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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산대폭발 Aug 30. 2024

코뼈 골절로 알아보는 뿌리 깊은 마초 나무

영화 '호신술의 모든 것'과 모순적 시스템의 전복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부상은 무엇인가?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는 것 예사고, 농구나 배구를 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진다거나, 험하게 놀다가 팔이 찢어지는 등 부상의 종류는 많고 다양하다.

 나는 그런 부상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자아이들이랑 그림을 그리면서 놀거나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는 나는 '내성적'이라는 단어의 표본이었다. 활동적이게 놀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일도 없었다. 뛰다가 무릎이 까지는 정도가 내가 본 상처의 최대고, 골절이나 열상의 아픔은 미디어를 통해 간접 체험해 본 것이 전부였다.

 영상이나 책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부상은 쉽게 해결되곤 한다. 등장인물들이 당한 부상은 작품 내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큰 역할이 아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과소평가되는 부상이 있다.

 주변에서 코뼈가 부러진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우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소식으로 접한 적도 없다. 그에 비해 각종 영상 매체에서는 조금 폭력적인 상황이다 싶으면 바로 코부터 부러진다. 부상의 위치가 안면의 중앙에 위치한 것과 코뼈가 부러진 상황에 대한 일반적 인식으로 인해 코뼈 골절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요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콧등의 밴드를 붙인 묘사만으로 반항적인 기운을 물씬 뽐낼 수 있고, 거기에 청바지와 통 큰 자켓을 걸쳐주면 1900년대 후반의 미국을 주름잡는 캐릭터 행세를 할 수 있다. 실제로 쇄골과 더불어 코뼈가 가장 많이 부러진다고 하니 각종 매체에서 자주 묘사되는 것이 썩 잘못된 반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코뼈⋯ 자주 부러지는 만큼 안 아플까?


 겁나게 아프다. 나는 아마 코뼈가 부러질 때 잠깐 기절했던 것 같다. 너무 아픈 코를 감싸 쥐고 일어나는데 코피가 수돗물처럼 터져 나왔다. 코피를 받기 위해 양손을 턱에 대어 걸어가는데 피가 넘칠 지경이라 길거리에 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사실 아팠는지 아닌지는 기억에 없는데,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엔돌핀이 돌았는지 내가 헤실헤실 웃고 장난치며 친구들과 걸어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도 받아주는 친구는 없었다. 그런 모습 때문에 나와 함께 있던 친구 중 누구도 내가 코뼈가 부러졌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 그냥 코피만 왕창 나는 줄로 알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았기에 인근 종합 병원 응급실로 걸어갔고, 가면서 오락가락한 나를 대신해 친구가 가족에게 전화를 돌렸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누나에게 전화했다. 다짜고짜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은 누나는 병원으로 오는 길에 엄마에게 수없이 전화를 했고, 재빨리 엄마도 회사 회식 자리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가족이 마주한 나는 말 그대로 피떡이었다. 교복 셔츠는 피로 반쯤 젖었고, 신발에도 온통 핏자국 범벅. 얼굴은 아주 가관이었다. 응급처치를 위해 피를 닦아놓으니 코가 난장판이었다. 오른쪽 콧볼은 찢겨 너덜너덜했고, 콧등도 깊게 파여 뼈가 보였다. 나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따뜻한 응급실 안에서 연신 '추워, 추워'라며 중얼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 의사의 대사 한 줄이 엄마의 공포를 자극했을 것이다.

 당시 응급실 당직 의사는 여기서는 안 될 것 같다며 인근 대학병원으로 나를 보냈고, 병원으로 가는 택시에서 나는 '엄마 미안해'하며 중얼거렸다. 영화로 치자면 사실상 클라이맥스 장면이었겠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가 나는 다시 노란 불빛의 수술대 위에서 깨어났다. 코를 비롯한 주변 부위에 마취 주사를 일곱여덟 대는 맞았고, 아파하는 나에게 의사는 "코 좀 높여줄까요?"하고 물었다. 평생 후회를 잘하지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는 내게 그것은 아직까지 후회하는 일 중 하나다. 그때 "네"라고 한 글자만 말하면 됐는데. "아니요"보다 두 글자나 적은데. 나는 그렇게 굳이 한 글자가 아닌 세 글자를 말하고 ‘이제부터 난 달라진다’라는 생각을 품으며 마취에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의 첫날 시험을 치르고 도서관에서 밤까지 공부를 하다가 동네 방방, 트램펄린을 타서 벌어진 일이다.


 영화처럼 짹짹이는 새소리와 아침 햇살에 나는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엄마가 아직 앉아 있었다. 타박 반, 웃음 반으로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어떤 면에선 개운해 보였다.

 내 얼굴은 아직 먹먹해서 만져보니 거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거울에 서서 바라본 얼굴은 내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피가 얼굴에 쏠려 엄청나게 부었고 코에는 거즈를 비강까지 밀어 넣었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부각되어 보였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고 빨간 기운이 얼굴에 아직 남아서 나는 그때의 나를 두더지라고 기억하고 있다.

 

 달라지겠다는 결심은 사라졌다. 얼굴이 달라졌으니 결심은 역할을 다 했던 걸까? 약 2주일을 결석하고 방문한 학교에서 수많은 반창고와 의료용 테이프를 얼굴에 붙여둔 내가 대스타가 된 건 당연한 수순. 당시 중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은 나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 밖에 날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고등학교 입학이었다.


 12월 초쯤에 부러진 코는 온갖 상처와 흉을 남겨 고등학교 입학식에까지 나는 콧등과 콧볼에 흰색 밴드를 붙이고 나타났다. 중학교에서 같이 올라온 친구들은 네 명이었고, 그나마도 배정된 반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과 친해지는 걸 어려워했던 탓에 조용히 무표정으로 있던 나, 코가 부러지면서 휘어버린 안경이 어지러워 수업 시간 중이 아니면 안경을 잘 안 쓴 고도 근시의 사나이인 나는 쉽게 말해 더러운 인상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단박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매점에서 마주치게 되는 선배들은 나를 흘끔흘끔 보며 지나갔다. 당시 동아리를 위해 도서부로 면접을 보러 가서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라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는데도 나는 떨어졌다. 나를 모르던 다른 반 친구들은 슬쩍 다가와 어느 중학교에서 왔냐, 농구하러 갈래, 축구하러 갈래, 담배 피우러 갈래 하며 운을 띄웠다. 겁에 질려 극구 사양했지만 '나쁜 녀석'으로 나를 봤다는 기분에 솔직히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후에 말씀하시기를 척 보기에 내가 속 썩일 놈 1순위라고 하셨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나는 교과서나 실내화에 네임펜처럼 얇은 것보다 유성매직으로 굵직하게 이름을 써놓는 걸 좋아해서 필통에 유성매직을 들고 다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안경이 잘 안 보여서 수업 시간 중엔 제일 앞 줄에 앉았고, 그러다 내 필통이 과학 선생님 눈에 띄었다. 그 안의 매직을 발견하시더니 갑자기 매직을 압수해 가시고는, "너 본드도 하니?"라는 놀라운 대사를 내뱉으셨다. 어느 정도 나를 알게 된 친구들을 낄낄 대며 웃었지만 내 마음은 썩 좋지 않았다. 유성 매직으로도 본드 피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줄이라도 알았더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전교 5등 권에서 놀던 내가 한순간에 이런 취급을 받다니.

 후의 모의고사에서 전교 4등을 했다는 소식에 담임선생님도 펄쩍 놀라 바로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한 뒤로는 그런 시선이 거둬졌지만 나에게는 이 기억이 나쁜 기억 반, 좋은 기억 반으로 남았다. 좋은 기억으로는 왜 남았을꼬 하니 그것은 아무래도 남자 사회에 뿌리내린 마초 문화에 섞여봤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 뒤로는 영화의 강력한 스포가 있습니다.
코 깨진 후기가 궁금하셨다면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주인공 '케이시'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케이시는 카페에 혼자 앉아 신문을 보며 빵과 음료를 즐기고 있는데, 프랑스 커플이 입장한다. 프랑스 커플은 케이시를 보며 불어로 모욕한다. 별 볼 일 없는 놈일 거라며, 신문의 소개팅 란을 보며 자기 망상에 젖어있을 거라며. 불쌍한 케이시는 벌써 25번째 불어 레슨을 참여해 유창하게 알아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도 내지 못 한 채 자리를 나선다.

 회사에선 거의 따돌림 수준으로 주류에 섞이지 못한다. 그 주류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서 동료 직원이 읽던 '마초' 잡지를 몰래 복사한 뒤 읽기까지 한다. 남들의 시선 속에서는 마초의 냄새를 풍기고 싶어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작고 귀여운 닥스훈트와 함께 지내는 것이 그의 낙이다.

 뽈뽈 다니는 닥스훈트에게 줄 사료가 떨어져 근처 마트로 가는 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온 헬멧 무리가 다가와 무차별 폭행을 시작한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진 케이시는 퇴원을 하고서도 밤이 두려워 나가지 못한다. 케이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느끼기 시작했다. 이 마초의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마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케이시는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해 총을 구매한다. 하지만 총도 감정적 보복을 막기 위해 최소 6주 이상 대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지금 당장' 마초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다가 찾는다, 가라데를!

 건조한 인테리어, 신성시되는 매트, 깔끔한 도복, 거기에 위계가 확실한 벨트 시스템에서 오는 정갈한 예의. 이 가라데 도장은 케이시가 선망하는 '마초'의 대표 격이며 신비스러운 공간이다. 발로 펀치를 하고, 주먹으로 킥을 하라고 가르친다. 홀리듯 무료 체험 수업을 받고 나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강한 자'들의 인정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 가라데는 케이시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케이시는 매몰적으로 가라데에 빠진다.

 케이시는 도장에서도 승승장구한다. 선택받은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야간 수업, 그곳은 선택받지 않은 자가 무단으로 오게 되면 무자비하게 팔도 부러뜨려버리고 쫓아내 버리는 곳이다. 제한이 없는 폭력의 세계로 표현되는 곳에 케이시는 노란띠임에도 불구하고 초대받아 참여한다. 폭력을 통해 자신의 해방을 느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자신은 분명 가라데를 통해 인정과 '마초성'을 얻었으나 그것은 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력해서 얻어낸 노란띠도 도장을 벗어나는 순간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했고, 그는 여전히 마트 주차장에서 문콕을 당해도 말 한마디 못 하고, 회사에서 무시당하는 일개 회계사원일뿐이었다.

 너무나 낙심한 케이시. 그는 사부에게 묻는다. 어떻게 자신이 가라데 노란띠인 것을 밖에서도 증명할 수 있는지. 사부의 조언에 따라 케이시는 좋아하지도 않던 메탈을 들으며 큰 소리에 불편해하는 주변 시선을 즐기고, 자신에게 그나마 잘 해준 회사 상사의 목젖에 펀치를 날리며, 회사의 주류인 탕비실 모임에 입성한다. 자신이 도장 밖에서도 노란띠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란색 혁대를 제작해 착용하고, 도장인들에게도 색별로 나눠주기에 이른다. 사부는 검은띠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검은색 혁대를 받게 되는데, 일반적인 혁대랑 차이점이 없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조언대로 잘 따라오는 높은 충성도의 케이시를 보며 사부는 그의 트라우마를 해결해 주기로 한다. 그는 술집에서 오토바이 폭행 무리 중 한 명을 찾아냈으니 보복하라고 명령한다. 케이시는 반신반의하며 결국 그를 때려눕히지만 아뿔싸, 그는 오토바이 폭행 무리도 아니었고, 애당초 오토바이를 타지도 않았다. 사부는 애꿎은 자전거 라이더를 때려눕힌 케이시를 촬영하고 있었다. 자신 스스로 두려워하던 공포가 되었으니 트라우마를 해결했다는 사부.

 케이시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집에 돌아오지만 그의 사랑스러운 닥스훈트가 죽어있다. 분명 펀치이지만 발 모양의 상흔이 남은 채로. 케이시는 가라데 도장의 시스템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케이시는 그 와중에 야간 수업보다도 은밀한 비밀 모임에 초대받는다. 그 모임에 따라가보니 놓여있는 검은 오토바이 세 대와 헬멧들. 케이시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그 오토바이 무리가 바로 '가라데 도장'의 '야간 수업'의 '비밀모임'이었던 것이다. 시스템 속의 시스템 속의 시스템으로 인해 위계는 뒤섞인다.


 폭력과 트라우마, 그를 해결하기 위해 몸담았던 가라데라는 시스템이 모두 의미 없는 허구라는 걸 알게 되자 케이시는 시스템을 전복한다. 시스템 자체로 여겨지는 사부에게 목숨을 건 비무장 결투를 신청하고, 사부의 머리에 총을 쏜다. 십계명(+1)으로 여겨지던 도장의 신성한 규칙도 무시하고 총으로 사부의 머리를 관통한 후 내뱉는 대사가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다'라는 오리지널 마초 격 서부 영화의 대사라는 건 영화를 대표하는 마초에 대한 모순적인 모습.


 아직까지 미국 문화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마초 의식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영화가 머나먼 동방 예의지국의 29살 청년 나에게까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건 마초 의식이라는 게 비단 미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뜻이겠다. 마초 의식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효율을 위해 형성된 위계질서가 시스템 밖에서는 얼마나 바보처럼 보이는지 영화는 잘 나타내고 있다. 아, 나는 고작 코에 밴드 좀 붙인 것으로 어디까지 기세등등했던가. 상병 좀 달았다고 내 후임들에게 얼마나 갈굼을 했던가. 학교에 몇 년 좀 빠르게 들어갔다고 어찌나 아는 척을 했던가.

 나는 코의 밴드를 떼자마자 순둥한 고도근시의 학생으로 돌아와 모범생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손에 악착같이 쥐고 있던 무언가를 떼어낸다면, 시스템을 염두에 두느라 몰두하던 무언가를 전복시킨다면 나는 다시 자유로울까? 케이시는 사부에게 복수를 했지만 그 후에는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또다시 시스템의 위계에 자리한다. 시스템으로부터 모두가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시스템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가져가야 한다는 감독의 뜻이었을까? 고도근시의 순둥한 취준생은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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