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쉘 베이커리 (Pekarnya Mishelya)
바다를 따라 일직선으로 늘어진 블라디보스톡 해양공원을 걷노라면, 그 평온한 오후에 잠겨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법하다. 다만, 한기를 대비한 완성된 옷차림을 필수로 준비해야 하거늘. 30% 정도 부족한 니트 가디건을 위태롭게 여미고 해안가를 거닐며 나른하게 햇빛을 보고있자니 춥고 고단한 느낌이 불어왔다.
이 쌀쌀한 무드를 방어할 방법이란, 뜨거운 한 잔을 찾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공원 끝 쪽의 언덕 계단을 사뿐사뿐 올라갔고, 그 위에 바로 포착된 작은 카페가 보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즉시 돌진한다.
들어설 때는 잘 알지 못했으나, 모스크바, 도쿄, 파리에도 지점을 둔 유명한 베이커리를 운명과도 같이 마주하게 된 것. 그치만, 지금 이 곳은 명성 높은 빵 맛보다 이 후덥지근한 온도감이 더 매력적인 '구들장' 일 뿐.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인지 아직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래서 한산한 카페의 분위기도 내적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따뜻한 공기, 낯설지만 잔잔한 비지엠, 든든한 기분에 한 몫하는 빵냄새에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하루를 시작한 이래로 2잔이상의 커피를 마셔버린 터라, 차를 주문한다.
시선을 돌리니, 베이커리답게 오픈 냉장고에 디스플레이된 기본 메뉴가 풍부하고 빼곡하다. 색깔이 강렬해서 맛에 대한 기대가 다소 반감되었으나 그래도 빼놓으면 아쉽기 마련. 냉장고 맨 윗줄에 자리한 커스터드 크림을 올린 자몽 파이 같은 것을 고른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최고의 선택.
주문을 마치고, 적절한 자리를 잡고, 계산대를 바삐 드나드는 로컬들의 모습을 구경한다. 바리케이트가 형성되어 테이블 주위로 나만의 영역이 만들어져서 더 안정감이 느껴졌다. 오고가는 로컬들 대부분은 나처럼 자리를 깔지 않고, 빵과 음료를 테이크아웃 해서 챙겨나갔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반복되는 현지의 리드미컬한 대화 속에서 도시 한가운데에 포-옥 섞여버린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가득 찬 캐리어 속에서도 절대 빼놓지 않았떤 블라디보스톡 일정의 중심, '시베리아 문학기행'을 미쉘베이커리의 테이블에 촥 펼친다. 기분만 내기 좋은 타이틀로 보이지만, 이 곳에서 2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 마력의 단행본이다. 여행 중에 항상 도시와 국가에 대한 읽을 거리를 챙기는데, 여정 중에 완독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중간중간 입에 조금씩 찔러넣었던 마성의 자몽 파이는, 씁쓰름과 달다구리가 적절히 조화되어 엔돌핀이 도는 듯한 기분을 선물했다. 빵류의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데, 우아하게도(?) 접시를 싹싹 긁어서 비웠다.
그 와중에 술술 넘어가는 이 단행본라는 것의 감상을 티테이블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푸쉬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이광수. 문학의 키워드가 엮어지는 배경이 시베리아 벌판, 지금 내가 들어선 이 곳이라는 것이 묘하다. 억지로 키워드를 달달 외기는 쉽지않은 내용이지만, '시베리아'라는 맥락으로 이것들을 엮으니 머릿속에 잘 꿰어지는 느낌. 러시아 최초의 근대혁명과 데카브리스트라는 역사 위에 문학의 획들을 쭉 각인하는 흐름. 유익한 안내서와 함께 이 곳에 와서 참 다행이다.
한창 차디찬 바람이 부는 블라디보스톡 한가운데서 이 애프터눈 티타임은 선물과도 같았다.
온도와 소리와 맛, 모든것이 즐거워서 글이 쏙쏙 흡수되는 영양가 있는 오후였달까.
온기를 채우고 다시금 해안가를 거닐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