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산대폭발 Aug 16. 2024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양자택일 극단적이야 넌

스포일러 다분

 관객이 영화라는 세상에 빠져드는 건 마치 파리가 집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떤 작은 틈새로 들어가긴 들어갔으나 내보내려고 창문 한 짝을 다 열어줘도 못 나가는 파리처럼 관객은 제 발로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고는 세계관의 구멍이 어지간히 크지 않고서야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리고 제일 빠져나오기 어려운 영화는 그 세계관이 얼마나 빈틈없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들어가고 있는 건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는 영화, 눈 뜨고 보니 내가 이미 들어와 있도록 이끄는 영화다.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안인지 밖인지 몰라서 못 나가는 영화.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여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싶은 영화.


 그런 면에서 좋아하는 영화들이 몇 개 있다. 그것이 몇 번 말했던 적이 있는 '호신술의 모든 것',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더 랍스터', '킬링 디어' 같은 영화다. 특히나 '더 랍스터', '킬링 디어'는 그중에서도 특별한데, 판타지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과 명확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의 세계관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나는 내가 파셀통그를 쓸 수 없다는 걸 안다. 에반게리온을 너무 사랑하지만 2015년에 사키엘은 오지 않았다. 판타지는 그 자체로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있고, 그렇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없다. 하지만 '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의 감독, 각본을 맡은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를 제공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하다. 바로 행동에 따른 명확한 결과를 제시하는 것.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는 서로에게 완벽한 짝을 찾지 못하면 범죄자다. 사실 완벽이랄 것도 없고, 싱글이 된 후 다시 연인이 되지 못 한 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그 죄에 대한 벌로 동물로 수술시켜 버린다. 결혼했더라도 이혼하면 도루묵. 일정 나이 이후 혼자인 이들은 커플을 만드는 호텔 안에서 45일 동안 짝을 찾지 못하면 가차 없이 짐승행이다(적어도 원하는 동물로 변하게는 해준다).

 이것은 이 작품 자체의 원동력이자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연애 못 하면 사람도 아니라는 거야? 동물로 어떻게 변신시킨다는 거야?라는 일반적인 물음은 일단 제쳐두자. 어쨌든 이 명제는 세계관을 구축시켜 주는 요소다. 아주 간단하게 영화와 현실을 분리한다. 그래서 더욱 구분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그 명제만 없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를 바가 없다.


 '킬링 디어'의 세계는 심장 의사인 주인공이 의료 사고로 마틴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면서 시작된다. 마틴은 주인공에게 “네가 내 가족 중 한 명을 죽였으니 공평하려면 너 자신도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잃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들은 하반신 마비, 거식증, 안구 출혈을 거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대한 대가로 모두 죽게 된다. 이 명제 역시 이것만 제외하면 영화 밖과 안은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명제들이 판타지적이라고 한 것은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하면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오롯이 본인의 선택이라는 점, 그 결과 또한 피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혹시 연인을 찾지 못하더라도 짐승이 안 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현대 의학의 기술로 내 가족들의 하반신 마비를 치유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건 없다. 연인을 찾지 못해 호텔의 눈을 피해 숲으로 도망치더라도 호텔에서 주기적으로 나와 그들을 잡아가고, 그 어떤 기계들로 검사를 해보더라도 내 아들과 딸은 하반신 마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결과에 관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분명히 방방에서 덤블링만 했을 뿐인데 눈 떠보니 코가 깨져 있는 세상이다. 영문 각인 키보드가 품절이라 어쩔 수 없이 한영 각인 키보드를 샀는데 배송 오류로 영문 각인 키보드를 받게 되는 세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상치 못 한 기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불행 앞에 마땅한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어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판타지 세계가 내 것인지 아닌지를 자꾸 확인하고 혹은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명확한 결과가 있는 양자택일의 세상은 얼마나 달콤하게 기능하는가! 그 세상 자체는 부조리하더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선택 그 자체에 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비극에 나앉게 되더라도 이런 부조리한 세상 자체를 원망할 수라도 있다! 내가 취업이 안 되는 이유는 2년 이상 휴학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어른이라는 자격을 주지 않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라면?


당신 한 학기 더 휴학하고 어른이 될 자격을 박탈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졸업하여 평생 방학을 잃어버리겠습니까?

머저리 같은 세상아, 나는 평생 어른이 아니게 되겠다.


미워 미워 세상아. 취업시켜 줘.

이전 07화 그 남자를 울린 이유 찾아보기(저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