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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라이터 Jun 24. 2019

스윽 흝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촬영지를 가다]


언젠가만 하더라도 사계절 중 가장 뜨겁고, 야위고, 가날픈 계절은 여름이랬다. 여름 나기를 여행과 함께 지냄으로써 다음의 사계절을 돌고 돌아 다시 기억했을 때, 그때의 사계절이 떠오르면, 그것은 행복이었고 추억이 되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감성을 느껴보기 위해 촬영지로 떠나본다는 건, 영화 속에서 숨 쉬어왔던 밥상과, 바람소리와 시냇물을 몸소 체험해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곳의 정취와 숨 가쁨을 가득 담기 위해 군위의 화본마을로 향해있다. 여담은 항상 내 곁에 있었고, 지금도 내 옆에 살아있다.



소년 시절 동네 아이들과 구슬놀이를 자주 하곤 했다. 티걱태걱, 아등바등, 그렇게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누가누가 이겼는지 점수판에 점수도 새기곤 했다. 검지 손가락 끝과 구슬의 동그런 끝부분이 맞닿을 쯤엔 제발 멀리, 훨씬 더 멀리 향해있긴 바라는 순수한 마음가짐을 안고 있었다. 아이의 해맑은 웃음 마냥 여담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아이처럼 해맑고 바둥바둥거린다. 오랜만에 향한 우리들의 여행지는 그런 아이 같은 순수함이 맞닿아있는 군위의 화본마을이다.



12명의 미니버스는 약 2시간을 달려 리틀 포레스트의 발자국이 서려있는 곳, 혜원의 집으로 도착했다. 우리들은 각자 태어난 곳, 사연이 다 다르다. 자라면서 즐겨먹었던 군것질 거리는 무엇이었는지, 잠을 잘 땐 어떤 모습으로 자는지, 어떤 커피 향을 좋아하는지, 모든 게 각자의 색깔이 무지개처럼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이 작은 마을에서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 함께 달려왔으며, 화려하고 웅장하진 않지만 그곳의 정갈함을 마음속 깊이 느껴보고자 하는 마음은 한 방향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시선은 같았으며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 셔터가 빠르게 소리 내어 리틀 포레스트의 요동치는 소소함을 담는데 연신 정신이 없었다.

 



여행, 그 순간을 담다의 뜻을 가진 여담은, 매번 나에게 일상에서 많은 동기부여를 가져다준다. 출사 후에는 여운을 남겨주고, 훗날 그것은 그리움이 된다. 간절하게 원하는 그리움이, 첫 번째 출사지의 경주에서 그랬고, 2018년 자연의 절경이 속삭였던 곳인 강원도에서도 그랬다. 올해 처음으로 두 발길이 향했던 합천은 그래서 추억의 공간들을 겉모습으로 바꾸어 주었고, 또다시 지금 마주치고 있는 이 곳, 군위의 화본마을은 자꾸만 추억을 되새겨보라고 훗날의 내 귓가에 속삭여댄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하루, 나에게 주거진 기회와 운 그리고 노력이 만나는 한순간을 위해선, 조금이라도 제자리에 멈추면 안 된다. 내가 달리고, 어딘가를 향해 있다면 순간의 사진을 담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두 동공은 항상 필름을 찍기 위해 준비되어 있으며, 왼손은 렌즈를 받칠 뿐이다. 멈추지 않고 여행과 카메라, 종이에 순간을 담을 펜만 있다면 지금 당장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것이다. 여행은 그래서 해답이고, 과정이고, 인생의 결과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주요 촬영지였던 혜원의 집을 나서면서 우리들은 조금 더 편해졌고, 긴장이 풀려왔다. 힘이 들어갔던 어깨는 더 이상 하늘로 솟을 필요가 없어졌고, 굳이 고개를 두리면 거리지 않아도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그제야 안부를 물으며 서로에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화본마을에서의 시골 다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그곳에서 옆에서, 맞은편에서 똑같은 전골과 버섯과 생선을 두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비록 혜원의 집에서 주인공 혜원이 스스로 밭일을 해가며 농작한 음식만큼은 아닐지라도, 약간의 그 맛다움을 정취 하기에 충분했다. 맛있었고, 훈훈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화본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영화에서 주인공 혜원은 서울로 상경하여 힘들게 고시공부를 하며 힘겹게 버텨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곳이 바로 이 곳 군위의 화본마을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 화본역은 혜원이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을 때 마중을 나와 준 곳이자, 금의환향은 아닐지라도 남몰래 먼저 반겨줬던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기차역은 추억이고 여행의 종착점이다. 화본역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선로를 따라 이어진 길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기에 충분했고, 때론 과분하게 아름다웠다. 눈부신 햇빛은 두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지만 사진은 눈물이 날만큼 밝고 빛이 났다. 우리들은 또다시 발길을 멈추었고, 단사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몸짓 발짓을 다해가며 창의적인 포즈를 계속해 나아갔다.



중학교 시절, 나는 오래 달리기를 곧잘 했다. 출발은 느리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능력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달리기 하는 과정은 다른 이들과 똑같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아 물을 마시고 싶었다. 달리는 중간 내내 배가 아파 포기하고 싶어 질 때에, 이상하게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아버지의 가훈을 되뇌며 달려 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유 있게 가장 먼저 출발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도착한 이 곳은 군위의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라는 초등학교였다. 운동장을 보는 순간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마치 그때 오래 달리기를 함께하던 친구들이 함께 달려 나가는 것 같았고, 작은 실내화 가방을 들고 짧은 다리로 등교하던 그 시절이 상상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찾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 누군가와 이별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 반복적인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풀고자 떠나는 여행 등 각자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오늘 아침 동래역에 옹기종기 모여 출발할 때 나는 오늘 내가 떠나는 여행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학교 내에 전시되어있던 낡은 책들과 잡지들과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 끝 모서리 즈음에서 그 이유가 생각이 났다.


“여행은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지금 내가 보는 이 순간들을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서 떠나는 거야”



여행을 하며 지난날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겐 그 여행은 과거가 되고, 지금 이 순간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재정립하는 사람들에겐 그 여행은 미래가 된다. 지금 나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들을 두 동공으로 기억하고 두 손에 놓인 카메라로 담는 것이다. 내 앞에 멈춰버린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 현재 내가 보고 느끼고 있는 감성과 현실들을 바라보아 주는 것이다. 많은 생각들은 떨쳐버리고,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 보고 있는 내 눈 앞의 이 곳, 바로 이 곳을 담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었다.



카페에서도, 석굴암에서도, 그렇게 여행은 계속되었다. 함께였으며 같이했다. 하고 싶은 말과, 글과, 사진으로 모든 것을 보답하고자 했다. 부산으로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1시간여 남짓한 시간 동안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아침부터 방금 전까지 이어진 여행 찰나의 순간들이 기억되었고 검은 눈 속에 나타났다. 여행 동반자 민수도 그랬던 걸까. 연신 잠을 자기에 바쁜 듯 보였다. 통솔하느라 항상 고생이 많은 여담의 핵인싸 민수, 오늘 처음 본 짝지 준호와 함께 각자 서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어느새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언제나 그랬듯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늘 그래 왔듯이 인사를 나누며 다시 각자의 일상과 사진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writer, poet /  즈음: 일이 어찌 될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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