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와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남겨두기
한 때는 조향사를 꿈꿨던 적도 있다. 조향사뿐인가. 고고학자, 만화가, 작곡가, 중학생 때까지의 나는 으레 그렇듯 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생활도 분명 있었다. 아이는 꼭 남매를 키우면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어머니와 가까운 거리에 지내면서 돈과 시간으로 효도하고 싶었고, 조카들에게 웃기고 편한 삼촌이 되고 싶었고, 천재를 동경하는 마음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 많던 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꿈은 내가 어디에 흘리고 온 걸까?
글을 읽으면서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29살 백수다. 작년까지는 건축학과 졸업을 위해 주에 20시간도 못 자가면서 졸업 작품에 매진했지만, 그 후 취업 시즌에 지원한 약 15개의 회사에 전부 1차 문턱도 넘지 못하고 올해를 맞이했다. 취직은 서울에서 한다는 마음으로 다짜고짜 상경을 먼저 했지만 취직도 안 된 김에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자며 구직 활동은 안 하고 있다. 주 5일 대학가 근처 스캔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남는 시간에 SNS에 올릴 이미지를 만들고, 팟캐스트 녹음을 하고, 영상 편집을 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쓴다.
나는 사실 내가 무엇에 다가가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 꿈들은 이젠 내게 어떤 반짝임도 없다. 이젠 '유명해지고 싶다'는 목표 의식만이 남아서 내 가능성을 다시 넓혀가고 있지만, 이게 정말 내 '가능성'에 도움은 되는 건지, 그래서 결국 내가 뭘 하겠다는 건지 같은 물음들이 합쳐져서 내 마음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 내가 불쌍할 지경이다.
지속된 전쟁과 경제 불황 속에 침체된 건축 업계에서 당당히 취업에 성공한 대학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는 꽤 불편하다. 이미 4년 차, 5년 차가 된 동기들은 만나기도 두렵다. 어떻게 지내냐는 연락은 내가 제일 답변하기 힘들어하는 말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 "난 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 "꿈이 뭔데?"
- (침묵)
혹은
- "나 그냥 뭐 영상 편집도 하고, 알바도 하고, 요즘은 글도 써"
- "와 유튜브 할 거야? 작가도 되는 거야? 뭘 하고 싶은 거야?"
- (침묵)
그래서 내가 결국에 택하는 답변은
- "나 백수지 뭐"
- "아~"
- (대화 끝)
이런 주제를 걷어내기 위해 아주 편리한 말만 할 뿐이다.
가장 힘든 건 내가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나도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잠깐의 아이스브레이킹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놀 것을 알지만 내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른'에 가까워진 친구의 모습을 보는 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잠자려고 누웠을 때 천장만 바라보게 하는 원인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괴감에 비틀릴 것을 알기 때문에 난 점점 더 구석으로 들어간다. '난 대기만성형이야'라는 자기 위로는 이미 닳아버린 지우개처럼 우울을 지우려 해도 기능을 못 하고 번지게만 할 뿐이다.
언제 결실을 맺을지 모를 가능성을 그대로 두기가 이젠 벅차다. 생각과 좌절을 관두고 움직여야 할 때다.
영화는 제목대로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면서 시작된다.
누구나 자신이 이상理想하는 것이 있다. 영화를 찍는 것, 배드민턴을 더 잘 칠 수 있게 되는 것, 좋아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 좋은 여자친구가 되는 것, 인기녀가 되는 것, 섹스를 하는 것, 친구로 남는 것. 그리고 대게 그것은 현실적인 목표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수없이 마음에 내리친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을 놓는 일은 힘들다. 놓은 척한다. 놓아버리면, 무언가를 결정해 버리면 내가 특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 같아서.
이상을 향해 멈추지 않는 사람은 바보다. 그런 바보들과 다르다는 걸 말하기 위해 남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비웃고, 자신을 연기한다. '나는 이상 같은 거 없어도 아무렇지 않아'. 그들이 반의 주류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상을 좇으면서 주류인 사람도 있다. 키리시마는 공부도 잘하고, 배구부의 주장에 도대표로도 선발되었으며, 예쁜 여자친구도 있다. 모든 아이들이 키리시마를 바라보고 추앙한다. 키리시마는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이상향, 아이돌이다. 희망의 상징. 동급생인 키리시마도 해냈으니 나도 무엇이든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의 상징.
키리시마桐島, 직역하면 오동나무 섬이다. 오동나무는 성장이 매우 빠르고, 강도도 단단하며, 해충을 막는 효과도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양한 곳에 사용된다. 옷소매에 넣거나 가구, 관으로도 쓰였다. 오동나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오동나무를 봉황이 머무는 단 하나의 나무로 여길 만큼 신성시되었다. 키리시마라는 이름 자체가 수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신성한 섬이다.
그 키리시마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큰 이슈다. 도 대표 배구 선수로 키리시마가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하는 조례에 참석도 하지 않았다. '가능성'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슬며시 불안의 씨앗을 뿌린다. 키리시마 어딨어? '가능성' 어딨어? 키리시마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가능성'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그리고 키리시마가 배구부 활동을 그만뒀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학교에 퍼졌다.
키리시마가 그 가능성을 저버렸다는 사실은 '그 키리시마'가 포기를 했다면 나도 안 되는 일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직결된다. 가능성과 이상향 자체인 키리시마가 그 존재 의의를 버렸다는 건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지속해 오던 행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키리시마의 존재감에 밀려 만년 벤치의 자리라도 지킨 것도, 학교 아이돌의 여자친구로 존립하는 것도, 누군가는 자신의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것도 모두 의미 없어졌다.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아이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위해 달려갈 것이냐,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에 순응할 것이냐. 영화는 선택 앞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불안해하고, 지속해 오던 일들의 의미에 의구심을 느끼거나, 연연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모습도 있다. 그러나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서 이미 벗어나있는 인물도 있다.
'도망'의 대표적인 등장인물 '히로키'는 야구부지만 부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뭐라도 좋으니 참여해 달라는 야구부 주장의 권유를 매번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야구 가방을 매일 들고 다닌다. 히로키의 야구 가방에 적힌 Shorai는 일본어의 영어 음차로 ‘장래’라는 뜻이다. 히로키는 말 그대로 장래를 열어볼 용기는 없지만 매일 등에 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진로희망서를 쉽게 적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능성이 가능성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한다. 야구를 계속한다면 3학년의 신인 선발에 실패할 것이 두렵고, 현실적인 목표에 순응해서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야구가 좋다. 자신이 특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태로 남고 싶어 한다.
히로키는 같은 무리의 아이들보다 키리시마의 부재에 대해 덜 드라마틱하게 반응하는데, 그것은 히로키가 스스로의 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보류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확실한 꿈을 위해 달리는 건 무서운 일이다. 그 꿈을 위해 달리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건 더욱 무서운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직면해야 하니까. 프로 선발에 실패한 3학년 선배의 모습은 야구에서 특출 난 재능을 보이지 못할 자신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무표정으로 야구부에 돌아오라고 말하고, 늦은 밤 허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에는 열정이라기보단 의미 없는 집착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히로키는 그로부터 계속 도망친다.
영화부의 '마에다'는 히로키와 대척점에 있다. 마에다 역시 키리시마가 없어졌든, 배구부를 떠나 전학을 간다든 말든 관심 없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영화가 좋기 때문에 영화에 집중할 뿐이다. 마에다는 가능성을 따져가며 영화를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애당초 현실과 이상 사이의 선택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마에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마에다는 영화에 열중하고 있다. 영화 잡지를 읽거나, 새로 찍을 영화 시나리오에 대해서 대화하는 등 항시 영화 생각뿐이다. 그런 마에다가 반 주류 아이들의 비웃음을 사는 건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현실을 무시한 채 영화에 몰두한 마에다를 이해할 수 없고, 마에다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아이들은 옥상에서 키리시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잠시 스쳐가는 '가능성'을 본 아이들은 불안에 찬 달음박질로 옥상에 도착한다. 그렇게 내달려 도착한 옥상에서 발견한 건 쓰레기 같은 영화 소품과 허접한 분장으로 좀비 영화를 촬영 중인 영화부 아이들이다.
'가능성'을 보기 위해 도착한 곳에서 '좋으니까 하는' 영화부를 만나는 건 멋진 연출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 가능성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그 모습이야말로 청춘의 낭만이다. 다만 아직 불안에 찬 아이들은 그 모습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 당장 닥친 도 대회에서 이겨야만 하고,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이상에 의탁해야 하는데 도대체 우리의 아이돌은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특별해질 수 있는 그 가능성은 도대체 어디를 가버린 거냔 말이다.
극은 이제 불안의 극단을 치달아 아이들은 싸우기 시작한다. 마에다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싸움의 현장은 환상적인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이다. 마에다의 시선은 마에다의 결심을 뜻한다. 자신은 이것을 위해 나아가기로. 누군가의 시선도, 비교도,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이젠 내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때 나오는 음악은 히로키를 짝사랑하던 취주악부의 주장 '사와지마' 또한 히로키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고 마음을 다 잡아 연주하는 소리다. 나름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각자의 꿈에 가까워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결과물로 보여주는 것은 내 마음을 울리기에 탁월했다.
히로키는 그 싸움 뒤에 마에다에게 다가가 질문한다.
넌 장차 영화감독이 될 거야?
아니 영화감독은 무리야. 그래도 좋아서 하는 거야.
남의 입을 통해 자신의 고민에 대한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허무했을지 모르겠다. 혹은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슬펐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고민하는 동안 누군가는 꿈에 한 발자국 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는 역광이 비쳐서 그 모습에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났을 수도 있겠다. 히로키의 마음을 정확히 유추할 수는 없겠지만 같이 눈물은 흘릴 수 있겠다.
히로키는 그렇게 옥상에서 내려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리시마에게 연락을 시도한다. 내 가능성을 다시 한번 두드려본다. 하지만 그것은 히로키에게 의미가 없다. 전화를 받든 안 받든 히로키는 바삐 움직이는 야구부를 바라본다. 그런 히로키의 모습을 영화는 역광의 모습으로 비춘다. 가능성에 기대지 않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는 얼마나 눈이 부신가. 이젠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겠다. 나는 역광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