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우'와 공동체 의식의 부재
무리에 섞여 있을 때면 나는 좀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각자 단어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든지, 이 상황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든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란 대로 해줬는데 왜 딴 소리인지, 같은 것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듯 한 사회적인 통념도 그 기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여지껏 사회에 섞일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건 일찍이 이런 기질을 알아본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물어보면 어머니는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지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말고. 적어도 눈치는 빨랐으니 이해는 못 해도 남들 따라서하는 일에 불편함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기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내 생각 대로 그냥 행동해 버린다면 그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지 겁부터 먹는다.
이 영화는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두 느껴봤을 근본적인 물음.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필요한가? 언제까지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자체에 반성을 느껴야 할까?
주인공 쥐스틴은 수재, 천재다. 대학교에 갓 입학해 학교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신입생인 막내딸 쥐스틴을 부모는, 본인들이 졸업한 학교이니 제일 잘 아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하라며 아무도 없는 황량한 주차장에 떨구고 제 갈 길 간다. 쥐스틴은 그래도 혼자 해낸다. 남들이 보기에 재수 없을 정도로 혼자 잘 났고 혼자 잘 산다. 쥐스틴은 말 그대로 사회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기능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 잘 즐기고 있는 신입생 파티에서도 쥐스틴은 겉돌고 흥미를 못 느끼며 그냥 빨리 자고 싶을 뿐이다.
남들에겐 어려운 학교 시험도 "너무 쉬운 문제인데 왜 그러냐"며 반문할 정도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족하다. 타인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껴봤으니 행동에 거침이 없고 사족이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을 느껴본 적이 없다. 자신의 행동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적 없었기 때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냥 그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쥐스틴에게는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예시로 식당에서 불친절한 점원에게 화도 안 내고, 채식주의자임을 어필하며 받아온 으깬 감자에서 고기 덩어리가 나와도 문제를 제기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앞으로 안 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대학이라는, 그것도 도 넘은 공동체 의식을 강요하는 집단에 들어가게 되면서 쥐스틴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눈 깔고 야한 옷 입고 다니라는 선배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모욕적이게도 기저귀를 바지 위에 차고 다니란 것에 순응한다. 대학 선배인 친언니가 하라는 대로 야한 옷도 입어보고, 제모도 해 본다. 그렇게 공동체에 섞이면서 남들의 욕망을 조금씩 목격한다.
쥐스틴의 행동 양식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건 '식인'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부터다. 식인, 극단적이게도 식인이야 말로 타인이 필요한 것 아닌가. 타인의 필요성을 인지한 쥐스틴은 그제야 언니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영화에서 식인은 욕망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연결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쥐스틴에게 첫 식인의 경험은 자신의 언니인 알렉시아의 손가락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에 휩싸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애정 상대가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가락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충격적이다. 딜레마를 겪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욕망이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충족해야 하는 것인가? 그 자기반성의 여부가 식인 선배인 언니 알렉시아와의 차별점이다.
알렉시아는 자신의 식인 욕망을 이미 자신의 근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받아들였다. 아주 능숙하게 식인 욕구를 채운다. 되려 동생인 쥐스틴에게 속성 강의로 체험시켜 준다. 다만 자신을 인정하는 것과 타인을 해치는 것에 대한 반성은 다른 것일텐데도 알렉시아는 욕망 충족에 자기반성은 이제 없다.
영화에서 내내 등장하는 자기반성 없는 욕망 충족은 쥐스틴에게 충격이자 궁금한 미지의 세계로 인식되지만, 관객에게는 불쾌한 문제로 다가온다. 언니 알렉시아는 고의적으로 차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죽인 뒤, 그 사람을 먹는다. 트럭 운전수들은 운행 중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술을 마셔도 아무 죄책감이 없다. 되려 한 운전수는 자신은 어릴 때 돈도 없고 공부도 못 해서 그런 거라고 수의대학생인 쥐스틴과 쥐스틴의 룸메이트 아드리앙을 힐난하며 위안 삼는다. 그 아드리앙도 문제 많다. 아드리앙은 쥐스틴과 같이 쓰는 방문 앞에서 연인과 성교하느라 여념이 없다. 오히려 쥐스틴이 방문을 열어 그 장면을 들켜도 사과는커녕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다시 방문을 닫을 뿐이다. 오히려 식인을 원하더라도 자신의 행동과 욕망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쥐스틴이 훨씬 인간답다.
쥐스틴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은 타인 없이도 완벽하다 여겼다. 사회적 동물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식인'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타인을 필요로 하게 되고, 사회적 동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자기 반성을 동반하는 욕망은 죄악시될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욕망 충족을 위해 각자 서로를 이용하고 있고, 그를 위해 남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행동이다. 오히려 우리는 남을 이용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알렉시아를 보면서 잘못 됐다는 생각을 한다.
쥐스틴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그것을 실현시켰을 때에서야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욕망 실현에 타인이 꼭 필요했음을 말하면서 영화는 또다시 자신의 존재 의의에 타인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식인이라는 소재로 욕망의 발견, 자기반성 및 자아 성장이라는 진부할 수도 있는 주제를 충격적이고 매혹적이게 풀어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당시에는 '우리 가문에 걸린 저주야!'라는 식의 묘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결국에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상처 입혀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렇게라도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