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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n 30. 2021

낡고 소박한 공간

습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른다.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 서울의 여름은 땀에 젖는다. 여섯시에 눈을 떴다. 이곳에 오면 언제나 기상이 여섯시  정각에 이루어진다.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물론 네시에도 잠은 깨고 다섯시에도 깰 수 있지만, 미국에서와 달리 서울에서는 더 자자고 마음 먹으면 딱 여섯시까지 더  잘 수 있다. 기적이다. 이 도시에서의 되찾게 되는 수면의 규칙성에 감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골을 다니러 가신 아버님의 사무실을 당분간 지킨다. 화상 강연은 매주 하루씩, 출국 직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해서 나는 어떤 형태로든 사무실이 필요한 터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갖가지 꽃이  만발한 옥상 정원 옆, 오래 비워둔 작은 오피스로 공간 이동을 해야한다. 서울에서의 남은 한달은 그 공간에서 다음 책의 목차를 기획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리고 예정된 강연을 진행하고 또 다른 강연 원고들을 준비할 생각이다. 그래서  버려두었던 공간을 쓸만하게 재단장하는 것이 이번 주의 과제다. 빛이 많이 들어오는 방이라, 눈의 피로를 덜어야 한다. 창문 하나를 책장으로 막아버릴 계획을 갖고 집을 나섰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오늘 분량의 일을 마무리 하고 싶었다. 아침식사는 건너뛰고 대기가 아직 젖어있을  노동복 차림으로 오피스로 달려갔다. 평상복은 따로 한벌 챙겼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을 이른 시간이라는 사실만 믿고,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거라는 사실만 믿었다. 습기때문에 정신없이 곱슬거리는 머리를 질끈 묶었다. 몸이 아프던 지난 몇년간 국수가락처럼 가늘고 곧게 펴지기만 하던, 그리고 우수수 빠지던 머리카락이 이렇게 다시 곱슬거리게  줄은 몰랐다. 머리카락의 신비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레깅스 차림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주차장에서 아버님 연배의 어르신을 마주쳤다. 당황스러웠다. 익숙한 억양을 구사하시는 그분은  정체를 물어왔다. 그래 여긴 미국이 아니라 서울이라고아무도 나를 모를거라는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라고. 우리는 한겨레, 단군의 자손이 아니던가 말이다.

여처저차한  방문객이라고 인사를 드리자 그 어른의 입에서는 내 책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으아앗…. 한국에서는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잊고있던 댓가는 그런 것이었다. 당황스러움은 연타로 날아들었다. 물론 그 어른은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건네실 뿐이었지만... 새벽부터…. 곱슬거리며 부푼 머리에 맨얼굴에 레깅스 차림으로 주차장에 선 내 마음은 방심함의 댓가를 연타로 맞고 있었다. 아버님과 유년기를 함께 보내시고 중학교 동창이시라는 어르신은 그야말로 인생을 함께 나눈 친구분이신 것이었다. 황급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용모를 단정히 한 후 아이스 커피를 한잔 만들어 공손히 받쳐들고 인사를 다시....  


클라우드 컴퓨팅의 시대에는 로밍된 아이폰과 맥북, 그리고 조용한 공간만 확보된다면 어느 나라건, 어떤 장소건 막론하고 오피스로 변할 수 있다. 필요한 모든 서적과 문서자료를 두대의 기기로 불러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간편한 세상인가. 공간의 개념변화가 진행되는 시절이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오피스에 방치되어 있던 컴퓨터와 자판과  케이블 등의 모든 지저분한 부속품은 쓰레기통으로 하직했다.


밥도 안 먹고 커피도 안 마시고 시작한 하루는 길었다. 배가 고파져 동네길을 걸어내려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보니 갖가지 간판으로 어지러워 보였던 골목길은 생각보다 한적했고 또 생각보다 깔끔했다. 조금 걸어내려가니 한티역이 나타났다. 전철역과 연결된 백화점도 나타났다. 언젠가 어머니와 쇼핑을 하다가 이 백화점 지하식당가에서 냉면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한국에  나와있는 동안은 냉면을 하루에 한번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냉면집 주인은 왠일인지 내게 짜증을 내는것 같았다. 길어진 코로나 방역 때문인지 일상이 짜증투성이인지 그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지난 한달간 방문했던 국수집과 식당 주인들은 하나같이 짜증섞인 얼굴과 말투로 손님을 맞았던것 같다. 점심 한끼에 만원을 받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는, 너무나 밑지는 장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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