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보게 되는 많은 굉장한 부자들은 살아생전 예술을 사랑하고, 갖은 방법으로 예술가들과 예술재단을 후원하고, 세상 예쁜 것들을 죄다 자기 집에 모아놓고 즐기다가, 죽은 연후에는 그것들을 세상에 기부하여 많은 이들이 즐기도록 하고서 박애주의자라는 이름을 대대손손 남긴다. 한없이 멋진 인생이라 부럽기도 하지만 인생은 원래 출발점부터 불공평한 것. 어쩔 것인가. 평범하게 태어난 우리는 그들이 살아생전 수고롭게 모으고 애써서 가꾼 것들을, 힘 하나 안 들이고 맘껏 즐기고 감상하는 것으로 감사를 표할 뿐. 텍사스에 속한 휴스턴이 사막이고 문화의 불모지일 거라는 통념은 석유재벌들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문화자본의 정체와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의 선입견일 뿐, 전 세계 석유회사의 헤드쿼터인 이 거대한 도시가 그럴리야.... 텍사스가 나를 생각지도 못하게 작가로 만들었다고 지인들에게 종종 농담을 하곤 한다. 심리학 공부만 평생 한 내가 미술에 관한 책들을 출간하게 된 것은 텍사스와 뉴욕의 미술관을 내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즐긴 결과이니까.
세계적인 석유재벌 슐럼버거 가문의 상속녀 도미니크 메닐 여사는 그 시절 파리를 평정했던 초현실주의 작품들과 2차 대전 후 세계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대량 보유한 메닐 컬렉션을 설립했고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로스코 채플 역시 여섯 채의 메닐 컬렉션에 속한다. 최근엔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가 이곳을 다녀가 휴스턴의 미술세계를 인식시키는데 일조를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휴스턴 미술관( Museum of fine art houston) 은 거대한 네 채의 콤플렉스로 구성되어 있고, 부속 미술관 역시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유럽 분관에 속하는 리엔지 미술관은 엑슨 모빌의 전신, 험블 석유의 창업자의 상속녀 캐럴 스털링 메스터슨과 해리스 매스터슨 부부가 남긴 유산이다.
부부는 생전에 유럽의 예술작품들과 도자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부부는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상 곳곳에 자신들의 저택을 마련해 두고 세상을 유람했는데, 그들의 휴스턴 본가인 리엔지 미술관은 네오 클래식 스타일로 지어졌다. 114 에이커의 정원 위에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도록 단층으로 길고 넓게 지어 기하학적인 대칭과 비례를 중요한 건축의 포인트로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의 이름은 매스터슨 씨의 외조부의 성함에서 따온 것으로 휴스턴의 언론인이었다.
멕시코만에 위치한 휴스턴에는 세계 석유와 정유회사들의 본사들이 집결한 헤드쿼터다. 해리스 메스터슨의 부인 캐럴 스털링턴 여사는 Exxon 정유 회사의 전신인 험블 석유회사의 창업자의 외동딸. 1913년 생으로 첫 번째 결혼에서 사별을 했지만, 재혼을 했었고,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 해리스 매스터슨과는 긴 세월을 해로했다. 이 신대륙의 불모지에 문예 부흥을 일으키고 예술의 정원을 건설하는 일은 대규모의 오일 컴퍼니들을 설립한 기업인들의 부인이나 딸들의 몫이다. 매스턴 씨는 2차 대전 중 영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19세기 조지안 스타일의 건축과 예술품들, 특히 도자기에 매료되었고 평생을 걸쳐 영국의 Worcester 도자기를 수집했다. 저 큰 규모의 리빙룸과 복도를 유럽 왕실의 왕녀들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코너 코너마다 장식용 벽감을 만들어 취미로 수집한 18세기 19세기에 영국과 유럽에서 생산된 최고의 도자기들을 채워 넣었다. 거실로 들어서는 복도 코너마다 도자기를 전시할 수 있도록 벽감을 짜서 넣었다. 복도의 양쪽 끝, 그리고 거실의 사방의 코너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
여전히 연회장으로도 대여되고 가끔은 콘서트장으로도 개방되는 리빙룸의 전면에는 유럽의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의 초상화가 여러 점 전시되어있다. 스페인 왕자에게 시집왔던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가렛의 초상화가 인상적이다. 공주의 부정교합의 돌출한 입술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임을 알리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사촌인 스페인의 필립 3세에게 시집갔다. 시아버지인 스페인의 필립 2세는 무적함대 알마다를 영국으로 파견했다가 대패한 일을 비롯해 자신의 통치하에 있던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전쟁광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한 전쟁을 벌였으나 엘리자베스가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한 사건을 필두로 전쟁마다 대패하면서 스페인을 국가 파산 상태에 놓이게 한 장본인이다. 필립 2세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영국의 여왕 블러디 메리와 초혼을 했었으나, 메리 여왕이 그녀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교수형을 당하게 되자 다시 그녀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던 일이다. 물론 영국의 골든 에이지를 구가하며 처녀왕으로 남았던 엘리자베스는 필립 2세의 청혼을 거절했다.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의 초상화에서 눈에 띄는 진주 목걸이는 "라 페레그리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계사에 자주 등장하는 순교자라는 뜻으로 이 진주 목걸이의 행방과 내력은 흥미진진하다. 필립 2세와 결혼했던 영국의 메리 여왕이 처형을 당한 뒤 스페인 왕가에 귀속된 이 진주는 결국에는 필립 2세의 며느리인 마가렛의 차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프랑스 왕정으로, 다시 영국이 귀족에게로 넘어갔다가, 가장 최근에는 미국의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소유가 되었다. 라 페레그리나를 주제로 한 역사 영화 하나쯤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듯. red violin 비슷한 분위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