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플레티넘 회원이 말하는
나의 수집으로서 책 구매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나는 책을 정말 그냥 삽니다. 수집이라는 것이 그 물건의 쓰임새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모아두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난 정말 제대로 책을 수집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수집이라는 행위를 꽤 즐기는데, 대표적으로 신발 수집, 에반게리온 관련 물품 수집 등이 있습니다. 책 수집 이전의 수집으로는 영화 팜플렛 수집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관을 꾸준히 갔습니다. 갈 때마다 달라져있는 전단지 진열대에서 모든 영화를 각 한 장씩 빼서 모았습니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꽤 보편화된 수집인 것 같던데, 심심할 때마다 이걸 꺼내보는 맛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책 수집도 그런 영역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일 책을 많이 읽었던 때는 초등학생 때부터 군대에 있던 시절인 24살까지로 지금 29살인 나이로 따져보면 인생의 반을 거의 매일 책을 읽으면서 살았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활자책은 문학 비문학 따지지 않고 다 읽어서 나중에는 교사 전용 서재까지 들어가서 책을 다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 문 닫는 게 싫어서 4층 창문을 넘어 3층에 위치했던 도서관의 발코니로 떨어져 창문을 따고 들어가 몰래 책을 읽었지요. 세콤이 울려서 엄마가 오고 난 뒤로는 선생님께선 나에게 열쇠를 주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냥 말하고 들어오라고요.
책 소유가 시작됐던 건 아마 중학생 때부터 지인들로부터 간간이 책을 생일선물로 받으며 시작이었습니다. 책은 가격대가 좋은 만큼 선물로 주기에 부담이 없지만, 선물을 받는 입장에서는 달랐습니다.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 책들도 받을 때가 잦았던 만큼 저는 책 선물 반려 선언을 했습니다. ‘받을 수 있을 만큼 흥미 있는 책'이라는 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영역이라 아주 친한 지인들만이 무슨 책이 읽고 싶냐 묻고 저에게 책을 사주었습니다. 받았을 때의 기분이 정말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묵직한 무게감과 책마다 다른 종이들의 질감과 그 얇기, 그 냄새.
그렇게 책 소유의 맛을 알고,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자유로워졌을 때 서점을 자주 가는 버릇이 생겼지요. 서점의 건조한 냄새가 풍기는 적당히 조용한 분위기, 점원들의 조곤조곤한 말투, 그것들은 나의 보폭도 듬성듬성 걷게 만들어서 서가 사이사이 책을 구경한다는 좋은 취미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서가에는 유독 다양한 자세의 사람들이 모이는데, 쪼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서가의 낮은 책들을 90도로 허리를 숙여 살펴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책 보느라 힘들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람 구경하기에도 제격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책을 '구경'하다 보니 언뜻 눈에 익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자주 읽은 작가의 이름을 포함해서 옮긴이, 출판사까지 다양합니다. 그것들이 책을 수집하게 되는 맛이 되었다면 이해하실까요?
클래식으로 유명한 알베르 까뮈의(카뮈보다는 까뮈라고 하는 것이 더 맛이 좋습니다) 이방인으로 설명을 드려볼까요? 저작권이라는 것은 원작자가 사망하고 50년이 지나면 소멸됩니다. 고전문학들이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작가가 저작권을 지닌 ‘원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프랑스어 원문판만 저작권이 소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의 번역본에는 각 번역본마다 저작권이 귀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어 원문을 수많은 번역자들의 이름으로 번역을 해서 각각의 출판사가 출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래식들은 번역자들마다 문체나 주석 같은 것들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방인의 번역본을 모두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만, 그 번역의 디테일들이 달라 어썸 하여 세 권 정도를 읽어보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이 출판사 '더 클래식'에서 낸 옮긴이 최헵시바의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의 클라이맥스인 뫼르소의 재판 부분에서 뫼르소는 사형 집행 전 교도소의 신부에게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고 위선적인 면을 꾸짖는 긴 대화가 등장하는데요, 그 대화의 최고조는 신부가 뫼르소에게 다시 태어났을 때 살고 싶은 삶이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며 시작됩니다.
뫼르소는 그 질문에 대해 무시하고 답을 거절하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냥 뭐 잘생긴 입이나 갖고 싶다'며 조롱하기도 하는데요, 끈질기게 신부가 묻자 뫼르소는 '지금 이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이 문장을 '지금 이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혹은 '지금의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정도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최헵시바의 번역본에서는 '지금 이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삶!'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느낌표 하나만으로 뒤로 쭉 이어지는 뫼르소의 내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묘사를 통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도 달라지게 되었지요. 다른 번역본에서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초연한 순교자처럼 묘사한 반면, 최헵시바의 번역본에서 뫼르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애써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굉장한 긴장과 고뇌를 안고 참아내고 있던 한 명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 느낌표 하나만으로 정신없이 뫼르소의 토로를 휘몰아치듯 읽었고 그 뒤에 찾아오는 긴장 이후의 나른함이 정말 최고로 느껴졌던 번역본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말이 좀 길었는데요, 어쨌든 책이라는 것에는 꽤 많은 매력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스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유명하신 일어 번역가인 양억관, 홍은주, 양윤옥 세 분이서 번역을 도맡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 또한 제게 새로운 즐거움의 요소가 되어버렸는데, 양억관께서 번역한 2017년 번역본 '노르웨이의 숲'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 제대로 입문해서 그런지,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양억관 옮긴이일 때 더 마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읽은 '언더그라운드'는 정말 충격적이었고, 색채가 없는 어쩌구저쩌구는 책 자체는 별로지만 문장이 맛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작들은 아마 양윤옥 옮긴이께서 많이 번역하시는 것 같은데 양윤옥 님은 히가시노 게이고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같은 책들도 번역하셔서 그런지 글에 솜털처럼 간질간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이전에는 책 수집의 일환에 '읽기'의 목적이 조금 담겨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못합니다. 물론 구매 자체도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에 두세 권은 꼭 사는 것 같고, 그 두세 권을 전혀 읽지 않지요.
어쨌든 책에는 단순히 책이 전달하려는 '이야기'라는 기능을 넘어 생각보다 즐길 거리가 많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선언 이후로 작가가 전달하려는 ‘이야기’ 또한 예전과 같은 힘을 잃는 것은 아쉬울 수 있겠지만, 오히려 책을 구성하는 다른 위계의 요소들에 눈을 돌리게 되어 나를 자극하는 요소라면 그것들이 전부 수집을 하기 위한 이유가 되지요. 책의 제목이 끝장나게 저릿하다거나, 표지 디자인이 예쁘다거나, 나를 붙잡을 만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전부 수집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 말을 안 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책 수집은 사회적 지탄을 덜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 수집을 더욱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책에 돈 쓰는 걸 아끼지 마라, 같은 말들은 분명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말은 아닐 테지만 나 좋을 대로 해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글을 쓰며 정리해 보니 나는 그냥 수집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니, 또 생각해 보면 수집이 아니라 구매 자체에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