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라이터 Feb 01. 2018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괜찮아, 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날 일이 허다하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 1년 여의 고민 끝에 결정한 새로운 취미생활을 위해 호기롭게 만나야 하는 유쾌한  사람들, 때론 낯선 어딘가에 과감하게 발을 내딛고 나설 때어야만 겨우내 만날 수 있는 카페 속 어딘가에 위치한 그 사람들. 그것이 앞으로의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인연이 될지 아니면 한낱 먼지 덩어리처럼 아주 잠깐의 스치듯 안녕이 될지는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어쩌면 딱 한 가지의 아주 공통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할 것 같다. 찰리 채플린이 언젠가 우리에게 말했던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세상 모든 사람은 어떤 관계라는 틀에서 놓고 보았을 때 적절한 가식과 매너를 지키는 사이에서는 아주 멋지고 세상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왠지 나만 불행한 것 같고, 나 빼고는 모두 다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친해지거나 훗날 그 가식적인 매너를 깨고 예의 없게 굴어도 이해해줄 만한 사이가 된다면, 결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 사람이 온전하게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오히려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구나, 결코 다르지 않구나 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세상은 온전히 내가 바라보는 관점, 그 시선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한 후 허리가 좋지 않아잠시 동안 집과 병원만을 오가는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온전치 않으니 내 인생은 마치 최악의 비극처럼 느껴졌다. 마음도 불안하고 조급하기만 했다. 내 동기들은 모두들 경쟁이라는 사회 속에 발을 내딛고 치열한 취업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나는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나 자신과 더불어 주위의 모든 것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것을 어느 정도 극복해내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때의 그 부정적이고 열등 감적인 감정과 시선이 결국은 연극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만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깨닫게 된 것 같다. 영화관에서 11,000원만 주면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의 한 편 만드는 과정은 꽤나 복잡한데, 사전에 감독과 작가가 모든 시나리오를 확인과 확인을 거듭한 결과 겨우내 대본과 전체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그러나 직접 현장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각 챕터마다 그 분위기와 환경에 쓰나미처럼 휩쓸려, 겨우내 써와던 미세한 대본과 내용이 변경되기 일수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30대인 내가 인생을 논하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미천한 경험과 경험을 거듭해왔겠지만, 무언가 왠지 인생은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 같다.


오직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결국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 희극적인지, 비극적인지에 따라 같은 장소나 사물, 사람을 보더라도 그렇게 그대로 보이는 것 같다. 낡은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을 택하더라도 낡게 보일 수가 있고, 세련되고 신선한 것을 도외시하고 오래되고 낡은 것을 좋아하더라도, 그 나름의 가치와 인식이 세련된 시선으로 바라보일 수 도 있는 법이다. 우리 집의 몇몇 가구들은 기본 10년, 20년 이상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가치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주 번듯한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연봉도 꽤나 높고 누구나 알 법한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 그 어떤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고 있을 것 같은 그 친구가 나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가장 많이 털어놓는다. ‘사실은 말이야..’하며 털어놓는 이실직고란, 차마 이 글에서 적지 못할 만큼 공포영화보다 더 시큼한 것이 수두룩하다. 보험이나 카드 영업을 문의해 오는 친구도 여럿 존재하고, 걔 중에는 그것 때문에 사이가 멀어진 친구도 여럿 존재한다.


오직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여지는 것 같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게 뭐가 중요한 걸까? 저 사람은 멋지게 성공했고, 그래서 나보다 더 행복할 거야 라는 오심의 망상에 사로잡혔던 건 아닐까? 성공과 실패는 도대체 누가 정하고 누구에 의해서 판단되는 걸까?


또다시 이 말을 반복한다
항상 감사하며 살자


어쩔 땐 하루 중에 여러 번 실패했었지 하며 스스로를 자축한다. 그땐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축하며 자책하기도 한다. 나는 내 또래 친구들보다 연봉도 낮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부모님 집에서 겨우 세끼에 만족하며 내 마음대로 누구의 발을 들일 수도 없다. 가진 게 크지 않으니 불편한 것도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명품을 멀리하고 내 차는 그 숱한 시간들 속에서도 무사하게 잘 굴러가고 있다. 누가 나를 보러 오지 못하니 내가 그들의 집에 놀러 간다. 덕분에 나만 조금 더 수고하면 그 친구는 더 편안해지고 내 가슴속의 안식은 보다 더 가득 채워져 지는 것 같다.




*writer, poet /  즈음: 일이 어찌 될 무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