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사진의 두 길은 그와 같은 것이다. 사진이 보여주는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으로 돌려, 세련된 기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서 완강한 현실의 깨어남과 마주할 것인가는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밝은 방』동문선, 2006, 118p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현실성의 깨어남과 맞설 것인가는 나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1]
롤랑 바르트는 문화의 숨은 이데올로기를 읽어 내기 위해 기호학[2]을 활용했고, 사진에 관한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고자 했다. 책의 제목인 카메라 루시다 (Camera Lucida)는 1807년 영국의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ston)[3]이 발명한 특별한 프리즘과 거울 또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물체의 상을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 주는 장치이다. 어쩌면 바르트는 빛의 진행 방향을 바꾸는 프리즘과 같이 우리에게 사회로부터 길들여진 생각이 아닌 그 생각에 문제제기를 하고 생각의 진행 방식을 주체적으로 바꾸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사회는 사진을 길들이려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향해 끊임없이 폭발하려는 사진의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사회는 두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법은 대중화시키고 일반화시켜 평범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 앞에 다른 영상이 맞설 수 없게 하는 것이다 … 광기를 택할 것인가? 분별을 택할 것인가?”[4]
바르트는 사진 예술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광기를 가두어 결국 진부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평했다. 따라서, 사회가 만들어낸 관습에서 탈피한 사진의 특수성을 밝히기 위해 보편적인 과학주의 연구법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하나의 개별적인 앎, ‘감정’을 연구 방법으로 채택했다.[5] 욕망의 관점에서 더 깊은 감정인 사랑과 죽음이라는 관점을 통해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온실 사진>을 설명한다.
“현상학적으로 말한다면 ‘임의의’ 대상으로도 부를 수 있을 이 사진들은, 어머니의 진실이 아닌, 어머니의 동일성만을 일깨워 주었기 대문에 결국 유사한 사진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온실 사진>이야말로 참으로 본질적인 사진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유일한 존재에 대한 불가능한 앎을 유토피아적으로 실현시켜 주었다.”[6]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에서 자신이 아는 어머니 다움을 느꼈다. 그 사진에는 자신이 보아왔던 외형적인 어머니스러움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진에서 어머니를 느낀 것이다. 이 현상은 사진이 그저 존재를 재현하는 매체를 넘어서 그 안에는 기호화 되지 않은 푼트쿰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르트가 이 책에 어머니의 온실 사진을 수록하지 않은 이유 역시 어쩌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각자 만의 푼크툼이 생겨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스투디움(Studium)[7]과 푼크툼(Punctum)[8] 사이에 결합 규칙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9]는 전제 조건 하에 우리에게 끝임없이 묻는다. 스투디움에 안주할 것인지, 푼크툼으로 뻗어 나갈 것인지.
우리는 의무 교육을 통해 코드화 된 방식으로 보도록 길들여지고,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것 만을 본다.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다 보고 들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것이 전체를 다루고 있는지는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되지 않도록, 일반화되고 만들어진 코드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에서 본질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허버트 마르쿠제(Marcuse Herbert)[10]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가 생산되는 욕망을 과잉 억압하고, 사람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배타적 독점’을 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개성이 박탈(Objective Personality)된 획일화된 사람을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고 정의했다. 앞서 바르트가 광기를 담고 있어야 할 사진이 예술이라는 포멧을 통해 사회로부터 길들어여지고 있음을 시사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더 나아가 마르쿠제는 예술의 역할을 제시한다. “자본주의의 소비 관행은 미적 유토피아의 허상 행태를 대변하고 있으며, 수동적인 청중의 ‘행복한 의식’을 이용한 자유는 모조품이지, 실재가 아니다. 따라서, 예술은 자유에 대한 비판적인 전망을 해야 한다.”[11]
21세기의 우리는 바르트가 말하는 스투디움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푼크툼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책이 사진론을 넘어서 보다 넒은 관점,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인식론의 관점에서 읽히기를 바랬다.[12] 자본주의에 길들어진 피사체가 우리 의식의 해석으로 또 다른 빛의 푼크툼으로 탄생되기를 바라며.
[1]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131
[2] Semiotics, 넓은 의미로 기호의 기능과 본성, 의미 작용과 표현, 의사 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3] 영국의 화학자. 의학을 전공했으나 후에 화학 및 광학상의 연구에 전심하여 많은 발견을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파라듐ㆍ로듐의 발견, 백금 신전법(伸展法)의 발명은 유명하다.
[4]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p.128-130
[5]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17
[6]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81
[7] 촬영자의 의도와 정보(욕망, 흥미, 취향)가 담긴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적인 요소 - 약호화 개념화
[8] 상처나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키는 라틴어: 촬영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성, 세부성, 비개념성 -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
[9]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51
[10] 1960년대 서구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였던 사회철학자. 대표저서로 『이성과 혁명』 Vernunft und Revolution, 1941, 『일차원적 인간』 One-dimensional Man, 1964, 『에로스와 문명』 Eros and Civilization, 1959가 있다.
[11]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 215~216
[12] 롤랑 바르트, 조광희 한정식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