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과 다시 한번 자기반성
안녕하세요, 2023년이 어느덧 2주가량 남았습니다. 저는 상경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글을 수정하는 지금은 이미 상경을 완료했습니다) 글을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지금은 이사를 고민 중입니다}
아무래도 2023년을 마무리하면서 목표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저에게 그것은 바로 15키로 감량과 졸업 작품 통과였습니다. 졸업 작품은 아무래도 난관이 몇 개 있었으나 될 대로 되라지 마인드가 함양된 후로는 오히려 가뿐하게 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가끔 제 모형이나 졸업 작품을 마주칠 때마다 '새끼, 왜 이렇게 못 생겼나' 싶은 걸 보면 애정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체중 감량은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졸업 작품을 가뿐히 넘고자 준비하면서, 체중도 가뿐히 10키로 가량 증량하게 되었고, 25키로 감량으로 목표를 높여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해를 맞이하기도 전에 포부가 큰 사람이 되었으니 다행이겠습니다.
23년은 저에게는 꽤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점철되었던 해입니다. 힘들고 아팠던 경험은 내부의 오해를 경유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에게 오해와 편견이 없었더라면 2023년은 조금 더 내실이 강한 해였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해와 편견이 없다면, 나는 나로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해와 편견은 결국 사고회로의 고속도로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니까요.
오해와 편견이라고 폄하될 수 있는 나의 사고회로는 결국 내 삶 내지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얻어낸 결과들의 공통된 일부분들을 축약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 판단들에 대해 나는 어떻게 보자면 감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을 판단할 때도 오해와 편견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는 빠른 사고를 위해 사람들을 오해하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쓸모없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행위를 보고 그것에 대한 원인을 내 오해와 편견을 통해 유추합니다. 그렇게 산출된 원인이 나의 긍정적 행위 판단 기준에서 멀어진다면 그들을 괴물로 만들고 거리를 두는 것이죠. 난 그럼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 멀리하는 대신 손해 볼 가능성을 제로로 수렴시킬 수 있으며, 그들의 진실된 모습을 알고자 노력하는 에너지를 투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물의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나'와 너무나 다른 것, 비교 대상으로서만 기능하는 것. 괴물의 조건은 괴물이 주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괴물은 타자여야만 합니다. 괴물은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괴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그를 괴물이라 불러야 비로소 괴물이 됩니다.
영화 '괴물'은 오해와 편견으로 구성된 어른들의 시선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바라보는 세상을 벗어나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더 착잡한 마음으로 봤을 것입니다. 나는 보통 사람들을 쉽게 괴물로 치부하며 살아왔거든요.
어른들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으로 구성된 이야기. 나는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봤어야 했던 걸까요?
영화는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일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아이를 위해서인 어머니의 시선에서 아이를 봅니다. 어머니의 시선에서 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어머니의 시선에서 나의 아이는 '약한 아이', '순진한 아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들과 같은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점점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이상한 말을 하고,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오고, 다쳐있습니다. 달라져 가는 아이의 모습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도 그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누구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학급의 담임, 호리 선생으로부터 안 좋은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학교로 곧장 달려가 선생들을 나무랍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해결책이나 변화를 요구하는 것 말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어머니는 학교로부터 적당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니 점점 사건의 중심에 스스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아이의 학급 친구, 호시카와 요리를 만나지요.
영화는 호시카와 요리를 의도적으로 왜곡된 시선을 통해 바라보게 합니다. 호시카와 요리는 일반적인, 그러니까 편견에 의한 아이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내 아이의 신발을 집에 가지고 있는 요리.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요리, 분명 괴롭힘을 당했으면서 호리 선생이 폭력을 행사했다 진술하는 요리, 어딘가 조숙한 듯하며 섬뜩한 구석을 내비치는 요리, 자신의 아이를 괴물이라며 치료가 필요하다는 요리의 아버지. 이런 어른들의 시선을 교차하면서 보는 우리는 '요리, 그 아이가 괴물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 아이를 이미 괴물이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후에 밝혀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그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고, 내게 남은 건 슬픔뿐이게 됩니다. 나는 아이가 괴물이 되는 데에 일조한 어른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이 야기하는 불행에 대해서는 눈물 흘리며 아파하거나 화를 내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을 통해 발생하는 슬픔에 대해서는 냉철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잘못에 대해 슬픔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불행이라고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야기된 불행에 슬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영화의 종극에 아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찾고 자유로워지는 그 장면에서 어른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햇살 아래서 모든 곳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웃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 나는 없습니다. 진정한 '나'를 위한 공간에 타자화될 수 있는 대상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갖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난 곳에 나는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괴물입니다. 그들을 몰아넣었습니다.
내가 그 장면에서 진정으로 슬퍼하기 위해선 나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구조가 이랬기 때문이야, 라며 타자화하면서, 메타인지인척하며 발을 빼기 바쁩니다. 나는 괴물입니다.
영화 '괴물'이 가지는 이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타자화시켜서 내가 '괴물'이 되는 것. 내가 괴물일 수도 있는 것을 반성하는 것. 나로 인해 '괴물'이 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용기를 주는 것.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내가 만들어냈을 '괴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습니다만 나의 새로운 신년 목표로 삼기로 했습니다. '괴물'을 만들지 않고 그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기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을 괴물로 바라보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년 목표는 무엇인가요?(다시 말하지만 업로드 시점에서 이미 24년 하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