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먼 길의 시작
서울에서의 한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휴스턴을 향해 집으로 가는 먼 길의 시작은 아침 열 시 사십 오분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더운 서울에서의 여름 한달간을 꼬박 하루 여덟시간씩 공부한 큰 아이에게 바람도 씌워줄 겸해서 중간기착지로 홍콩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홍콩을 경유하면, 휴스턴으로 직항하는것보다 훨씬 비행편이 싸지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다. 집 앞에서 공항 가는 리무진을 타면 한 시간 내지는 한 시간 반 후면 공항에 도착하지만, 작은 아이는 늦어도 새벽 네시 반에는 공항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고 출국 삼 일 전부터 우기고 있었다.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하신다는 논리도 아닌 핑계를 대면서... 실은 아이가 네시 반 출발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빠의 꼼꼼한 습관을 답습해서라기보다는, 공항으로 향하는 길과 공항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에 느끼는 여행의 설렘 같은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그 기분 좋은 긴장감에 빠져들고 싶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엄마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언제부터 그랬던지 장거리 여행 후엔 신체적 후유증이 뒤따르면서부터는 공항을 향한 길 위에서의 설렘이라든지 여행의 설렘 같은 것은 기억 흔적으로 남아 있다. 가족을 동반한 여행이란 엄마로서의 세심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기에 일상의 탈출을 즐기는 붕 뜬 마음보다는 긴장과 책임이 설렘을 무뎌지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네시 반 출발을 고집하는 아이와 타협을 했다기보다는, 집 앞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가 다섯 시 반에 운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새벽의 미명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 가족들과 단체 사진을 찍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첫차에 올랐다. 인천 공항의 북새통을 통과해 오후 세시 반, 마침내 중간 목적지, 이틀 밤을 묵을 호텔에 도착하였다.
Airport Express Line
홍콩 공항을 출발하여 해안을 따라 난 고속 전철을 타고 작은 섬을 하나 통과하고 구룡시를 통과하고 바다를 살짝 건너 홍콩 섬의 중심가에 도착하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비에 젖어가는 항구와 산과 시가의 모습이 부산과 흡사해, 잠시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고속 전철만 타고 왕복으로 다니며 창 밖 경치만 바라보고 몇 시간을 보내고 좋겠다는 생각을 할만큼 고속 전철은 매우 깔끔하고 조용하였으며 옛 생각에 젖기 딱 좋은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서 미국으로 출국한 남편이 홍콩역에서 가까운 센트럴 지역에 우리가 묵을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호텔방에 들어서니, 응접실을 겸한 조그마한 키치 넷은 거울처럼 반짝이며 모던한 느낌을 주고 거실 안쪽으로는 보라색의 벨벳 느낌이 도는 로맨틱한 패브릭 소파가 놓여 있다. 한 순간에 아늑한 느낌을 전해온다. 매우 좁은 공간임에도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는 느낌이 들도록 구성된 이 낯선 방에서 아이들은 벌써 우리 집에라도 도착한 듯 편하고 기분 좋은 마음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집에서도 즐겨 마시는 색깔의 에스프레소 캡슐들과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하얀색 에스프레소 잔이 꼭 맞춘 듯이 구비되어 있어, 지난 한 달간 에스프레소 갈증을 느끼던 피곤하던 눈은 반쩍 떠진다.
소호 산책
리셉션 카운터에서는 딤섬 스퀘어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협소해서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하는 좁은 시내길을 꼬불 꼬불 걸어 조금 언덕배기를 올라가다 몇몇 딤섬집으로 보이는 식당들을 둘러보았지만, 결국은 조금 퓨전스런 느낌이 나는 이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 딤섬이 아닌 익숙한 싱가포르 음식들을 주문했다. 이 지역은 알고 보니 소호라는 지역이었다. 홍콩에도 houston Street 가 있나, 왜 동내 이름이 소호냐?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South of Hollywood 의 소호라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니, 걸어 올라갈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놀라운 에스컬레이터의 릴레이가 눈에 들어온다. 지상에서의 에스컬레이터라니, 그것도 에스컬레이터의 릴레이라니..... 대뜸 올라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눈 앞의 빌딩들이며 저 멀리 시가지를 내려다 본다. 에스컬레이터 좌우로 펼쳐지는 빌딩 숲 안에는 시선을 잠시만 고정시키면 훤히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네일숍이며 마사지샵이며 오가닉 음식점들이며, 그리고 개인 아파트 창문들이며... 다 보인다. 언젠가 방문한 맨해튼에는 달리는 차량들이 "Privacy is a myth."라는 섬뜩한 문구를 달고 있었다. 소호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는 privacy is a myth라는 말이 섬뜩하지조차 않다.
하여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Dr. Sun Yet Sen Museum이라는 표지판이 보여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따라간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홍콩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람일 듯하여 화살표만 보고 졸졸 길을 따라가다가, 미로 같은 그로서리 가게에서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을 한병 사기 위해 들어갔던 그로서리가 정말로 미로였다. 재미있는 젤리들도 많고 하여 아이들과 한눈을 팔며 미로 같은 그로서리 안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손엔 한가득 먹을 것이 들려졌고, 시간은 저녁을 향해 꽤 저물어 있었다. 해서 선예선 박물관은 다음을 기약하고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며 소호거리의 담벼락에 그려진 그라피티며 풍경화에 한눈을 팔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알아보니 닥터 선예선은 그 유명한 쑨원, 손문 선생이다. 쑨원 선생이 그렇게 많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홍콩에 대한 공부를 좀만 하고 갔더라면 미로 같은 그로서리에서 길을 잃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음 날 시가지 여행에서 돌아오며 걷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은, 홍콩 섬의 센트럴 지역은 빅토리아 하버로부터 홍콩 전철역을 연결하며 시가지와 산 언덕배기의 소호지역까지 전거리가 육교와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어 있어, 좁고 비탈진 거리를 자동차나 탈것의 도움 없이도 안전하게 왕래할 수 있게 설계되어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올 일은 없겠지만) 악천후의 기후 속에서도 행인들이 젖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설계 해 둔것은 무척 감탄스럽고 현명한 처사다. 준비 없는 여행에 지리를 전혀 몰랐던 첫날 아침은 호텔에서 하버까지 택시를 탔지만, 오후부터 떠날 때까지는 호텔에서 하버 프런트까지 이 육교 위를 여러 차례 걸어 다녔다. 육교 위에서 보는 도시의 야경 역시 장관이었다. 오픈된 공간에서 비용 없이 즐기는 홍콩의 야경은 육교뿐만 아니라 ifc의 옥상 정원에서 full version으로 볼 수 있다.
한낮의 옥상정원은 좀 덥기는 했지만 경치를 즐기기에는 좋았다. IFC 옥상 정원에 저녁이 찾아오고, 빌딩들이 불빛의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하는 시간. 누구나 옥상정원에 앉아 화려한 홍콩의 밤을 즐길 수 있고, 오픈 레스토랑을 빌려 파티를 즐기는 단체들이 꽤 많았다. 다음엔 한국에 두고 온 (?) 고교 동창과 여기 앉아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홍콩과 야경이 흡사해지는 부산에는 이런 공간이 있는가 생각해본다. 부산에도 이런 오픈되고 자유로이 밤바다와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어지면 좋겠다 바래 본다.
상냥곽 속에 빼곡히 꽂혀있는 성냥개비들처럼 하늘 향해 치솟은 뾰족하고 각진 건물들이 신식, 구식 건물, 비즈니스 건물과 주거를 위한 건물들이 마구 뒤 섞여 있던 홍콩의 시가지 풍경을 생각하면 왠지 신경의 한 줄기가 자극되면서 불편감이 엄습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높은 건물이라고는 없는 널찍한 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홍콩 사람들이 내 거주지로 놀러 온다면 얼마나 숨 막히게 지루할 것인가.
하지만 홍콩이 좁디좁은 섬이라는 지형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과, 산을 등 뒤로 하고 바다를 앞에 놓은 배산임수라는 지형의 장점을 살리면서 현대 건축물들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개성 넘치는 건물들을 수집해 놓고 아시아 대륙의 맨해튼과 같은 입지를 갖추게 된 것에는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빅 버스에 올라 시가지를 구경하며 이틀을 보내고 나서 드는 생각은, 홍콩이란 섬이 경제적인 면과 스카이라인에 있어서는 맨해튼과 유사하고 (심지어는 맨해튼의 아이언 빌딩을 모방한 듯 보이는, 도심 한가운데 도오가 잘라지는 딱 고 지점에 서있던 누더기 모양을 한 삼각형 건물도 보았다), 산과 바다와 비탈진 언덕으로 가득한 지형과 트램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에서는 샌 프란시스코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특유의 시가지 풍경도. 샌 프란시스코가 중국인들의 집결지가 되는 이유, 또 하나의 중국이 되어가는 이유가 홍콩을 보면 납득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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