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스펙터
내 첫 미술 선생 로라 스펙터는 뛰어난 화가는 아니지만
매우 뛰어난 예술가이자 선생임은 분명하다. 그녀는
애초에 버클리와 뉴욕대학에서 퍼포먼스와 필름을 전공하고
대중의 의식을 각성시키려는 예술을 시도했는데,
이를테면 museum anatomy 같은 프로젝트였다.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 지하 창고에 잠자고 있는
인물화 컬렉션들을 끄집어내서,
현실의 모델의 몸 위에다 미술관 컬렉션에 잠자고 있던
인물들을 페인팅해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예술적이며 학구적 진취성에 찬사를!
그 작업이 무슨 의미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링크를 통해 직접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한다.
https://canvasrebel.com/meet-laura-spector/
https://youtu.be/jNHAcxD4 Suk? si=wm2 yWbqL46 Y4 SNHD
if you are gonna be wrong, do it arrogantly wrong!
하지만 휴스턴에 정착한 그녀는 회화로 전향했고
내겐 매우 훌륭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
로라 스펙터는 여러 해 전, 초짜시절 내게 말했다.
"그대는 어차피 틀릴 거니까 가차 없이 arrogonatly wrong!
그래야 빨리 배우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 줄 확실히 안다고."
덕분에 나는 오호라 마음 놓고 arrogantly & wrongly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로라 스펙터가 훌륭한 선생인 것은 이 부분이다.
그녀는 또 덧붙였다.
“네가 그린 그림이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해도
누구에게 선물을 하는 만행을 자행하지 말도록…“
“그래그래 알았어.. 뭐...”
누군가에게 선물할 만큼의 능력도 재능도 안되지만
내 그림을 보면서 가족과 지인들이
좋은 기분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독립한 아들들은 엄마의 미완의 그림을 자기들 아파트에
잔뜩 걸어놓고 안정감을 갖는 것은,
그림을 그림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안이자
소소한 행복 중의 하나다.
화가가 되고 싶으셨으나 여의치 않은 형편 덕분에
건축가가 되신 시아버님은 말씀하셨다.
"심각하고 어려운 건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고
현희는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을 계속 그리자."
이어서 한국의 가족들과 지인들은 말한다.
“글 쓰는 건 힘드니까 그만하고 한 3년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열어보자 “
“미국 가 계신 동안 저 그림 저희 회사에 빌려 주심 안돼요?”
“전시회는 왜 안 하세요? 언제 할 계획이세요? ”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은근한 아부성 멘트를 날려 대면
거기에 혹한 나는 그만 그림 그리는 일이 더 좋아지는 것이다.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서
그들의 입으로 직접 따뜻한 감동을 돌려주는데,
내 시간과 애씀에 대한 그보다 더 확실한 보상은 없지 않을까...
용기 백배한 나는 그림을 더 자주 그리겠다
매년 다짐을 하지만 시간이 그리 쉽게 나지 않는다.
어쩌다 작가
삶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무수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가족이라도 사별하게 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심리적 파산을 맞고 만다.
내게 그 일은 길을 걷다 느닷없이
깊은 맨홀에 빠져버린 사고 같은 것이었다.
맨홀에 빠져서 그 깊은 바닥에 죽은 듯 누워서
백년간의 고독을 곱씹고 있다보면,
느닷없이 알라딘의 양탄자가 날아와
나를 싣고 떠오르는 마법이 벌어지기도 한다.
느닷없이 맨홀에 빠졌듯, 느닷없이 떠오른다.
그러니 인생에 고집부리지 말고 순응하도록....
사는 일이 흥미로운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세 권의 책을 출간한 내게는
어쩌다 보니 작가라는 겸연쩍은 이름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알라딘의 양탄자에 올라 탄 것 같았다.
입을 꼭 닫고 있던 시절,
계획에 없던 대중서를 출간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고
출간한 책들이 전자책과 오디오북으로 진화해
대륙을 넘나들며 이름을 알려 나가고
또 대륙을 넘나들며 독자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뜻밖에 벌어진 일이었다.
출간한 책들이 모두 기업연수와 교사연수 교재로 제작되어
많은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었던 일은
미루고 있던 지식의 사회 환원 의무를 조금은
행한 것이어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었다.
전국에서 강의 초청 덕분에 여행하며 한국을 다시 배웠다.
그리고 다시 연결될 일 없을줄 알았던
어린시절 소중한 인연들을 되살려 놓은 것도....
그러므로 그 작가라는 알라딘의 양탄자는
사실상 인사도 못하고 졸지에 보내드린 아빠가
세상을 등진채 입 닫고 앉아있는
딸을 바라보시기 안타까워 보내주신 선물
같은 것이었다고 나는 믿을 수 밖에 없다.
좋은 사람들을 내 곁으로 보내주시고...
좋은 일과 시간들을 또 보내주시고....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의 협곡.
그 협곡 사이에서 나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한국으로부터 너무 많이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사이 디지털 세계로 편입해 버린
한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패스워드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그것을 갖지 못한 것이 결정적 문제였다.
돌연 한국 사회 한가운데에 떨어졌을 때
나는 그 놀라운 우연이 반갑기도 했지만
알듯 모를 듯 한 내 나라를 다시 배워가는 긴장과 낯섦으로 엎치락 뒤치락했다.
내가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기분을 나아지게 하고
지식전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란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에 대면 강의를 할 때 가능하지만
그림은 내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순식간에 행복하게 만든다. 그림은 다른 이야기다.
finally, there was a breakthrough today.
초상화를 그리는 토요일 오후. 벌써 네 번째 시간.
거대한 모자를 너울처럼 뒤집어쓴 모델은
아주 개성이 강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 눈과 코와 입과 모자가 하나하나 정말 드라마틱 했다.
그리기 매우 좋은 얼굴이었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고 진행중인 그림이지만,
모델 언니는 내 결과물을 아주 좋아했다.
이곳 사람들이 대개 흥이 넘치고 쉽게 자주 행복해 하지만,
모델 언니는 내가 그린 자기 얼굴 앞에서 정말로 행복해했다
나는 진심으로 대답하기를
it’s because you are beautiful.
Your beauty makes my work way easier!!
오늘은 모델선 그분에게 보람을 돌려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유럽 파병 갔다 돌아온 모델과는
독일과 브뤼셀에 파병 갔던 이야기를 나누며 반가워했다.
브루게에 꼭 다시 걸 거라는 그녀에게 나도 동감을 표했다.
초상화는 첫 시도라 많이 어렵다.
인체 데생을 배운 것도 아니라 막막하기만 했는데.
네 번째 날, 납작하고 평평한 알렉스 카츠 스타일을 극복했다.
still working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