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과 그로 인한 인간 관계 반성
중학교 지망을 적어내는 초등학교 6학년 졸업 시즌, 그때 집 주변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중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1 지망으로 적어낸 그 중학교에 들어갔다. 드디어 제2 외국어를 배우는 2학년이 되기 전, 반 편성을 위해 희망 제2 외국어 조사지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일본어는 없고 한자와 중국어만 있었다. 내 생각에 한자나 중국어나 같은 거 아닌가 싶은데, 차라리 말하는 거라도 배우자고 중국어를 선택했다. 딱 한 반 정도만 인원이 나왔고, 그렇게 편성된 중국어 반은 2년간의 제2외국어 수업의 편의성을 위해 그대로 3학년까지 쭉 같이 지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은근한 행운이었던 것 같다.
원래 있던 일본어 교과 반은 문제아들이 모이는 집합소처럼 변모해 버린 탓에 일본어, 중국어, 한자 중 일본어 교과를 폐지했다는 어른들의 사정이 있었다는데, 그거야 어른들의 사정이고 일본어 반이 없어지니 문제아다 싶은 애들은 왜인지 당연하게 중국어 반으로 몰렸다. 완전히 다 들어온 건 아니지만 학년 문제아 중의 반절은 중국어 반이었다. 처음엔 참 싫었다, 그게. 그것 때문에 담임 선생님도 지독히 무서운 체벌 왕 체육 선생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애들도 새로운 반이라는 사실에 긴장해 있었다. 쉬는 시간에 간간이 찾아오는 닭벼슬 세운 무서운 형과 아이라인 짙은 누나들, 담요 두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담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러 오는 버섯머리 여자애들, 키는 겁나게 작은데 와이셔츠는 갈비뼈가 보일 것처럼 딱 붙고, 바지통은 내 팔뚝만 한 교복을 입은 남자애들. 그런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가는 우리 반 소위 문제아들의 표정은 쉬는 시간에만 갑자기 밝아졌다. 나머지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의식하며 잔잔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듯했다.
한두 달이 지나니 반 전체가 두루두루 친해져 있었다. 어쩌다 모두가 그렇게 친해졌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어느 순간 눈을 돌려보니 얘네들도 선생님한테 맞는 거 싫고, 슬프면 울고, 좋아하는 이성한테는 집착도 하는 15살 애기들이었다. 적어도 '그런 애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애들은 아니었다.
2년을 같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서 그랬을까? 내 기억에 결속력도 다른 반들과는 남달랐다. 개중엔 초반에 괴롭힘을 받은 친구도 분명 있었으나, 나중엔 그 아이들을 챙길 필요도 없이 어련히 알아서 다 두루두루 잘 놀았다. 속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가 웃으며 대화할 수 있었다.
다시 긴장상태였던 학기 초를 떠올려보자. 다들 긴장한 상태였으므로 얼굴만 알고 잘은 모르는 아이라도 옆에 끼고 대화를 나누던 그런 학기 초에 꼭 혼자 가만히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키도 이미 다 커서 당시 나와 비슷하고, 교복은 딱 맞았는데 오히려 다 자라 버려서 딱 맞았던 것 같다. 그 불편한 나무 의자에서도 자세는 또 어찌나 발렀는지, 높게 묶은 머리칼이 떨어지는 선과 몸통이 평행이었다. 그냥 괜시리 신기한 친구네,라고 생각했다.
첫 중국어 시간이 시작되고, 첫 수업은 성조를 배우고, 듣고, 말해보기. 네 가지밖에 안 되는 성조였는데도 개념을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바른 자세의 말총머리 그 여자애가 그걸 그냥 다 한 번에 잘해버렸다. 물론 반 아이들이 알아차렸던 것은 아니고, 중국어 선생님과 같이 왔던 원어민 선생님이 알아차렸다. 자리에서 일으켜 중국어 어디서 배웠느냐,라고 선생님이 묻자 그 아이는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것 아닌가?
당연히 중국어 시간이 끝나자마자 그 친구 자리는 엄청나게 붐볐다. 중국인이었느냐, 왜 한국에 왔느냐, 언제 왔느냐 온갖 질문 세례가 있었고, 난 곁에서 고개 빼고 잘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차 한국에 오느라 가족이 전부 같이 넘어왔고, 그때가 본인이 중학교 1학년 때였다고. 온 지는 1년이 아직 안 됐다고 했다. 그런 것치고는 말을 너무 잘했다. 나는 교과상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영어를 배웠을 텐데도 저렇게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했는데. 친구들끼리 신이 나서 서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나도 같이 교환을 했다.
그 친구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학기 초 말고는 별 흥미를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무 한국인 같아서. 시쳇말도 잘했고, 성조 섞인 말투도 없었다. 그렇게 나도 그 사실을 잊고 그 친구와 참 친하게 잘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그 친구가 답장이 'ㅋㅋㅋㅋㅋ 구라 치지 마' 이렇게 왔다.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때 당시 핸드폰인 오렌지 폰에 뜬 화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확히 'ㅋ' 다섯 개에 '구라 치지 마'. 그때 받았을 때는, '얘 중국인이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문자를 받았을 때서야 내가 진정으로 그 친구와 친해졌던 것 같다. 내가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그 친구를 외국인이라고, 나랑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ㅋㅋㅋㅋㅋ 구라 치지 마'라는 문자를 보내는, 나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아이라고 그제서야 인지했다. 그 외에도 체육대회 때는 앞머리 날아갈까 봐 고개 숙이며 달리던 모습. 여자애들끼리 꼭 화장실을 같이 가던 모습.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하던 모습들을 보고도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더라도 진정으로 내게 누군가의 진실된 모습을 알아차릴 준비가 안된 것이라고, 조금 더 일찍 그런 장애물을 걷어낼 수 있었더라면 내 인간관계가 어땠을지 요즘 더 많이 생각이 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남들이 인정하기에도 중학교 이후의 나는 '인싸' 삶을 제대로 살았다. 여기서는 '까불댔다'는 표현을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중학교 때의 경험이 행운이라고 느끼는 건 이것 때문인데, 그때가 내게는 아이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는 계기가 되어서 처음 본 사람을 마주할 때 어떠한 긴장도 없었다.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면 되니 아니다 싶은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고, 누군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번쩍 나서서 나름대로의 상담사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고민거리도, 아이들의 지적인 능력치나 육체적인 능력치도 다들 고만고만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건 은연중에 나에게 어떤 자만이 되었다. 그냥 아이들 수준이 비슷한 것일 뿐인데 내가 이 애들보다 더 낫다,라는 선민의식도 좀 있었던 것 같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당돌한 놈이었다. 그 자만은 당연히 수능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운 좋은 성취를 통한 자만은 실패 후에도 내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뭐든 제대로 노력하지 않고도 가져왔던 내가 수능에서 무너져보니 노력에 배신당했다는 말은 넌센스였다. 노력을 안 하고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 난 결국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배신당했던 것이다. 내가 입 밖으로 '난 내 자신을 배신했어'라는 말을 꺼내면 '난 특별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 될까 봐 그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남들보다 뛰어난 나'를 찾고 싶어 하는 내가 성적에 맞춰 입학한 대학에서 맘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건 당연했다. 왜냐면 나는 어쨌든 이 학교를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한 번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정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하지만 시도했던 반수도, 두 번의 편입도 모조리 실패했다.
당시 편입에 실패하고 학교에 다시 복학할 때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이번엔 학교생활 좀 제대로 해보라고. 애들한테 정도 좀 붙여보고, 만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나에겐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 나를 지탱하던, 그 근본 없던 자신감이 전부 무너지고 난 뒤에 마침내 내 두 발로 뛸 시작점이 된 선이었다. 내 마음속으로는, '고등학교 시절의 신재현을 불러보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그 정도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열심히 살았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느냐,라고 하면 전부 열심히 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최근 2년은 열심히 살았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많이 참았다. 사람들 앞에서 가면 쓰고 광대짓도 열심히 했다. 예전이었으면 싫은 애가 아는 체하며 다가오면 얼굴에 철판 깔고 '누구세요..?'라며 모른 척 연기했을 텐데, 이제는 먼저 다가가서 인사도 하고, 술자리도 마련하고, 별스럽지 않은 얘기도 웃어줘 가면서 지냈다. 처음엔 이게 참 곤욕스럽고, 집에 오면 바로 잠들어버릴 정도로 피로했는데, 슬슬 학교 친구들이 날 찾고, 불러주고, 밥 먹자고 하는 것에 꽤 내 마음이 많이 동하고 있더라. 내가 이렇게 사람을 많이 타는 줄은 또 몰랐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스스로 이 친구들에게 '외국인'인 양 행동하고 있었더라는 걸. 소통하려는 자세 없이 단절을 위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걸. 그러다가 이 영화를 만났다.
길게 이 영화에 대해 썼다가 전부 지웠다. 너무 소중한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하는 것조차 평가가 될까 조심스러운 것처럼,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소중하다. 괜한 한 마디 말을 평가랍시고 궤에 올렸다가, 이 영화가 그 궤에 따라 올라 나에게서 멀어지는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영화라면 좋겠다. 때문에 단지 내 주관적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만을 남겨두겠다.
'서래'는 중국인이다. 독립운동 유공자의 손녀이지만 중국인으로 자랐고, 어머니가 죽을 때에서야 어머니의 진정한 바람을 알고 한국으로 밀입국했다. 당시 한국으로 밀입국한 서래를 도와줬던 남자 '기도수'와 결혼했고, 평소 암벽 등반을 좋아했던 기도수는 산에서 떨어져 변사로 발견되어 '해준'이 수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해준과 서래는 만나게 되고, 해준은 이유도 모르게 호감을 가진다.
이 영화에서 해준은 서래를 만나자마자 호감을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모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첫 만남 이후로 해준은 서래에게서 어떤 동질감, 이성적 호감, 그리고 작은 것에서도 손발이 맞게 되는 경험들을 한순간에 마주하게 되는데, 내가 보기엔 이러한 작은 연계로 이미 해준은 서래를 동류로 인지하고 있었다. 해준은 서래를 '외국인'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
서래도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 서래는 자기 방어에 대한 수단으로 해준을 대하고 있었고, 그러한 모습은 영화 1부의 마지막에서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둘의 첫 만남에서 서래 본인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어가 부족하다고 말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후에 수사 과정 중에서 (서래의 주장으로는) 본인은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말을 들으면 일단 웃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불통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이후로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서래가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그냥 웃어넘기는 법이 없이, 해준과의 대화에서 서래는 모르는 말이 나오면 다시 되묻는다. 그것은 서래 또한 해준과의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해준과의 대화 내용에서 놓치는 부분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1부의 마지막에서 해준이 모든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서래에게 속마음을 토해낸다. 서래 또한 심각한 상황임을 알고 있음에도 해준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여자에 미쳐서,라고 말할 때- 서래는 그냥 웃는다. 다시 되묻지 않고, 상대방의 붕괴된 얼굴 앞에서 그저 웃어넘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서래는 이미 모든 것이 들통났고(후에 이루어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녹음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해준과의 대화는 중요하지 않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자에 미쳐서'라는 말을 못 알아 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전부 드러난 마당에 서래에게 상대방의 말이 마음에 닿지 않고, 그저 귀만 거치고 나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서래 스스로가 '외국인'임을 자처하는 순간이다.
결국 앞선 이 둘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서래의 소통 의지 여부에 있는 것이다. 서래는 그와의 소통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통한 이득을 위해 소통을 '이용'했기 때문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서래는 그래서 그를 떠나보낸 뒤에야, 그가 나에게 무해할 것이라는 것을 확인받은 뒤에야 녹음을 다시 들어보고, 그제서야 사랑에 빠진다. 해준이 진심으로 내뱉은 말은 그제야 서래에게 닿았다.
서로 같은 입장이 아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외국인이어서’ 소통이 한 박자 늦었을 뿐인데, 서래는 그 이후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되었다. 관계는 즉시 역전되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자연물들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 내에서 안개의 역할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 경계면으로서의 역할에 있다. 관계 단절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요소다.
우선 가상의 도시 '이포'의 경우, 해준의 아내 '정안'이 일하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도시이면서 매일 안개가 껴 아침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된다. 이포는 대외적으로는 매우 위험천만한 곳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다룬 드라마, '적색경보'에서는 파괴되어 가는 원전의 절박한 두 남녀 모습이 중국인들에게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정작 이포에 사는 사람들은 해당 드라마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감을 조장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라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밖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괴리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도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형사로 일하는 해준은 주말마다 정안과 함께 있기 위해 이포로 가지만, 이포로 향할 때부터 본인이 서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과 본인이 겪은 사건 사고들에 대해 감추고 숨기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아내 정안 또한 의도적으로 '이주임'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정보는 숨기고, 불평한다. 셈 많고, 험담을 잘해 너무 싫다는 양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해준에게서 도망칠 때는 '이주임'에게 간다. 영화 후반에 이포로 이사 오는 서래 또한 자신이 해준에 대해 가진 마음을 숨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겉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도 마찬가지다.
초반에 제일 중요했던 산. 초반의 구소산은 그 자체로 감내해야 할 고난이다. 이것은 해준과 서래를 만나게 한 결정적인 계기이면서도, 그 둘을 갈라놓게 하는 가장 치명적인 고난이다. 해준은 구소산에서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할 때만 구소산에 방문하고, 서래를 만나고 나서는 사건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구소산에 대해 언급하거나 방문하지도 않는데, 이것은 해준 스스로가 이미 이 관계는 위태롭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해준이 가진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구소산을 다시 찾게 되고, 거기서 본인을 지탱해 주던 단 하나의 믿음조차 구해내지 못하게 되면서 구소산은 고난으로서의 의미를 견고히 하게 된다. 관계 속 도사린 위험 요소로서 기능한다.
후반의 호미산은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꿈과 같은 환상의 공간으로 의미를 가진다. 구소산이 해준에게 고난이었다면, 호미산은 서래와 해준 둘 모두에게 꿈이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둘의 의미가 다른 것이, 서래에게 호미산은 독립유공자 할아버지가 남긴, 자신이 한국에 있어야 할 명분과 의미를 제공하는 자신만의 공간이면서, 한국에 찾아오게 만든 직접적 원인이다. 말 그대로 꿈의 공간, 목표로 삼은 공간이다.
해준에게 호미산은 그러한 꿈의 공간에 초대받은 외부인으로서 진정으로 서래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공간이지만, 정작 호미산을 나선 뒤에는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는-"여기는 눈 안 내렸어?"라는 대사로 확인할 수 있다-공간인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마치 꿈처럼 환상적이지만, 부여잡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진실된 관계의 환상성을 뜻한다.
그리고 바다. 다른 자연물과 다르게 이 둘의 사랑을 돕는 '단일한' 요소다.
이 영화를 열 번 가까이 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눠보았을 때, 주변인들은 서래의 살인이 들통났기 때문에 서래가 죽으러 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첫 번째로, 서래는 이미 호미산에서 해준에게 자신은 미결 사건으로 남아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라고 말했다. 미결 사건으로 남아야만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해준은 서래에 대한 사랑의 조건으로 자신의 자부심을 말했고, 자신이 붕괴되어 버린 이상 서래를 사랑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해준에게 자부심이란 사랑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서래 또한 이 말을 뼈저리게 이해했고,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 사랑의 전제조건을 지켜야만 함을 느꼈을 것이다. 해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 삶은 이미 지옥이다. 서래는 해준에게 이미 심증적으로 남편을 두 명이나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다. 이에 대해 서래는 자기 자신을 불쌍한 여자다,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포로 왔더니, 정작 해준은 왜 왔냐고 되묻고, 그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서래가 피의자 정도는 되어서야 응해주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한 것이다. 서래는 이 사랑이 익히 아는 형태로는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래는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이다. 자신이 미결 사건으로 남게 되면, 해준은 나를 기억할 때, 나를 사랑할 때 자신의 자부심도 지키면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바다는 이 둘의 사랑을 돕는다. 서래는 미리 바다에 와서 만조 때의 수위를 확인하여 본인이 사라질 자리에 나무 막대를 꽂아두었고, 차에는 까마귀를 묻어주기 위해 땅을 팔 때 쓰던 그 청록색 양동이를 이젠 서래 본인을 묻기 위해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착실히 모래를 파고, 자신만의 모래 산을 만든 뒤 그 안에 들어가 꼿꼿하게 앉아 기다린다. 자신의 사랑이 전달되기를. 그 모래 산은 이제 사라지는 자신을 그래도 기억해 주길 바라는, 찾아주길 바라는 귀여운 마음일 것이다.
바다는 빠르게 도와준다. 서래의 사랑이 완성되기를. 게다가 너무나 낭만적 이게도, 서래는 마지막까지 해준의 사랑을 확인받는다. 해준이 서래를 찾아 뛰어다니다 지쳐 서래가 만든 모래산 위에서 그녀가 녹음해 둔 자신의 음성을 들을 때, 시점 쇼트로 아래에서 위로 보여주는데, 이것은 서래가 끝까지 해준을 바라보고 있다는 묘사이며, 자신이 사랑을 말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음성 메시지로나마 사랑한다고 답을 듣는, 너무나도 완벽한 사랑의 소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둘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해피 엔딩이다.
바다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은 숭배되어 마땅하다. 바다, 사랑에게 상대방의 흠(서래의 핸드폰) 따위는 잠겨 사라질 수 있다. 그런 사랑에 나 또한 바칠 수 있다.
영화는 산과 바다를 이용해 완벽하게 사랑을 노래한다. 기도수 집의 벽지에서 산이 모여 바다의 형상을 이루는 것처럼, 고난(구소산)과 꿈(호미산)들이 모여 사랑(바다)이 된다는 이 영상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고난이 있으면 환상적인 아름다움도 있는 사랑에 무엇이든 바칠 수 있다는, 사실상 사랑에 대한 헌사다.
소통이라는 건 그렇게 소중할까? 한 사람은 소통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결국 붕괴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자연의 힘을 빌려 죽을 정도로 소통이란 건 그렇게 거대한 의미를 지니나? 이 영화에서 제일 극명하게 드러나는 관계의 장애물은 자연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가장 관계를 돕는 것도 결국 자연이다.
난 이 지점에서 최근에 뼈저리게 느끼던 것을 다시 한번 마주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면 소통의 타이밍이 좋지 않아 미뤄졌던 인간관계의 지점은 얼마나 많았나. 혹은 스스로 얼마나 많은 안개를 두르고 살았던가? 피로하다는 이유로, 재미없을 것이라는 나의 발 빠른 오만으로 흘려보낸 인간관계들은 수없이 많았다.
내가 서래라거나, 해준 같은 등장인물들에게 이입을 했던 것은 아니다. 애시당초에 영화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기도 하고, 몰입을 했다면 현대인으로서 몰입을 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어떤 품위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소통의 방식을 잃어버린 현대인.
이게 비단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혼자가 편한 건 사실이고,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긴장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달라진 것은 없으나, 문득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내가 인간관계 싫다,라고 말하는 건 결국에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도 더 인간관계를 신경 써야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난 그렇게도 인간관계를 의식하면서 살아서 그 피로감에 그냥 다 놓아버렸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거다. 지금이라도 그걸 알아차렸다는 지점에서 어쨌든 나도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 있지는 않을지. 그런 생각에 눈물이 났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