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서 떨어지고 아버지가 되다.

영화 <버드맨>과 예기치 못한 아버지로의 진화

by 화산대폭발

인간적인 면모는 어디서 올까. 나 역시 오랜 시간 살아본 것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으니 다른 것과 비교하여 알아내보자.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볼 때 탈인간, 인간적이지 못한 면모 등으로 수식한다. 그렇다면 완벽이라는 기준은 무엇일까? 개인이나 사회에 따라 완벽이라는 것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고전을 지나 지금까지 공통적으로 신격화되는 완벽의 유형 중 하나는 바로 확신에 찬 사람이다.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경외롭게 생각한다. 싯다르타의 출가는 위대한 포기라고 불리고, 예수의 거침없던 발걸음 닿는 곳은 성지가 되었다. 죽은 제갈량이 남긴 무모한 지략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물리치고,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경외롭다 못해 두려움까지 느낀다. 이들 모두 선택 앞에 후회나 고민이 없다. 명확한 비전이 그들의 미래를 비춰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남들의 말엔 아랑곳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올려다보지 동류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의심 없는 자는 고뇌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 자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하지 않는 자는 배우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런 완벽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에 갇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갈림길 앞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다. 번뇌가 인간의 조건이다.


<버드맨>은 실제 캐스팅 배우의 삶과도 비슷한 플롯으로 유명하기도 한 영화다. 주인공 '리건 톰슨'(이하 리건)은 슈퍼히어로 캐릭터 '버드맨'을 연기하며 스타덤에 올랐으나 버드맨 시리즈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배우다. 그 이후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잊힌 뒤 20년 만에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직접 각색한 연극을 올린다. 이 주인공을 연기한 마이클 키튼 배우 역시 '배트맨'을 연기하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오랜 시간 잊혔고 <버드맨>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다. 마이클 키튼의 삶과 버드맨의 줄거리가 서로에게 스포일러다. 이런 캐스팅이 또 있나.

영화는 초연을 앞둔 리건의 연극 리허설로 시작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시작하자마자 주연 배우는 무대 위에서 떨어진 조명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간다. 주변 상황은 악화되어만 간다. 동료 배우이자 여자친구 '로라'는 임신을 고백하고, 결국 다친 주연 배우가 감독인 리건을 고소하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유명 배우와 계약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지만 그 녀석은 영 짜증스럽기만 하고, 연극 평론가 한 명은 리건을 몰락시키기 위해 이를 갈고 있다. 어지러운 상황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사, 이 연극의 공동제작자인 제이크의 조언은 듣지도 않는다. 남의 말이라곤 아예 들리지를 않는다.

그런 모습을 영화는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본인은 들이치는 이 상황들에 미칠 지경이지만 카메라와 세상은 계속 움직이라며 리건을 떠민다. 리건은 번뇌로 가득 차 괴롭다. 그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무너짐과 기행을 따라다니며 리건을 경험한다.


리건이 이 연극을 치열하게 준비한 것 같긴 하지만 연극은커녕 삶 자체에 확신이 없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은 빛났던 과거뿐이다. 리건은 자신이 로라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확신이 없다. 겉으로는 슈퍼히어로들이 득세한 영화판을 욕하면서도 내심 '지금이라도 쫄쫄이를 입는다면 다시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항시 고민한다. '버드맨'을 연기하며 벌어들인 수입들은 애진작에 방황하며 써버린지 오래다. 곁을 지켜주던 아내와도 이혼했다. 리건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전처와의 딸 '샘'과는 부녀관계는커녕 남만큼도 못 하다. 막 재활원에서 나온 샘이 대마초를 피우고 있자 리건은 아버지인 만큼 한 소리하게 되는데, 되려 샘은 리건에게 "아빠는 이 연극을 예술이 아니라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려는 것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은 쌔고 쌨는데 아빠는 마치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양 행동하지 않느냐, 인터넷도 안 하고 페이스북 계정도 없는 아빠야말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며 폭언을 퍼붓는다. 리건은 본인 스스로나 남에게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에 더해 리건은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 전 아내인 실비아와도 사랑과 존경을 혼동하는 리건의 성향 때문에 갈라졌다. 그에게 존경이란 사랑과 같은 의미다. 그는 계속해서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함으로써 남들에게 경외의 대상, 즉 완벽한 존재로 부상하고 싶지만 남들은 리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샘의 말처럼 그는 이 연극을 위해 대본을 직접 썼고, 감독을 겸하고, 무대에서 연기한다. 세 가지를 모두 본인이 맡는 것은 이를 통해 배우로서 건재함을 알릴 뿐만 아니라 제작자,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일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애당초 영화 관계자들은 퇴물 배우인 리건은 안중에도 없다. 연극계로 눈을 돌렸지만 이쪽은 도리어 연극계로 넘어오는 영화배우를 혐오하기까지 하는 더욱 폐쇄적인 곳이다. 결국 리건 본인이 대본을 쓰고, 브로드웨이의 극장을 빌리고, 집을 담보로 잡아가며 배우들과 계약서를 쓴다.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고 리건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항해서 그가 알았든 몰랐든 근본적으로 리건은 스스로 존재하고자 한다. 마치 신처럼.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에 기댈 필요가 없는 '완벽의 존재'로.




영화는 지속적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묻고 대답하며 진행된다. 리건이 연기하는 극중극의 캐릭터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겨눈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우리의 리건, 그의 머릿속은 번뇌가 넘쳐 웬 목소리가 말을 걸 지경이다. 아무도 듣지 못 하지만 리건에게만큼은 또렷하게 들리며 그를 괴롭힌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가? 머릿속의 목소리는 분명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으나 리건에게만큼은 존재한다. 리건은 사사건건 방해하려 드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주문을 외지만 목소리는 그러한 부정을 "너야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비웃는다. 어찌저찌 연극의 첫 공개를 앞둔 밤, 브로드웨이의 권력적 연극 비평가로부터 "너의 연극을 죽여버릴 것이다"라는 폭언을 들은 리건에게 이제야 목소리는 자신의 유일한 성공 '버드맨'으로 나타난다. 이 버드맨이 상징하는 바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이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다. 리건 역시 버드맨 이후로 수많은 선택을 했을 것이지만 20년 동안 그 선택이 실패했을 뿐이고, 20년 치의 실패만큼 자신에 대한 의심이 쌓여 구체화된 것이다. 20년 치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던 버드맨은 역설적으로 20년 치의 번뇌만큼 리건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 대한 의심을 마주했다. 그는 어느새 버드맨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에 대한 의심마저 존재의 증명으로 받아들인 리건은 하늘을 난다. 리건에게 이제 의심은 없다. 첫 연극은 어떠한 실수도 없이 마지막 장면까지 도달하고 리건은 이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며 인간을 버린다. 그렇게 연극이 성공하고, 관객이 환호하는 순간 리건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고뇌도 없다. 리건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그렇게 쉬울 리 없다. 연극이 보란 듯이 성공했음에도 버드맨의 환영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한 번의 성공이 20년의 실패를 잊게 할 수 없다. 리건은 조금은 기가 죽은 듯한 버드맨을 향해 엿 먹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리건을 찬양한다. 브로드웨이에는 리건을 향한 촛불이 켜졌으며, 기자들이 그게 입원한 병동의 복도를 가득 메웠다. 찬양은 완벽의 언어다. 이것이야말로 리건이 바라던 것이었다. 남들의 관심과 존경, 한순간에 모두 얻게 된 그는 이제 깨달았다. 이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는 나아가야 할 다른 것이 있다. 그 발걸음은 확신에 차 거침없다. 설령 그 발걸음이 창문 밖으로 향하더라도 망설임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병상 위의 리건을 대하는 샘의 모습이다. 리건과 샘은 상술했다시피 남보다도 못 한 부녀지간이었다. 리건과 샘의 관계가 어긋난 것은 샘의 옆에 리건은 항상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의 역할 중 하나인 곁에 있어주는 것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한 리건에게 샘은 증오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 중 샘과 리건이 나눈 의미 있는 대화는 두 번이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리건이 병상에 눕고 나니 갑자기 친밀하게 구는 샘의 모습은 언뜻 보면 감정적 비약으로까지 느껴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리건과 샘은 확실한 부녀지간이다. 둘은 닮았다. '마이클'에 따르면 둘은 외적으로 전혀 닮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피적이라는 내면의 사고방식이 닮았다. 리건은 언제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며 스스로를 감췄다. 샘 역시 아버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할 것이라 믿었던 자신으로부터 배신 당해 방황했고 술과 마약으로 스스로를 감쌌다. 둘은 말하자면 서로 불완전함을 공유하는 사이다. 리건은 샘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지 않았기에 샘은 완전할 수 없었고, 샘은 리건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기에 리건 또한 완전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닮았기에 서로에게서 자신의 일부분을 발견하고 싫어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부녀사이다.

그렇다면 이 부녀, 갑자기 왜 친밀해졌을까? 서로 닮았다는 점에서 리건이 대표하는 아버지, 부성의 모습은 '앞서 가는 사람'이다. 평생을 흔들리며 후회하던 리건이 이제는 완전한 통제를 통해 자신의 고뇌를 해결하고 존재를 확립했다. 그는 의심과 작별함과 동시에 인간의 모습과도 작별하면서 완벽한 존재로 태어난다. 이 지점에서 샘은 리건을 인간적 불안에서 벗어나 이끄는 존재, 딸과 같은 불완전함을 공유했으나 먼저 발걸음을 뗌으로써 뒤따라올 길을 제시하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샘은 리건이 연 창문을 향해 다가가면서 또다시 그가 방황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가 완전한 통제 이후에도 방황한다는 것은 인간적 불안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의미하므로 샘 또한 불안의 유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샘은 창문 밖을 본 뒤 안도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땅에 버리고 완벽한 존재로써 하늘로 향한 리건을 바라보며 샘도 분명히 스스로를 감싼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제시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표정이다. 리건은 인간이길 멈추면서 스스로 완벽한 존재가 되었고, 샘에게는 비로소 아버지가 되었다. 샘의 눈빛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첫 경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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