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산대폭발 Aug 23. 2024

섭섭한 일들

20대 마지막에 선 내가 만화가 완결되었을 뿐인데 이렇게 슬플 리 없어!

 슬픈 일이 있습니다. 쿠이 료코의 '던전밥'이 14권을 끝으로 완결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신간 출시 알림 메일을 받을 때마다 홀린 듯 결제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렇게 나를 던전 속에 살게 했으면서, 그 수많은 캐릭터들과 친구과 되었는데 완결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흘러가지 않을 만화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이미 완결에 대한 소식은 들었고, 내용이 최종장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일은 갑자기 다가오는가 봅니다.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더욱 애달프게 느끼고 싶어서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이 만화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만화를 알게 된 몇 년 간 참 다양한 일들이 스쳐갔기 때문에 더욱 애틋한가 합니다.


 올해부터 저는 5호선을 타고 마곡으로 향하는 약 40분의 여정을 더욱 알차게 보내고자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하철은 꽤 좋은 독서의 장입니다. 물론 서서 읽지는 않습니다. 종로3가역에서 탑승하면 아무리 자리가 없더라도 승객들이 대부분 광화문, 혹은 공덕에서 우르르 내리기 때문에 매번 앉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앉으나 서나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앉아서 책을 펼치면 옆 사람과 닿지 않기 위해 긴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하철 내부는 분명 시끄럽지만, 조용히 해야 한다는 그 어떤 사회 규범을 벗어날 시 쏟아질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어 더욱 조용히 하게 됩니다. 공간 경험으로 따지고 보면 도서관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몸은 도서관 모드로 돌입해 책을 읽습니다. 지금쯤 어느 역일까, 고개를 들다 맞은편에 책을 읽고 계시는 다른 승객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 책의 제목을 괜시리 볼까 싶다가도 실례인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괜히 따뜻한 마음이 솟는 경험을 하다 보니 더욱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최소 하루 한 시간 반의 독서 시간이 주어진 덕에 오랜만에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술꾼', '솔라리스', 'H마트에서 울다', '쓰기의 말들', '듄', '이처럼 사소한 것들' 등.. 하지만 '이선 프롬'을 지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당도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아득한 문장에 살짝(사실은 진짜 벽처럼 느껴질 만큼) 질려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만화책이었습니다. 집에 글책보다도 많이 쌓인 것이 만화책이었고, 숙제처럼 느껴지던 참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자기 전에 가방에 만화책 두 권을 챙겨 넣습니다. 가는 길에 한 권, 오는 길에 한 권. 하루에 꼭 두 권을 읽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두 권씩 읽더라도 쌓인 만화책 해치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읽다 보니 관심 가는 만화들이 또 생기고, 또 사고, 또 찾아보고, 이 행위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만나게 되는 세상들은 후회는 없을 만큼 정말 굉장했습니다.


 머리 묶는 법 열두 가지를 알려주는 '아주 약간의 변화'에서는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나를 더 아껴주는 기분이 든다,는 멋진 말을 듣게 되어 핸드폰에 저장을 했지요.

 액션 만화의 정석이라 들어왔던 '무한의 주인'에서는 격정적 연출들의 연결이 매끄러워 어떤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로 아찔했습니다.

 때가 되면 돌아와 SNS를 한 번 휩쓸고 가는 쿨미녀 '토미에'에는 정석적 연출이 만들어낸 몰입과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필연적이지만 우악스러운 방식으로 '토미에'라는 캐릭터의 매혹성을 만들어내는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회자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매번 나를 애걸복걸하게 하는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는 취향의 다양성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귀여운 그림체, 복잡 미묘한 고등학생들의 애정 이야기, 거기에 끼얹은 동양 오컬트는 그 교집합이 좁은 만큼 바늘처럼 깊숙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볼 때마다 애틋한 애정에 몽글해졌다가 바로 다음 장면에서 께름칙한 소름을 유발하는, 때가 되면 1권부터 다시 읽는 작품입니다.


 집에 쌓인 만화책을 다 읽을 즈음 알라딘에서 추천으로 올려준 만화책이 있습니다. 한 번 클릭해 보니 최근 SNS에서 많이 보았던 그림체였습니다.


이토 준지 같은 미려한 그림체에 덩이줄기니, 촌스러운 고구마 답답이니 하는 귀여운 대사의 향연. 저는 고민도 없이 즉시 와야마 야마 작가의 책을 전부 샀고, 며칠을 그 매력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후회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와야마 야마 작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세심한 관심과 관찰을 통한 애정에 대한 묘사는 나를 지하철 흐뭇남으로 만들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지만 또 그것 때문에 힘을 얻는 이야기, '동인녀의 감정'은 또 어떻고요? 그토록 좋아하는 무언가를, 앞서 말했듯 취향의 다양화 시대에 찾아냈다는 것은 무척이나 대단한 행운입니다. 나는 그것을 찾았을까요?

 '슈퍼 뒤에서 담배 피우는 두 사람'은 유치한 스토리라인과 연출은 아직까지도 힘을 갖고 있구나, 나름의 기능이 있구나,라는 걸 여실히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쓰다 보니 무슨 만화책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가 싶긴 한데요, 저는 이렇게 만화를 읽으며 만나게 되는 세상에 대해 괜히 나의 조각들을 하나씩 떼어두어서 애틋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슴으로 키운 딸 '요츠바'를 3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어 생각나면 아련하고, 도서관을 지나칠 때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모임에는 언제쯤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진심으로 고민하는 나입니다.


 마음을 준 모든 것들은 떠나가기 마련입니다. 두 팔 벌려 봄을 알리던 목련은 바닥에 거무스름하게 누웠고, 매화는 반길 새도 없이 떠났고,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던 벚꽃은 없는 자리가 더욱 휑합니다. 이팝은 솜털처럼 날리다 사라지겠지요.


 건우는 작년에 혼인 신고를 마쳤습니다. 궂은일 모두 함께해 주지도 못했는데 다음 주가 결혼입니다. 나는 받은 것 돌려주지도 못하고 친구를 보내는 것만 같습니다. 청첩장을 주겠다고 평일에 굳이 올라와 한껏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답잖은 케찹 글씨와 벽에 그려진 낙서들이 별것 아닌 것에도 귀청 떨어져라 웃어대던 우리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섭섭한 마음 한구석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민용이 만들어주는 로스트 덕 에그누들을 찍으면서도 나는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친구가 요리를 해주고, 정말 맛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그 음식이 내가 되고, 나는 또 하루를 살아내고.



 각자 한 손에는 맥주를, 한 손에는 윤슬을 잡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친구들과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만요. 쭉 이대로만.



 고등학교 때 그렇게 찾아가던 안전빵은 이젠 사라졌습니다. 간판이 웃기다며 킥킥대며 창 앞을 서성이다 4개에 천 원이라는 푯말에 아무거나 막 집어먹고는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때가 같이 사라졌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담아주기 바빠 그 와중에도 많은 시선이 교차하는 가족들 틈에서 나는 계속 경이 아들이고 싶습니다. 병무와 선애의 손주였으면 좋겠고, 인영과 훈의 조카였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행복한 일들이 섭섭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사라진다고 애환에 몸 구를 만큼 마음이 격렬한 것은 아닙니다만 섭섭할 뿐입니다. 이 순간들이 아쉽고 애틋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잘 지나쳐 보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이전 08화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양자택일 극단적이야 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