 뛰어났고, 자신이 느꼈던 공감을 현대의 관객에게서 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해부하는 손의 크기가 과장되고 위치도 부자연스러운데, 이 역시 시선을 끌기 위해 의도된 장치다. 렘브란트는 원근법과 비례에 능했음에도 신체의 일부분을 강조하거나 과장해서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기를 즐겼다. 예를 들면 <유대인 신부>에서는 신부의 가슴과 복부 위에 포개진 부부의 손이 결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돌아온 탕아> 에서도 아버지의 손은 두 사람의 것인 양 다르게 그려져 모성과 부성을 모두 암시한다. 다윗 왕의 편지를 받은 <밧세바>는 숙고에 잠긴 슬픈 모습이지만 렘브란트는 솔로몬 왕을 잉태할 운명인 그녀의 복부를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정성스럽게 묘사했다. 미술 평론가 존 버거 (John Berger)의 표현을 빌리면 "신체 부위에 독창적인 서사의 힘을 부여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렘브란트 특유의 능력이다.  또한 <돌아온 탕아> <야곱과 천사> <다나에> <유대인 신부> 등을 포함한 그의 작품 다수에서 인물들은 포옹하고 있거나 그 직전에 팔을 앞으로 뻗는 제스쳐를 하고 있다. 이런 팔을 뻗어 안으려고 하거나 안고 있는 제스처는 사랑의 몸짓이기도 하지만 용서와 믿음의 몸짓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안는다는 행위와 동의어이고 특히 후기로 갈수록 기도의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첫째 부인 사스케아와 둘째 부인이었던 헨드리키아를 모델로 그린 숱한 그림들이 그랬고, 두 부인을 모두 잃어버리고 난 후 자신을 그린 숱한 초상화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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