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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산대폭발 Aug 12. 2024

날 상처 입히는 사람들 이해해 보기(제가 왜요?)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와 일본 영화의 폭력 견디기

 나는 사람이 싫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너무 어렵고, 그 모든 노력을 다 해내더라도 내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확률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지요. 아니 막말로 그렇잖아요. 관계라는 것에 꼭 위계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텐데 왜 맨날 나만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지? 난 그냥 인간적인 예의로 당신을 배려해주고 싶었던 건데 그게 왜 당연한 게 되는 것인지? 뭐, 사실 나도 물어보기보다는 그 관계를 바로 그냥 단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딱히 소중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나도 누군가를 분명히 상처 입힌 적 있겠습니다만 일단 그건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지금은 제가 칭얼거리는 시간입니다.

 나는 저번 글에서처럼 남들도 이렇게 사나? 궁금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남들도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하나? 그럼 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된 거냐고 도대체. 하지만 분명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있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

일본 영화는 묵묵히 버텨내는 인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례한 폭력들을 영화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들의 정당성을 위해 폭력에 서사를 부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회사 일을 하고, 유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에서도 수재로 꼽혔던 주인공의 아내가 집안일을 맡는 식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나 거시적으로 보나 아내가 나가서 일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결국 영화에서 아내는 작품 내 설정을 위해 집안일을 하다 죽었습니다. 영화 설정상 아내는 죽을 것을 미리 알았고, 그 때문에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 행복은 너와 함께 있는 것"이라는 대사로 의미를 부여해서 이를 정당화합니다. 감성이 이성을 이긴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지만요.


 ‘백만엔걸 스즈코’는 딱 그런 영화입니다. 일본 특산품 여름맛 장면과 더워 죽겠는데도 끝끝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닌 아오이 유우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 끝까지 보지도 않았습니다.

 영화 초반에 험한 말을 쏟아내는 남동생은 알고 보니 교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즈코는 어쨌든 완벽한 독립,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자신도 남을 알 필요 없는 완벽한 '독립'을 위해 해변에 정착합니다. 첫 정착지 해변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웬걸, 일하고 있는 주인공 스즈코를 보며 저질스럽게 수군대는 우효비치보이 남성이 등장합니다. 그는 밤길에도 스즈코를 따라다니고 관객인 내가 보기에도 꽤나 무섭죠. 그런 그는 스즈코가 떠나고 나니 실연을 겪는 순수한 아이처럼 묘사됩니다. 그가 ‘사실은’ 연정을 서툴게 표현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면서요.

 두 번째 정착지, 복숭아 집 아들내미는 또 어떤가요. 스즈코가 목욕하고 있는 화장실의 불투명 유리 미서기문 바로 앞에서 실루엣 비춰가며 알짱거리고, 복숭아 과수원에서도 한창 바쁠 때 추파를 던지기 여념 없는 이른바 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시골 남성입니다. 나였으면 그 길로 뛰쳐나갈 만큼 무서워요. 하지만 역시나 마지막에 스즈코 편 좀 들어주고 복숭아 좀 챙겨준다고 좋은 추억이라는 양 영화는 미화해 줍니다.

 최악은 역시 세 번째 정착지의 연인인데, 계속 돈을, 그것도 거액을 자꾸 빌려 결국 스즈코는 결별을 선언하고 백만 엔을 채우지도 못 한 채 떠납니다. 스즈코한테는 그 목표 하나뿐이었는데요. 스즈코도 연인이 좋아 정착을 실제로 고민했음에도 말입니다. 그제서야 백만 엔을 채우면 스즈코가 떠날까 봐 그랬다며 넌지시 정당화시킵니다. 어무깽뚱한 서사에 눈이 핑 돌아요. 엔딩에서 스즈코가 올드훼션드 도넛을 입에 물고 기차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원샷으로 담은 그 장면이 이 영화 중 가장 멋진 장면입니다.


 앞서 서술한 것들이 불쾌하면서도 맘에 드는 점 입니다만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불쾌하게 느껴진 점은 이 정당화만을 위한 서사가 우리에게,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매우 불쾌합니다.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는지, 난 스즈코한테 이입하고 있는데 이걸 내가 알아서 왜 폭력에 대한 합리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불쾌합니다.

 사실 영화 내에서 스즈코는 앞서 말한 세 명의 서사를 알지 못 한 채 떠납니다. 이것이 마음에 드는 점입니다. 이미 스즈코가 떠난 해변가 식당을 찾아와 사춘기 소년처럼 상심한 감정을 절절 드러내는 우효비치보이를 스즈코는 본 적 없으니 그저 질척거리는 철면피 무례한으로 비치보이 남성은 기억될 것입니다. 복숭아 마을의 복숭아 아가씨로 마스코트를 해달라는 부탁에 싫다는데도 되려 성내는 마을 회관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에서야 복숭아 집 아들램은 회관의 어른들에게 스즈코 편을 들기 때문에 스즈코한테는 불쾌한 시골 남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마지막 동갑의 연인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전하러 기차역까지 와보지만, 스즈코는 멋진 장면을 선물해 준 올드훼션드 도넛을 사기 위해 상점에 들어갔다가 엇갈립니다. 때문에 연인의 어무깽뚱한 변명을 듣지 않고 그를 돈을 좋아한 남자 정도로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복숭아 집 아들램 하루오는 작별의 인사로 복숭아를 건네주었으니 그나마 나았을까요?


 폭력의 서사를 주인공 스즈코에게 전달시키지 않아 스즈코는 미련 없이 정착지들을 떠나버릴 수 있었습니다. 불편한 것들에서 도망치기만 한다고 자신을 비하하던 스즈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즈코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단번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날 불편하게 한 그 '정당한' 이유를 내가 왜 알아야 하나요? 내가 왜 날 불편하게 한 당신을 미워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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