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는 했겠지! 공룡과 단둘이 뚜벅이 여행

항시 긴장하라!

by VetStella

해변가 정 가운데 정동진 기차역에 딱 내리는 순간


우와..... 우와~~ 너무 이쁘다.라는 말이 연신 나왔다.


겨울인데도 따뜻한 날씨에

구름 하나 없는 푸른 하늘에 파아란 바다.

적당히 센 바람으로 파도도 꽤 거셌다.

동해바다가 이렇게 맑았던가?

정동진역 쉼터안에서



25년도 한 해는 한꺼번에 많은 변화를 이뤘다.

동물병원에서 침치료 진료를 새로 도입했고, 그동안 장롱 속에 있던 운전면허를 드디어 꺼내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동시에 현 직장 외에 개원준비도 진행했다.


내 안에는 도전하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항상 함께 있었다.
둘은 늘 엎치락뒤치락했고, 나는 두려움을 질질 끌고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장소에 적응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리고 불편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내색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운전대를 잡기까지 유튜브로 공부하고 출퇴근길 도로를 미리 다 외워서 언제 차선을 바꿀지 시뮬레이션을 해서야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성향이 25년도에는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웠고, 시도했고, 변화했다.


25년 12월의 유방암 선고는 내 변화의 트리거는 아니었다. 이미 25년도에 내 변화의 의지는 강력했고, 닥치는 대로 두려움을 끌어안고 달렸다. 오히려 내 변화의 속도를 늦춰주는 브레이크 역할이었다.

워-워 진정하라.


25년도 하반기에 들어서부터 막연하게 아들과 나, 둘만의 시간을 쌓고 싶었다. 차곡차곡 아들이 성장하는 시간 동안 나와 아들 모든 걸 책임지고 혼자 걸어가 보는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막연함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준 것도 바로 암 선고였다.

25년 12월 처음으로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수술과 치료가 시작되면 언제 아이와 단 둘이 떠날 수 있을지 몰라 주말 진료를 다 옮기고 당장 움직였다.


동료들에게 기차로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아이와 떠나는 여행지의 포인트는

기차역과 가까울 것

주변 놀이 거리가 있어야 할 것. 볼 것이 아니고 놀 것!


아침 7시에 눈을 떠서 밤 10시까지 잠시도 쉬지 못하는 파워 에너지를 가진 아들이기에 반드시 에너지를 빼 줄 놀 거리가 있어야 한다. 느릿하고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면서 살아가는 나에게서 선생님들과, 다른 아들맘들의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아들이 나왔다니…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하구나!


그렇게 해서 선정된 곳이 바로 정동진.

어릴 적 드라마에도 나왔던 이곳은 한창 새벽 열차가 유행이었다.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정동진을 선정한 결정적 이유는 아들의 구미를 당겨줄 크루즈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전동' 레일바이크도 있었다.

딱 보자마자 아들이 보면 좋아할 거 같았다. 더 이상의 고민 없이 바다가 눈앞에 보이고, 욕조가 있는 객실로 픽! 해서 예약을 했다.

멋모르고 예약했지만 아들 데리고 가는 뚜벅이 여행자에겐 신의 한 수였다.


호텔에서 보이는 바다
아들: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구나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왕복 KTX 기차권을 예약했다.

수백 번 하지 마라 말을 해도, 아이의 진정되지 않는 소동과 앞 좌석을 발로 팡팡 차는 걸 멈추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아석이 있는 칸에, 앞 좌석이 없는 맨 앞자리를 예약했다. 유아석이 있는 칸이라면 다른 아이들의 소음으로 조금은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항상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마다 공공장소에 들어서면 긴장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어릴 적 좀비가 나타나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시뮬레이션하면서 머릿속으로 준비하는 걸 좋아했다. 배낭에는 뭘 넣고, 어디로 빠르게 탈출할까. 아주 사소한 상황까지도 상상하는 게 재미있었다. 재난이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선다는 것은 재난 상황과 비슷하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공룡 한 마리와 나가는 서바이벌이라고나 할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토출, 재빠르게 바닥을 손으로라도 쓸어내며 닦아내는 임기응변력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이의 폭발적인 짜증, 아이의 흥미를 잠시라도 멈추게 할 수 없는 10분 단위 동선의 설계가 필요했다.


비닐봉지와 물티슈

아이 해열제와 외상 치료용 비상약

아이의 여벌옷들, 속옷들

당이 떨어지기 전에 입을 막아줄 간식들

기차에서 버틸 영상기기와 이어폰

호텔에서 머무는 시간을 즐겁게 해줄 무지개 빛 오로라 버블 입욕제

낯선 곳에서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푸푸 인형

그리고 나의 속옷 한 벌


여행 중에 통제 불가한 아들의 투정과 짜증이 간헐적으로 맛소금 치듯 치고 들어왔지만 그래도 완벽했고,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휴가였다.

시간에 쫓겨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라 나의 속도에 맞출 수 있는 여행이었다.


내가 힘이 빠져 있을 땐,

나 대신 바다가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심심할 틈이 없이 모든 공간을 채워주는 파도 소리, 그리고 아이의 촉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래사장 속 조개들. 예측 불가하게 돌진하는 파도들.






그리고 그 파도에 돌진하는 아이. 안돼에~~!!!


여벌 옷은 챙겼지만, 여벌 신발은 챙기지 못한 나의 중대한 실수였다.


체크아웃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닷물에 흠뻑 젖은 아이를 다시 호텔 로비로 데리고 들어가 전날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히고 흠뻑 젖어버린 털 장화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최대한 물을 빼고, 챙겨 온 비닐을 발에 꽁꽁 싸매서 장화에 묶고 더 이상 양말이 젖지 않도록 했다.

한 겨울에 열 발자국마다 비닐이 슬슬슬 내려와 양말이 자꾸 젖었고, 안 그래도 발이 시려운데 양말까지 젖어들어오니 아이의 분노 게이지는 점점 올라갔다.


비상이다! 공룡이 포효를 하기 시작한다.


어쩌지… 어쩌지… 이곳에 신발 파는 곳이 있을 리가 없고.

날뛰는 공룡을 달랬다가 혼냈다가 엄마의 노고를 호소하면서 겨우 정동진역 앞 편의점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박스테이프와 성인 양말 한 켤레를 구입하고 가위를 빌렸다. 편의점 사장님은 이상한 조합을 요청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요 앞에서 가위 쓰고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하고 난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서 아이에게 무릎까지 오는 성인 남자 양말을 신기고 비닐을 무릎까지 덮은 다음에 더 이상 비닐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박스테이프로 바지에 칭칭 감았다. 누가 보면 전쟁통에 피난 가는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고 서울까지 갈 수밖에.


비닐로 무릎까지 꽁꽁 싸맨 귀여운 공룡


그 이후로 아들의 보물찾기 1등 보물은 바로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



수술 후 누워있는 엄마에게 떠다 준 물과 메세지


이전 07화수술 전 준비, 여행 전 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