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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Nov 10. 2023

자화상으로 남은 중세인 - 얀 반에이크

자화상으로 남은 중세인


내셔널갤러리를 향해 걷는 런던의 거리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어두운 색의 외투만 입고 있었다. 겨울의 런던은 신기한 무채색이다. 행인들의 외투와 색을 맞춘 듯 인색한 회색빛, 그러나 가끔 머리를 적시는 차가운 눈과 비가 싫지 않았다. 반에이크를 만나러 가는 시간 여행은 내셔널갤러리의 중앙 홀을 장식한 19세기 영국 회화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려한 선과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한 신과 님프 들의 화려한 연회장을 지나고 성서의 준엄한 이야기로 가득한 르네상스의 길고 긴 갤러리를 지난다. 마침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방이 시간 여행의 종착지다. 르네상스의 천상을 올려다보던 시선은 15세기 플랑드르의 소박한 작품들이 전시된 방에 이르러서야 편안한 눈높이로 돌아온다. 내셔널갤러리 28번 방이 반에이크가 거처하는 현재의 주소다. 중세 말기 1433년의 플랑드르인. 붉은 샤프롱 모자를 머리에 두르고 작업에 몰입중인 반에이크는 뒤에 올 르네상스의 빛나는 개인들을, 슈퍼스타들의 전성시대를 미리 마중 나와 있다. 신의 세상을 정밀하게 모사하던 현미경 같은 눈을 들어 그는 미래에서 온 손님을 지그시 곁눈질한다. 역사가 기억하는 최초의 개인 자화상, 중세의 끝자락에 멈춰 있는 그의 오라는 시대를 초월해 반짝인다.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은 실물의 3분의 1 크기로 제작된 최초의 독립 자화상이다. 이 작품이 자화상인지 여부에 대해 오랜 논란이 있었으나, 액자에 새겨진 화가의 좌우명은 이 작품이 자화상이라는 주장의 명확한 증거가 되어 준다. 액자 가장자리의 위쪽에는 “A ΛC IXH XAN”, 아래쪽에는 “JOHES DE EYCK ME FECIT ANO MCCCC.33.2I. OCTOBRIS”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 내가 할 수 있기에 내가 나를 만들었다”라는 자부심과 겸손을 동시에 품은 문장이다. 이는 겸양을 가장한 자신감의 선언이다. 또한 서명과 1433년 10월 21일이라는 제작 날짜를 기록해 사실상 최초로 저작권을 선언했다. 동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문주의자 알베르티Leon Betista Alberti가 로마의 고전적 전통을 따라 자신의 측면상을 메달에 새겨 넣은 자화상을 제작했다.그러나 모자를 터번처럼 말아 쓴 반에이크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은 꿰뚫어보듯 관객을 응시한다. 탄력을 잃어 꺼진 눈, 입가와 눈가의 주름, 약간 충혈된 눈과 창백한 피부 아래 두드러진 핏줄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얼굴이 검은 배경 위에서 하얗게 빛을 반사한다. 머리를 감싸고 어깨까지 늘어뜨려 쓰는 샤프롱 모자를 굳이 터번처럼 둘둘 말아 머리 위로 쓴 이유는 패브릭의 굴곡과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p. 31-32



[자화상의 심리학] 윤현희, 문학사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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