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불안 탐구
눈을 뜬다. 푸르스름하게 물 들어가는 천장을 바라본다. 감색에서 청색으로, 붉은 주홍빛까지 커튼 박스에 걸친다.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다. 시점을 분간할 수 없다. 예전에 겪었던 기억을 회상 중인지, 지금 정말 자다 일어나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하루인지. 하루를 그렇게 불안으로 시작한다.
길을 걷는다. 기억이라면 이제 파란 티셔츠의 배 나온 아저씨가 슬리퍼를 끌며 오른편 골목을 나올 것이다. 골목에서 파란 형체가 불쑥 나오자 즉시 고개를 숙인다. 이건 기억이었어. 더 이상 확인하기 두려워 고개를 푹 꺾어 시선을 인도에 고청한 채 걷는다. 오늘 그럼 오후에 잠깐 비가 올 텐데 생각하며 우산을 챙기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도블록에 떼 지어 움직이는 개미가 보인다.
인파가 유독 많다.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내게 곧장 다가와 주먹을 내지를 것 같다. 지금 이게 내 기억의 회상이라면 어떻게 그런 상황에 대처했는지 기억해내고 싶은데 그런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 온갖 미디어에서 본 호신 방법과 함께 벌어질 일을 상상한다. 어쩌다가 시비가 걸리는 거지? 내가 잘못 뱉은 침이 그 사람의 왼발에 묻나? 내가 하던 전화를 오해하나? 그럼 바로 오른쪽 훅? 그게 아니라면 바로 뺨을 때리나? 겁에 질려 온갖 상상에 위축된 채 아무 일 없이 스터디 카페에 도착한다. 이거 기억이 아닌가?
없다. 과제를 위해 어제까지 작업해 둔 포토샵과 일러스트 파일이 없다. 분명히 다이어그램을 만들어두었는데. 머릿속에 그 다이어그램 생김새가 이렇게 생생한데 정작 파일은 없다. 그럼 지금 기억인 건가? 그 다이어그램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자료와 시간이 들어갔는데 다시 만들 엄두가 안 난다. 지금 이게 회상이라면 빨리 그만두면 좋겠다. 다이어그램을 만들던 때를 회상하는 거라면 내 다이어그램은 만들어져 있을 텐데. 더듬어가며 작업을 진행한다. 만들 방법이나 필요한 자료는 이미 머리에 있으니까 다시 만들 수밖에.
펼칠 일 없던 우산을 휘휘 저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비가 왔어야 했는데 하며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 어라, 집에 온 과정은 기억이 안 나는데 뭐 했지. 천장은 푸르스름하게 물 들어가고 있다.
나는 19년 11월 전역 후 곧바로 편입을 시도하여 예비 번호 1번으로 탈락했다. 직후 20년 3월 복학을 했지만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다시 휴학 후 편입을 준비한다. 두 번째 시도한 편입에서 다시 예비 번호 1번으로 탈락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한바탕 울고 끝난 줄 알았건만, 그 일을 계기로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의 둑이 터진 줄은 몰랐다. 작은 숫자 계산도 믿지 못해서 두세 번 계산하는 건 예사고 내 기억도 믿을 것은 못 되었다. 일정이 생긴 그 즉시 캘린더 어플에 작성해놓지 않는다면 후에 일정을 기억해 내더라도 그것을 의심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저장된 기억에 대한 의심을 넘어서 현재 내 인지와 감각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내가 방금 지나오며 본 편의점 전단지가 실제로 있던 건가 싶어 다시 돌아가서 보기도 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워졌다. 에어팟이나 지갑, 핸드폰 따위의 작은 소지품들이 가방 안 정해진 자리에 없으면 패닉에 빠졌다. 물건도 제대로 정해진 자리에 두지 않는 놈을 무슨 수로 믿는단 말인가.
남이라도 믿었으면 편했겠으나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남을 믿는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 머리에 들어온 정보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감각-인지-해석 3단계 자체를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하다 보니 나는 느릿하면서도 예민한 사람만 되어 있었다.
이미 머리에 들어있던 판단이나 감정도 마찬가지. 내가 무언가에 가진 호감이나 비호감이 근거 없는 감정은 아닐까? 내 머릿속은 그렇게 한바탕 뒤집어졌다.
서두의 글은 실제로 내가 2021년 복학 후 겪던 하루하루다. 복학 전의 매일은 혼란스럽고 공포였다. 몇 번의 공황발작을 겪고 나서야 내 상황의 불안정성을 인지하고 정신의학과에 방문하여 약을 처방받았다. 다만 약물은 복학과 함께 중지된다. 건축학과 특성상 매 수업 시간 동안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는데 불안하다고 자낙스 같은 약을 먹으면 그 이후는 멍-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전부라 과제는 실망스럽기 일쑤였고, 크리틱 때마다 교수의 폭언을 들으면 온갖 상상이 불안을 낳으면서 자낙스를 먹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결국 약을 안 먹기로 결정하면서 불안의 삶을 온몸으로 맞아낸다.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내 결정마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공황장애를 비롯한 불안장애가 더 사람을 외톨이로 만들게 되는 건 결국 타인에게 그 영향을 준다는 점이 영향이 크다. 작은 대화를 할 때도 추억거리를 되짚어보다 내 기억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내 기억이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불안했다. 게다가 공황 발작을 겪으면 숨을 몰아쉬며 책상 아래를 찾아 들어가기 바빴는데 남한테 못 보여줄 모습이라기보다 그 과정에서 같이 있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죄인지. 그 생각만으로도 다시 발작이 올 것 같아 나는 커피를 위한 카페가 아니면 밖을 나가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학 당시엔 코로나 한창이라 원격 수업이 주였기 때문에 나는 더 혼자 굴을 파고 들어갔다. 그렇게 이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어떨까.
보는 불안하다. 겁에 질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온갖 소음들, 간간이 섞인 고함과 비명에 귀가 아프다. 뉴스에서는 연신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된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다가와 주먹을 날릴 것 같고, 현관문의 안전장치들은 약해 보인다. 약의 복용 방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큰 일이라도 날 것만 같다. 집 밖은 온갖 위험 요소로 가득하다.
아버지 기일을 맞아 어머니 집으로 가기로 한 날, 집 열쇠를 잃어버린 보. 집을 잠가둘 수 없으니 불안에 사로잡혀 어머니 집에 가지 못한다. 그다음 날,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불안으로 가득 찬 보의 시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게 상상일 뿐만 아니라 현실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보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다. 보에게 다가오는 사건들은 그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에 더욱 당혹스럽다. 보를 둘러싼 사회는 지속적으로 보에게 폭력을 가하고, 보는 그 폭력을 감내하지 못하면서 도망치는 결정조차 내리지 못한다.
영화에서 불안은 어느 정도 보의 탓인 양 묘사한다. 불안을 핑계로 결정을 보류하고, 보류된 결정이 더 큰 불안으로 돌아온다. 결정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선택 자체를 보류하는 행위. 누군가가 결정해 주기만을 바라고 자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다. 그것은 누구 하나 강제하지 않았다.
유랑 극단 시퀀스에서 보는 연극 장면을 통해 양친을 떠나보낸 후의 이상적 삶을 상상한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연극에 보는 자신을 대입한다. 상상의 연극에서 보는 부모의 애정에 대한 보상이라는 심적 족쇄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정착해 자신의 주제에 맞는 자리를 찾는다.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며 세 아이를 낳는다. 이 연극 장면을 통해 유추하자면 보는 자신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갖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소망인 듯 보인다.
다만 연극은 보의 불안을 상징하는 거대한 홍수로 인해 다시 혼자 남게 되는 보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을 가족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보 앞에 천사가 내려와 보의 죄를 일깨워주는데 이 장면이 보의 상상이라는 점을 참고하자면 보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 보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가? 보는 무슨 죄를 지어 겁에 질렸는가? 그 죄는 겁쟁이 그 자체이다. 겁쟁이로 남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연극 장면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보는 성장 하지 못 한 어른이면서 자신에게 닥친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린이다. 게다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보에게 두 번째 어머니, 세 번째 어머니를 자처한다. 등장인물들이 자처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남들이 결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때뭄에 동등한 위계에 형성된 관계는 없다.
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것은 어머니의 집에 도착한 뒤 벌어지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기업 MW의 연혁을 소개하며 상품과 광고지들을 낱낱이 보여주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보의 주변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업 MW의 상품이자 직원들임을 알 수 있다. 기업 이름 MW는 어머니의 이름 Mona Wassermann의 이니셜이기 때문에 사실상 동일시된다. 하다 못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일레인마저 지금은 MW의 직원이라니? 병적인 공포와 죄스럽게 여겨온 결정 보류가 어머니의 과보호 탓이라니? 두려움만을 느껴온 보는 분노를 느끼기에 이른다.
제일 흥미로운 건 이 영화 내에서 '어머니'에 대한 묘사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바다로 묘사된다. 어머니가 장면에 등장할 땐 계속 바다, 물과 함께 등장한다. '어머니=바다(물)'라는 전제를 염두하고 영화를 보면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첫째로 보의 욕조 장면에서 보는 나체로 욕조에 들어가 영화 내에서 몇 안 되는 편안한 모습으로 쉰다. 그리고 영화의 첫 시퀀스가 어머니의 양수에서 출산되는 아이의 시점으로 보는 장면임을 생각하면 이어지는 욕조 사투 장면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유사하게 구성됐다. 이는 보가 지금 다시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 없음을 뜻한다.
크루즈 여행 도중 만난 일레인 조차 어머니의 영향 안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어머니의 집에서 보게 되는 옛 상품 광고에서 어린 일레인과 일레인의 어머니를 보게 되면서 확인된다.
그의 상상인 연극 장면이 해일을 맞이하며 다시 비극으로 돌아서는 것은 그의 상상조차 어머니의 영향 안에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뒤바꿔놓을 것이라는 생각의 표현이다.
자신의 아들을 '남자' 취급하며 아들이 여자에 관심 갖는 것조차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보의 어머니 모나. 분명 아들에게 큰 사랑을 주지만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보상이 따라오지 않으면 보에게 질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사랑이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가치 판단 자체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자. 영화의 제목인 'Beau is afraid'가 발음상 'Boy's afraid'와 유사하다면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가 소년의 두려움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어른이 되지 못 한 소년이기 때문에 '보'='소년'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영화 내에서 보에게 내재된 주요한 두려움은 남근과 주체성을 향한다. 과보호가 그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고, 질투심에서 비롯된 유전병에 대한 거짓말(성교를 하게 되면 죽는 유전병)이 남근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보는, 소년은 남들과 동등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관계나, 그 관계나.
이 모든 상황은 어머니가 선사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락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족쇄에 묶인 늙은 모습의 보는 그 자체로 아직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늙어버린 자신, 즉 주체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거대 남근 괴물은 어머니로 인해 부풀려진 자아, 또는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책임일 것이며, 즉 동등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두려움. 달리 말하자면 이 두려움만 해결된다면 그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거듭날 것이다.
마지막 장면, 바다의 보트 위에 선 보를 대상으로 하는 좋은 아이 재판. 재판이 이어질수록 보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는 쪽으로 치닫는다. 보는 죽기 싫다며 어머니를 향해 외치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 재판이 보는 좋은 아이가 아님을 결론짓자 절규하던 보는 일순 무언가를 깨닫고 결심한 듯하다. 그리고 보트는 뒤집힌다.
보는 자신이 좋은 아이가 아님을 인정함으로써,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파악함으로써, 아이인 자신은 죽음으로써 불안을 해결한다. 그것은 어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일 수도, 아이로 남고자 결심한 것일 수도 있다. 그 결정이 무엇으로 이어졌든 보는 종내에 자신의 불안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지를 이해했고, 불안의 원천이었던 어머니의 사랑에 다시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사그러들면서 나는 이렇게 불안을 안고 살 수 없다는 걸 어느 시점부터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어른이 될 수 없을 것임을 자각했다. 내게 주어진 책무들, 그걸 해결해 내지 못하면 이 불안들과 계속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라는 또 다른 불안이 내 등뒤에 섰다.
불안이라는 건 모든 공포의 근원이면서, 불안은 무지에서 온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내게 이 상황이 왜 닥쳤는지 모르는 것. 알고 있는 확실한 '사실'보다 모르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집중하기 때문에 불안은 찾아온다. 때문에 그 불안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할 때 불안은 해결될 것이라는 이 영화의 서사는 사실 매우 낭만적이다. 보의 성장기이면서, 모든 이들의 알을 깨고 나오는 행위에 대한 찬사다.
불안 자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겠다. 불안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시각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영화를 봤다면 느꼈겠지만 불안을 안고 산다는 건 매 순간을 호러로 만들어주는 안경을 끼는 것과도 같다. 뇌는 계속해서 위협을 상상할 것이고, 몸은 그에 맞춰 긴장해야 되기 때문에 호러 영화는 끝나기라도 하지 그러한 안도감도 없이 하루를 지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나도 낭만적으로는 생각은 해보겠다. 지금이 불안이 '소년'이기에 겪어야 하는, 데미안의 알 깨기 고통과도 같은 것이라면 찬찬히 더 두드려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