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을 버린 부성의 귀환

영화 <어쩔수가없다>와 부성의 부품화

by 화산대폭발

1부를 통해 사회에 퍼진 아버지의 신화성을 엿봤다. 아버지란 여전히 사회에서 숭상되는 가치 중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제적이며 히스테릭한 모습조차도 부성이 지닌 사회적 가치 앞에서 무마된다.

그렇다면 사회가 부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단일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가치들은 사회 앞에서 해체되고 재조립되며, 그것이 다시 가치의 순환을 낳는다. 2부에서는 부성의 실패, 추락, 대체를 통해 현재 사회에서 부성이 어떤 식으로 해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 '만수'. 그는 '태양 제지'에서 25년을 근속한 가장이다. 아내, 두 자녀, 두 자녀의 이름을 딴 두 마리의 개까지. 그가 책임져야 하는 가정은 마당이 딸린 큰 집만큼이나 거대하다. 그러나 제지 회사가 미국계 회사로 인수되며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만수는 경력이 무색하게 회사에서 잘린다. "어쩔 수가 없다"는 해고 통보 뒤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만수, 3개월 안에 재취업에 성공하겠다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지만 1년 뒤에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인 만수가 지위를 잃자 가정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주부이던 아내 '미리'도 다시 치위생사로 일을 시작하고 취미인 댄스 스포츠마저 포기한다. 아들 시원, 딸 리원의 동생 격인 두 반려견 시투, 리투도 부모님 댁에 맡긴다. 가장의 지위가 가정을 한 자리에 모으는 힘이었던 셈이다.

만수는 이제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 자리는 안 된다! 제지 업계에 공헌한 사람을 뽑는 올해의 펄프맨까지 수상했던 만수인데 그런 그가 아무 자리에서나 일할 수는 없다. 그는 면접도 다니며 나름 고군분투하지만 낙방하기 일쑤다. 옛 영광과도 같았던 "문 제지"의 반장 '최선출'의 유튜브를 보며 질투와 자책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무작정 '문 제지'에 찾아가 이력서를 내밀며 빌어도 보지만 바로 '그' 최선출에게 쫓겨난다. 홧김에 최선출을 쫓아가 죽여버리려고 마음도 먹지만 그렇게 생긴 공석에 나보다 더 나은 경쟁자가 있다면? 그러니 확실한 방법으로 실행하자. 그것은 자신보다 잘난 경쟁자를 미리 찾아내 제거하고, 그 후에 최선출의 자리 또한 공석으로 만들어 그 자리에 만수가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지원하는 것! 이 엄청난 논리적 비약은 의외로 괜찮아 보인다. 그는 당장에 실행에 옮겨 가짜 제지 회사 공고를 올리고 우편으로 접수를 받아내 지원자를 색출한다. 자신보다 스펙이 좋아 보이는 지원자는 둘, 거기에 현직에 있는 최선출까지, 세 명만 제낀다면 그는 다시 가장이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만수의 위태로운 가장 지위를 세 번의 살인을 통해 복구하는 이야기다. 세 번의 살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살인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을 만나게 되고 이 셋은 주인공 만수가 다시 가장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버리는 인간성 세 가지를 나타낸다.

우선 구범모, 그는 만수와 가장 많이 닮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지내면서 나름의 취미도 있고 제지 경력에 대한 높은 자존심을 지닌 것까지 닮았다. 구범모는 만수의 '현재'를 나타내는 인물이다. 하다못해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그것이 만수의 경우에는 심증뿐이더라도) 똑같다! 어쨌건 그는 가장을 되찾는데 장애물이다. 결국 만수는 범모를 죽여야 한다. 만수는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서 가져온 옛 권총을 가져와 범모를 겨눈다. 그러나 만수는 범모를 죽일 자신이 없다. 이미 불쌍한 그를 죽이기까지 해야 하다니. 만수와 범모가 바라보며 서로 책망의 말을 던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 와중에 범모의 아내, '아라'가 이 상황을 발견하고 만수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자 개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그러다 떨어진 권총을 '아라'가 줍고 결국 만수는 달아난다. 근데 웬걸, '아라'는 범모에게 권총을 쏜다. 범모는 만수가 죽이지 못 한 유일한 인물이다. 자신의 현재를 망가뜨린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은유다.

두 번째 살인을 위해 찾아간 고시조의 일자리. 고시조는 깔끔한데다 젠틀하고, 딸을 아끼며 가정을 위해서는 진상 손님도 참아내는 아버지다. "이런 일 할 분으로는 안 보이세요"라는 만수의 말처럼 고시조는 만수의 지향점이다. 위태로운 가정만 아니었다면 만수의 모습은 딱 시조와 같았을 것이다. 고시조는 만수가 원했던 방향, 만수의 미래를 상징한다. 그러나 시조 역시 만수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만수는 범모를 죽인 뒤 더욱 계획적으로 변모했다. 딸의 구두를 사기 위해 다시 방문하기로 했던 구시조의 신발 가게도 가지 않고, 시조가 퇴근하는 길에 지나칠 해안 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태우며 기다린다. 이미 시조가 어느 길로 퇴근하는지, 그의 기계 정비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자신의 차를 정비해 주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예상대로 도착한 시조, 젠틀한 시조가 만수의 차를 정비해 주고 만수는 그런 시조를 총으로 쏴 살해한다. 그런 시조를 처리할 곳이 없어 직접 집 온실에서 분재용 철사를 이용해 시조를 공처럼 뭉쳐 만수의 집 마당에 묻는다. 아내만큼이나 식물을 사랑하던 만수의 온실은 이제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다.

대망의 마지막 살인을 위한 최선출을 만나러 가는 길. 이젠 만수의 고뇌 같은 묘사도 없다. 외딴섬에 홀로 사는 최선출의 집 앞에 뿅 나타난다. 좋은 술을 들고 최선출에게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하는데, 가족도 없이 퇴근하면 술에 기대 사는 최선출이 이를 거절할리가 없다. 같이 자리하게 된 최선출은 유튜브와는 다르게 개차반이나 다름없다. 말 끝엔 꼭 욕이 붙어 나오며 정색했다가 웃었다가 예상할 수가 없고 권위 의식이 서려있는 폭력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술에 취하면 개나 다름없던 만수의 과거다. 그랬던 만수는 9년 동안 금주를 잘 지켜오고 있었는데 폭탄주를 말아온 선출 앞에 '어쩔 수 없다'를 되뇌며 결국 술을 마신다. 폭탄주를 마신 만수, 9년간의 인내만큼이나 거의 짐승이 되어버렸다. 계속 아팠던 생이빨을 뻰치로 빼버리고, 집안 모든 술을 다 마셔버릴 기세로 병째 들이킨다. 결국 먼저 취해버린 선출, 만수는 이제 망설임도 없이 땅을 파고 그 속에 선출을 구속한다. 깔때기를 선출의 입에 꽂아 술과 고기를 집어넣고는 랩으로 감싸버린다. 그렇게 스스로의 구토에 질식하여 사망한 선출로 사건 현장을 꾸미고 증거를 추려내 사라진다.

계획대로 공석이 된 최선출의 자리에 지원하고 당당하게 면접을 해낸 만수. 그는 재취업에 성공한다. 꿈만 같은 첫 출근 날, 만수가 공장에 들어서자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로봇들이 스스로의 일을 해내고 있고 거기에 인간은 만수뿐이다. 사실 만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태양 제지의 업무에 비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다. 이 자동화 기계들을 켜고 끄고 관리하는 것이 일의 전부다. 25년 경력의 제지 경력자가 아니어도 상관조차 없는 일이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얼굴의 만수를 뒤로 한 채 영화는 끝난다.


만수에겐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남지 않았다. 현재, 미래, 과거가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미래, 과거 모두 무시할 수 없다. 그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기계다. 주어진 기능만 수행하면 될 뿐인 기계에겐 변화가 의미 없다. 현재, 미래, 과거를 스스로 버린 인간은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

만수는 스스로 인간성을 버리고 기계가 됨으로써 부성을 회복했다. 만수는 이 세 번의 살인 이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태양 제지'의 만수와 '문 제지'의 만수는 태양과 달만큼이나 반대편에 있다. 부성을 숭고하게 표현하던 고전적 내용과는 달라서 더욱 씁쓸한 맛이 남는다. 게다가 이 사실을 이미 아내 미리도 알고 있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제지 업체 면접자들의 실종과 북한제 권총의 탄피가 발견, 거기에 더해 만수 아버지의 권총이 단순한 프라모델로 교체된 것까지 알게 된 미리는 만수가 가정을 위해 인간성을 버린 것을 깨닫고 이를 묵인한다. 인간성의 상실을 가정의 안정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만수의 개인사가 아닌 구조조정, 자동화, 경쟁 등 자본주의적 사회의 가속화에 따른 인간성 상실을 부성의 위치를 통해 표현한다. 만수의 이야기가 그렇다고 단순한 타락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추락했지만, 그렇게 마주한 위치야말로 현재 사회의 '정상적인' 부성의 자리다. 과거의 아버지가 신의 대리자, 완벽한 존재, 가정의 중심, 규범의 표준이었다면 만수의 세대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는 체계의 하청,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이 영화가 냉정한 이유는 그 몰락을 비극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화가 만수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끝까지 반복하게 함으로써 부성의 인간적 책임이 이미 사회적 기능으로 대체되었음을 드러낸다. 만수는 도덕적으로 파산했지만,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역할’이다. 아내 미리의 묵인은 그래서 더 잔혹하다. 그녀의 침묵은 사랑이 아니라 시스템 유지다.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가 사회라는 거대한 자동화 공정의 말단이라면, 그 안의 부성은 단지 동력 장치에 불과하다. 만수는 아버지로서의 인간성을 잃었지만, 바로 그 상실을 통해 부성은 완벽히 ‘작동’한다. 결국 이 영화의 부성은 신화에서 기능으로, 인격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한 존재다. 부성의 하강은 인간의 몰락이 아니라 자본이 완성된 세계에서 인간이 설 자리를 찾기 위한 최후의 진화처럼 보인다. 그 진화는 구원 대신 냉소를 남긴다. 만수가 마지막으로 미소 짓는 얼굴, 그것은 한 시대의 아버지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장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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