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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yyumijung May 17. 2022

프로세스 이코노미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윤미애


사람도 물건도 쉽게 묻혀버리는 세상.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로보틱스(robotics, 로봇공학)의 발달로 ‘아웃풋’의 차이에서 차별화를 논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2] 시대에는 어떠한 전략이 필요할까?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는 1863년『모던한 삶의 화가』에서 처음으로 모더니티(Modernity)[3] 관련 글을 개제한다.


“이렇듯 예술가 G씨는 오고 가며, 달리면서 찾는다. 그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묘사하는 이 사내, 왕성한 상상력을 소유하고 인간의 거대한 사막을 넘어 언제나 여행 중인 이 [고독한] 사람의 목표는 평범한 플라뇌르(flaneur)[산책자]이다.”[4]


19세기 도시의 스펙터클을 관조하는 참여적 관찰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선적인 시간 속에서 세상사를 구경하는 오고 가는 관람객으로 남는다. ‘산책자’의 운동성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보고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산책자는 군중과 하나가 될 수 없어 불안정하고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하고 고독하다. 유대계의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가 언급한 ‘산책자(flaneur)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도시를 처음 방문한 여행객은 처음부터 거리 산책자가 될 수 없다 … 처음 접한 풍경은 …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 이라는 아우라의 정의를 환기시킨다. … 여행자는 도시의 아우라적 이미지를 잃어버리는 대신 거리 산책자가 된다.”[5]


목적론적 사고에서 자란 우리는 재충전과 휴식을 위한 여행을 떠나서도 미션 달성을 위해 초 단위로 움직인다. 그때 우리는 그 곳의 일회적인 아우라[6]를 볼 수 있을 뿐, 알레고리[7]적 성찰을 할 수 없다. 우리와 대조적으로 벤야민이 설명하고 있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론이나 환상이 아니라 경험”을 중시하고, 의미, 정신, 자아, 도덕의 감옥에 갇힌 신체와 감각의 해방을 추구하기 위해 거리 산책에 나섰다.[8] 사물, 사건, 인물과의 우연한 만남을 가져다주는 거리 산책 과정에서의 사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깨뜨림으로써 사물들 속에 숨겨진 혁명적 에너지(세속성 각성)를 통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무의식 세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도취의 변증법적 시각에 기초한 새로운 실존형식, 휴머니즘적 인간학의 한계를 깨뜨리는 혁명적인 실천으로 확대되는 것이다.[9]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에서 산책가의 사유는 르네상스 시대 미의 기준인 자연을 단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호응하는 즉 새롭게 창조를 제시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했다. 창조의 맥락에서, 타이트하게 짜인 클래식과는 달리, 재즈는 오늘 그리고 이 곳에서만 들을 수 있다. 똑같은 연주자의 곡도 내일이나 모레에는 다르게 들린다. 그래서 매번 같은 공연을 봐도 색다르게 들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 나가는 오케스트라형이 아니라 어디에 정답이 있는지 모른 채 답을 찾아 떠나는 재즈형 생활 방식과 작업 방향이 더 바람직하다.”[10]


측정하기 어려운 ‘과정’ 보다는 ‘결과’를 평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미디어 비평가 오바라 가즈히로(尾原和啓)[11]로는 보들레르의 산책자, 벤야민의 산책자의 사유와 유사한 개념으로, 골인 지점을 정해 놓고 장애물을 하나씩 극복하는 방식이 아닌 재즈형 생활 방식을 제안한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발상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사는 것이다. 나노 단위로 급변하는 21세기에는 사유가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경계가 해체되어 이율배반적인 개념이 서로 융합하는 다공적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성좌(별자리)[12]에 비유한다. 밤하늘의 별들은 독립적으로도 빛나고, 연결된 별자리로도 빛이 난다. 어떤 관점으로 별들을 골라 어떻게 연결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의미가 탄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요 대비 과잉 공급의 제품들로 과거와는 완전 다른 방식의 마케팅이 필요한 디지털로 전환된 ‘마켓 4.0’[13]시대를 넘어 코로나 19 이후, 휴머니티(Humanity)를 향한 기술의 ‘마켓 5.0’[14]시대의 필요한 사유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욕망하는 걸까?


부족한 것 없는 세상에서 자라 성취와 쾌락을 얻는데 집착하지 않는 '욕망하지 않는 세대'[15]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16]이 말한 행복의 다섯가지 조건 중 '긍정적인 인간관계, 의미, 몰입'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들은 단순히 ‘아웃풋(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어떻게-철학과 가치관을 담은 왜)’를 공유하는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17] 일정한 기준으로 측정 가능하며 우열을 가릴 수 있고 복제가 가능한 ‘무엇’보다는 그 사람, 그 브랜드만의 태도가 갖는 가치관과 아이디어, 취향에서 오는 ‘왜’는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프로세스를 공유하면서 BTS와 팬들은 함께 삶을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BTS는 자신의 ‘왜’가 담긴 노랫말들로 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스며든다. 팬클럽 아미(ARMY)는 기꺼이 세컨드 크리에이터(second creator)가 되어 전 세계의 주요 도시에 BTS의 광고를 내걸어 아티스트와 그들의 음악을 자발적으로 홍보한다. BTS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시간 촘촘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필연적 결과다.[18]


‘마켓 5.0’ 시대는 상품을 만들기 전 고민의 총량과 만드는 과정에서의 단계별 충실함이 담긴 프로세스를 팔아야 한다.[19] ‘결과’가 아닌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을 고객들과 공유하면서 오리지널 가치를 창출해내는 새로운 프레임 ‘프로세스 이코노미 (process economy)’가 전략적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답주의’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언제라도 중간에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수정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20]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정답을 도출해내는 데 골몰하기 보다는 미완의 작품을 일단 대중 앞에 선 보인 다음 그들에게서 다양한 의견을 받아 끊임없이 고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프로세스 이코노미의 함정을 주의해야 한다. 내가 아닌 대중이 주체가 되고 타자의 시선에 갇히는 순간 내 안의 ‘왜’를 잃게 됨과 동시에 매력과 고유성을 상실하게 된다. 타인이 만들어낸 허상에 잠식되지 않도록 나의 ‘왜’를 항상 되새겨야 한다.[21] 항상 스스로 묻고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중요하다.


목표를 향해 가성비를 따지며 최단 거리로 뛰어가기 보다는 우연의 사고를 만날 수 있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문제 해결에 매몰되기 보다는 재미있게 산책함과 동시에 마음을 챙기는 것. 그것이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말하는 21세기 ‘산책자의 사유’가 아닐까?








[1]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을 고객들과 공유하면서 오리지널 가치를 창출해내는 새로운 프레임 

[2]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

[3] 보들레르가 《모던한 삶(근대 생활)의 화가》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로, 현재의 특수성에 대한 고조된 감수성, 미래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믿음 등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4]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 221

[5] 윤미애, <발터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문학동네, 2021, p.17 

[6]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

[7] 어떤 추상적 관념을 드러내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 은유법이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8] 윤미애, <발터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문학동네, 2021, p.20

[9] 윤미애, <발터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문학동네, 2021, p.21 

[10]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101 

[11] 교토 대학교 대학원 공학연구과를 수료했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맥킨지앤드컴퍼니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기업에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를 여러 차례 성공시켰다. 저서는《놀 줄 아는 그들의 반격》, 《플랫폼이다》, 《나는 왜 구글을 그만두고 라쿠텐으로 갔을까》 등이 있다. 공저로 참여한 《애프터 디지털》은 일본에서 15만 부 이상 팔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12] 이념(생각, 견해)은 영원한 성좌이다. 요소들이 일종의 점들로써 그러한 성좌 속에서 파악됨으로써 현상들은 분할되는 동시에 구제된다. 그러나, 별자리가 밤하늘 전체를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세계 자체를 포괄할 수 있는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이념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주의로 이해하고자 하는 순간 폭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13] 제품(1.0), 소비자(2.0), 인간/가치와 스토리(3.0) 시대를 넘어 디지털 마케팅으로의 전환 시대(전통적 마케팅에서 디지털 마케팅으로) 

[14] 휴머니티를 지향한 기술 활용 시대

[15]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29.

[16]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심리학과의 심리학 교수이자 심리학자, 교육인, 자조론 서적 저자이다. 셀리그먼은 긍정심리학 이론과 웰빙의 과학 커뮤니티의 강력한 옹호자이다. 그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은 과학, 임상심리학자들 간 대중화된 이론이다. 2002년 출간된 리뷰 오브 제너럴 사이콜로지(Review of General Psychology)의 조사에 따르면 셀리그먼은 20세기에 31번째로 많이 인용된 심리학자로 순위를 올렸다. 

[17]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29.

[18]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p.149~151 

[19]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 송길영, <프로세스 이코노미> 추천사

[20]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93

[21] 오바라 가즈히로, 이정미 역, <프로세스 이코노미>, 인플루엔셜, 2022,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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