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하는 코카콜라

영화 <더 로드>와 부성의 상품성

by 화산대폭발

'아버지'는 사회에 따라 전형적 규격이 있으며 그 역할의 가치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숭배된다. 미디어의 부성 또한 시대를 거쳐 형태를 바꿔가며 생존해 왔다. 2000년대 이전까지 아버지는 보통 권위적이며 대화조차 쉽게 나눌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영화 내의 피보호자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굴복하거나 저항했지만 끝내 그 이면에 전달되던 사랑을 재발견하면서 '성스러운 아버지'를 해석한다. 하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를 기점으로 권위적 아버지의 모습에서 내려와 가정적으로 변모한 양상이 등장한다. 지위를 잠시 내려놓음으로써 부성의 드라마틱한 파급력은 더욱 크게 튀어 올랐고, 그 흐름 위의 2000년대에는 <아이 엠 샘>, <행복을 찾아서>와 같이 기성 아버지로서의 규격을 벗어난 인물을 조명하며 '아버지'라는 역할의 수행 조건에 대해 탐구한다. 특히 <빅 피쉬>에서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선망을 어른의 눈으로 다시 보며 배신감과 의심을 조장한 후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다시 한번 범접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아버지를 재탄생시킨다. 이런 시도들은 '아버지'를 하나의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성이라는 개념을 더욱 성스럽고 굳건하게 추앙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에서는 이에 더해 <파송송 계란탁>, <과속스캔들>, <국제시장>을 통해 '한국식 아버지'를 숭배의 최고점으로 올려놓는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한 인간이 '아버지'라는 관계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그에 걸맞은 인간상이 되려 노력하는 국면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결국 하나의 개성적 인간이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흡수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를 숭고한 것으로 여기며 결말을 맺는다. 이처럼 미디어의 부성이 권위-탈피-희생으로 변모해 가며 아버지 숭배를 더욱 심화시켰고, 아버지라는 개념의 경계가 더욱 공고해질수록 또다시 미디어가 이를 전파함으로써 '아버지'란 하나의 브랜드로 정착된다.

나 또한 그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의 도서관이 최고의 휴식 장소였던 나는 비치된 어린이용 장서들을 모두 다 읽어버렸다. 책이 별로 없기도 했고, 중요한 점은 책이 이쁘지 않았다. 언제고 제일 낡아빠진 '궁금한 이야기 WHY',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모모', '소피의 세계'까지 모두 해져있었다. 당연히 표지가 이쁘지 않았던 책이라도 내용이 좋다면 읽는데 전혀 상관없었겠지만 당시에 내가 내용을 미리 접하고 책을 집을 리가 없었다. 나는 빳빳한 책을 읽고 싶었다. 이쁘게 잘 포장된 책이 좋았다. 그때 도서관 선생님 뒤쪽에 작은 파티션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도서관 선생님은 자주 보던 학생이었으니 구경 삼아 들여보내 주셨는데, 창고인 줄만 알았던 그 작은 공간은 선생님들이 요청한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였다. 아이들 서고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책장도 두 개가 전부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따로였다. 아이들 책보다 작고 무거웠지만 전부 새것이었다. 나는 빛나는 눈으로 그나마 얇은 책을 집어 들었고 그것이 코맥 매카시의 '로드'였다. 멸망해 버린 세계를 걷는 부자의 여정이라는 말에 나는 쉽게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었다.

확실히 아이들 서고에 있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강도, 납치, 살인은 고사하고 식인까지 묘사된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칙칙하다 못해 죄스럽고 상상만으로 꿈에 나올 듯했다. 그러나 책에는 분명 무언가 계속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면 어딘가 따뜻한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아이가 읽으면 안 될 책은 분명했지만 나는 책을 덮은 뒤 조금은 더 힘차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그 책이 '더 로드'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되어 국내에 개봉했다. 생경한 마음으로 마주한 영화는 충분히 충격적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오히려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때는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영화 <더 로드>, 원작의 '로드'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원인불명의 재해로 인해 망해버린 세상을 살아내는 부자의 이야기다. 이 세상은 칙칙하고 절망스럽다. 절망 정도가 아니라 살아서 걷는 것이 용한 수준이다. 하늘을 가린 재의 영향으로 햇빛의 따스함은 지면에 닿지 못해 항상 춥고, 곳곳이 오염되어 물조차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다. 공기에 부유하는 재 때문에 주인공의 기침이 멈출 날이 없고, 길가의 사체에선 신발을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신발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것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에 얼추 발이 들어갈 나무라도 찾는다면 발에 감싸둬야 한다. 주인공은 아들에게 틈 나면 권총을 입 안에 넣어 방아쇠 당기는 연습을 시키며 자신이 아들을 지켜주지 못할 때를 대비한다. 그런 세상에서 부자는 조금은 더 따뜻할 남쪽을 향해 한없이 걷는다.

아포칼립스적인 세계관만 따로 놓고 보면 다분히 가족적인 로드 무비, 여행기다. 부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난을 헤치고 나아간다. 아버지는 경험으로, 아들은 순수함으로 각자의 역할로 둘을 지탱한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가까워지지만 피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 아버지는 자신의 유산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영화는 끝난다. 어느 정도 각색이 이루어진 영화이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올까?


우선 이 이야기는 '희망'에 대한 찬사다. 절망적 세계관과의 대비를 통해 성스러운 희망을 다루는 윤리적 여정이다. 부자간의 이야기를 넘어 인류의 희망에 대한 신화에 가깝다.

주인공 부자는 맹목적일 만큼 남쪽을 향해 걷는다. 하지만 남쪽이 따뜻할 것이라는 예상의 근거는 구시대적 발상이지 모든 나무가 쓰러져버린 이 세상에서도 그러리라는 확신은 있을 수 없다. 증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 아니며 주인공 아내의 유언, 즉 계시를 통한 환상적인 공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쪽을 향해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미가 여정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제목인 The Road는 말 그대로 길이다. 모든 길의 끝에는 목표가 있다. 누구든 길에 오른 사람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오늘을 굶고 내일 다시 굶더라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길에 오른 자들은 마음속에 불씨를 지닌 사람이다.

주인공 부자의 여정 중 둘의 대화에는 종종 나쁜 사람, 착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들은 자신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며, 착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주인공에게 자신들은 착한 사람이 맞냐며 되묻는다. 착한 사람이 단순히 심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쁜 사람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지칭된 나쁜 사람들은 약탈자, 식인 무리인데 이야기 내에서 마주치는 그들은 모두 거처가 있다. 즉, 그들은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길의 바깥에 있다. 그들은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불씨가 없다. 묘사되는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에 반해 이 이야기의 착한 사람은 살아가는 것 이상의 희망을 가슴속에 지닌 사람이다. 당장 살아내는 게 급한 사람은 길 가는 노인에게 식량을 나눠줄 수가 없다. 내 물건을 모조리 빼앗은 강도를 찾았다면 협박해서 내 물건만이 아니라 강도의 물건까지 빼앗는 것이 당장 살아내는 게 급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슴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씨를 품은 이들만이 노인에게 따뜻한 저녁 식사 자리를 나눠줄 수 있고, 강도에게 식량을 주며 그의 삶에 용서와 응원을 전해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적이다. 괴물과 인간만큼이나 작품 내에서 이 둘은 구분이 쉽고 상하관계가 확실하다. 길 밖의 인간, 즉 나쁜 사람들은 주인공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나쁜 사람은 무리 짓고 라이플과 망원경으로 무장했음에도 며칠을 굶고 아들을 들쳐 매고 달리는 주인공에게 상처 하나 입힌 적 없다. 희망을 지닌 참된 사람과 살아내고 있을 뿐인 인간은 닿을 수조차 없다는 노골적인 묘사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인간이란 길에 오른 사람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가진 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신화인 것이다.

이 점은 영화건 원작에서건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영화는 무겁고 희망이 없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기엔 대중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원작에서는 간결하고 건조한 묘사 탓에 등장인물의 마음이나 의도를 쉽게 유추할 수 없기도 한데 이를 각색을 통해 해결하여 개연성을 살렸다. 이것이 드러나는 각색이 벙커 장면이다. 주인공은 여정 중 발끝에 닿은 해치를 발견하고 늘 그랬듯 생존 물자를 찾기 위해 들어가 보는데 그곳은 온갖 음식과 물, 휘발유 등 생존 물자가 가득한 누군가의 지하 벙커였다. 종말 이후 처음으로 느꼈을 여유에 둘은 행복에 젖어 끓는 물에 몸을 씻고 이발까지 한다. 깨끗한 옷으로 차려입고 식사를 하며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지하 벙커에 쌓인 음식을 제대로 해치우지도 못했을 때 주인공 남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며 벙커에 남고자 하는 아들을 부리나케 챙겨 다시 바깥으로 나서는 것이 원작의 묘사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는 멀리서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이 근거리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벙커를 나선다고 변경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여유로운 행복조차 뒤로 한 채 벙커를 나서야만 했던 이유가 원작에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들이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벙커에서 얻은 좋은 옷과 음식은 주인공과 아들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선물하지만, 그와 더불어 주인공에게는 술과 담배를 통해 과거에 대한 기억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잿빛 세상이 아는 것의 전부인 아들에게 과거의 영광이라는 것은 술과 담배만큼이나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벙커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피를 의미하며, 술과 담배는 아버지와 아들,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구시대로의 망명에서 벗어나 현재를 마주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주인공은 이러한 메세지를 읽어내고 그들이 마음에 지니고 있는 불씨가 이대로는 꺼져갈 것이라는 윤리적 직감으로 벙커를 나서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있다. 매일 기침으로 잠을 깨고 이후에는 각혈까지 하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다. 자신이 죽은 뒤 아들은 혼자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을 때 한 걸음이라도 더 남쪽으로 향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아들에게 체득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러나 벙커 속 여유로운 생활에 중독되어 자신의 목표를 잊은 채 하루하루 죽어간다면 말 그대로 머무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는 그의 목표, 그의 길 위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삭제되고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것은 확실하게 관객에게 꽂히면서도 벙커에 남겠다는 아들의 바람은 투정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장치이므로 확실하게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윤리적 여정과 희망에 찬사는 약해지고 감성적 부성만 남게 됐다.


이 장면 이후로도 영화에서 주인공은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아들을 다룬다. 위험한 상황에서 아들을 둘러매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옷가지를 낚아채며 아들을 제어하려 한다거나 윽박을 지른다. 그런 이후 잠자리에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들에게 뽀뽀 한 번 해주면 그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씻겨 내려간다. 편리한 장치다. 부성은 견고하게 쌓인 그 이미지 때문에 관객들에게 어떠한 이유 없이 묘사만으로도 상황을 이해시켜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편리함을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로 원작과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셀링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초반의 온전한 코카콜라를 발견하고 부자가 함께 나눠마시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이미 뜯긴 음료 자판기에 혹시 몰라 팔을 집어넣어 보고 그 안에서 코카콜라를 발견한다. 코카콜라를 발견하자 마치 경건한 것을 발견한 듯 주인공은 아들에게 잠시 앉아 먹고 가자고 말한다. 아들의 배낭도 손수 풀어주며 자리에 앉아 마개를 딴다. 직접 냄새를 맡는다. 아들에게 건넨다. 아들은 이상한 소리와 거품을 내는 음료를 경계하지만 조금 마셔보고 매우 맛있어한다. 기쁨에 차 아버지에게도 권하는 아들 덕에 주인공도 조금 먹고는 다시 아들에게 건넨다. 그리고 이 코카콜라를 위해 잠시 쉬자고 하며 온전히 음료를 다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단순히 음료를 나눠마실 뿐인 이 장면을 초반에 삽입함으로써 관객은 둘의 끈끈한 부자 관계를 단번에 납득한다.

어떻게 코카콜라라는 일반적인 상품이 부자의 관계를 증명할 수가 있나? 코카콜라는 그 자체로는 단순히 음료일 뿐이고 달콤한 맛 자체는 둘에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관객은 코카콜라가 아버지에게 갖는 의미를 안다. 아버지에게 코카콜라는 달콤한 맛 이상의 추억이며 과거의 행복 자체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들이 권유한 단 한 모금에 만족할 뿐 오히려 과거 따윈 전혀 의미 없을 아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좋은 건 언제나 아들에게 전달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코카콜라 캔 하나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전달된 순간 변하지 않는 가치로 치환되고, 관객 역시 그러한 코카콜라를 받아 들며 부성의 불변성에 대해 서명한다.

둘의 끈끈한 유대감을 기나긴 서술과 사건으로 나열하며 설명할 필요 자체가 없다. 코카콜라가 빨간 시그니처 컬러와 탄산소리로 "함께 하는 즐거움"을 광고하듯 우리는 부성만으로 관계의 유대감을 예상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변하지 않는 가치는 세상의 끝에도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코카콜라와 부성, 이 둘은 어떻게 이렇게나 닮을 수 있단 말인가.

'불변'과 '부성', 이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시대를 막론하고 조합되어 왔지만 그 맛만큼은 콜라만큼이나 질리는 법이 없다. '변화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변주들이 더욱 드라마틱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불변하는 부성'이라는 단단한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성'이라는 것은 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삶에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에 이런 단단한 중심을 내세우는 작품은 그것에 기대기만 하더라도 소비자는 장애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접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성'은 최고의 상품이다.

이전 01화극장에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