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환자 역할 해볼까?
나는 국소마취만 하고 유방암 수술을 한다. 까짓, 제왕절개할 때도 의식 있는 채로 개복해 봤잖아.
휴직 전 동료에게
"쌤, 나 국소마취하고 수술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세요. 너무 싫어. 나 제왕절개 때도 너무 무서웠는데. 그걸 어떻게 해. 그냥 재워달라고 해요."
"그런가? 회복도 빠르고 좋을 거 같은데..."
너무 안일한 생각인가? 뭐, 국소마취는 내 선택은 아니었다.
사지 멀쩡한 나는 베드에 누워 수술 준비실로 배달되었다.
이제 환자 역할 해볼까?
병원 로비나 진료실에서의 딱딱하고 단정한 분위기와는 달리 수술 준비실 문턱을 넘어서면 그들만의 사적인 대화들로 가득 찬다.
나는 커다란 먼지 덩어리마냥 눈을 감고 베드에 누워 그 소란 속에 대화를 들어본다.
18번 수술방.
상의를 벗고 헐렁이는 하의는 고무줄로 묶은 채로 술방 가운데 베드에 누워 목에서부터 우측 가슴 우측 겨드랑이 구석구석 차가운 소독을 한다.
포비돈인가?
내 모습이 마치 진흙 마사지한 모습이겠군.
오른팔을 양팔 나란히 하듯이 벌려 팔 고정 베드에 묶이고
왼쪽 종아리 밑에는 차가운 보비 패드를 붙이고 다리를 결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목에서 채혈을 한다.
술방이 춥고 내 말단부 혈관이 수축해서인지 혈관 찾기가 어려운가 보다.
오른쪽 발목에 토니캣으로 노장을 하고 찰싹찰싹하다가 잘 노출이 안되는지 또 하나의 토니캣을 가져와 왼쪽 발목도 묶어둔다.
혹시 모를 실패를 위해 미리 왼쪽 발목 혈관을 노장시켜 두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느껴졌고...
부디 한 번에 성공해 주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혈관이 얇아 실패가 잦은 나는 카테터 진입은 항상 긴장하게 만든다.
작은 바늘이 꾸욱 꾹 쑤시는 느낌이 참을만하면서도 끄윽.... 속으로 이제 그만을 외친다.
위치도 다양하게 며칠 동안 바늘을 20여 번을 꽂은 거 같다.
드디어 차가운 알코올솜이 내 오른쪽 발목을 적시고 카테터가 진입했다.
역시나 고전하는 듯하다.
내 피부 안에서 혈관을 찾기 위해 이 방향, 저 방향
바늘이 틀어진다. 아... 이때가 고비다.
마음속으로 제발, 제발 찾아라...
정말 기특한 것이
왼쪽 검지에 끼인 SpO2 클립을 통해 내 심박을 듣게 되는데
카테터가 피부밑을 휘젓고 있는 상황에도 내 심박은 빨라지지 않고 일정했다.
오~ 멘탈갑?!
이때부터 혼자만의 게임을 시작했다.
얼굴 위까지 얇은 멸균 수술포가 덮이고
눈을 뜨면 얇은 멸균포 사이로 무영등이 비춘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술방을 메우지만
음악은 무색하게 수술 도구들이 내 몸 위에 묵직하게 깔리며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내 몸을 눌러주는 수술기구들이 날 안정시킨다.
강아지들도 thunderphobia가 있을 때는 포대기 감싸듯 적당한 압박으로 온몸을 감싸면 좀 진정이 되듯이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꼬옥 감싸면 안정감을 느끼듯이
내 몸에 깔린 멸균포 위에 수술기구들이 펼쳐지며 눌러지는 적당한 압박감이 안정감을 주었다.
이 장면은 익숙하다.
나는 누워서 눈을 감고 있지만 소리만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그려진다.
그리고 부드럽고 차분하지만 주저 없는 교수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이제 시작할게요. 국소마취를 할 건데 이게 수술 중에 제일 아픈 거예요. 수술하다가 불편하거나 아프면 바로 말해주세요."
교수님이 내 오른팔과 내 몸 사이에 있다는 게 느껴진다.
결박당한 내 오른팔 위로 집도의 교수님 몸이 살짝 기대는 무게감도 느껴진다.
그마저도 난 안정감을 느꼈다.
꾸욱 꾸욱
여러 차례의 리도카인 주입이 느껴진다.
그리고 메스로 절개 전 출혈을 최소화하기 위함인지 절개 직전 유방을 꽈악 잡아 누른다.
내 귀는 소리에 집중한다.
일정하게 흐르는 나의 심박소리.
국소 마취이기 때문에
통증이 느껴지거나, 두려움이 강해지면 심박이 빨라질 거 같았다.
웬걸, 나의 심박은 의외로 담담하고 일정하게 들렸다.
나의 게임은 이랬다.
심박이 빨라지면 속으로 '괜찮다. 천천히, 천천히' 이렇게 달래서 심박을 늦추는 것.
교감신경 반응으로 심박이 빨라지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심박을 모니터링해 본 결과 통증보다는 심리적인 게 작용이 커 보였다.
국소 마취하에서는 술부가 잡아 당겨지고 눌리는 느낌과 수술 기구 소리, 혈관 지지는 냄새 등 통증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그대로 들어온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피부가 떨어지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감.
"보비, 디바키, 보비, 디바키....."
빠르게 이 말이 들리는 거 보면 자잘한 혈관들이 많은가 보다.
'혈관을 지혈하면서 분리를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이 스치는 찰나에 갑자기 심박이 살짝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의식적으로 날 달래고 신기하게도 곧 심박이 안정된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심박 안정화 게임을 이어갔다.
절개 후 한 시간여 정도가 지났을까...
공허해진 내 가슴에 인공진피가 채워지자,
곧이어 차분함에 살짝 기분 좋은 흥분감이 얹힌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술은 잘 끝났고 마진도 깨끗한 거 확인해서 마무리할 거예요. 2주 후에 병리 검사 결과가 나오는데 이변이 없는 한은 항암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방사선 치료와 항호르몬약 저용량으로 쓸 거예요. 그러면 몸도 덜 피곤하고, 예방 효과도 있을 거예요."
나이스! 드디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