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예술 작품 같은 패셔너블한 레이블, 독창적인 네이밍. 바로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다.
사실 나에겐 미국 와인은 프랑스 와인보다 복합미가 덜 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프랑스 와인은 하나로 표현할 수가 없는 데에 비해, 미국 와인은 뚜렷한 경향성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린 스위프트'를 추천할 때에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12월, 하와이 여행을 갔을 때 와인 샵이나 마트, 편의점에 빠지지 않고 진열되어 있는 바람에 오린 스위프트를 접했고, 이는 내가 가진 미국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콘이 된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의 시작
세인트 헬레나에 위치한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
오린 스위프트 와인 셀러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지 중 하나인 세인트 헬레나에 위치하고 있다.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의 시작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인 데이비드 스위프트 피니는 1995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며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대학교 졸업 이후 미국의 유명 와이너리인 로버트 몬다비에서 포도 수확 업무를 하며, 자신의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3년 뒤인 1998년에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를 설립했는데, Orin은 그의 아버지의 미들 네임에서, Swift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 전 가졌던 성에서 가져왔다. 그 뒤로 10여 년간 그는 진판델과 다양한 품종들을 통해 와인을 만들었고, 지금의 오린 스위프트가 되었다고 한다.
오린 스위프트는 단지 와인 메이커로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하나하나 의미를 담고 있는 네이밍과 레이블, 그 안에 담겨있는 스토리, 레이블 아트 전시회 등의 마케팅까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브랜딩을 보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 스위프트 피니는 와이너리 설립자, 와인 메이커가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마케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와인을 한 병 한 병 마시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오린 스위프트 마체테의 12가지 레이블
Orin Swift Machete 2017
오린 스위프트 마체테 2017
Red Wine from California, USA
Pairing with 드라이 에이징 티본스테이크, 차이브를 뿌린 양고기
내가 가장 처음 맛본 오린 스위프트 와인은 마체테이다. 마체테는 12가지의 다른 레이블로 유명하다. 가장 패셔너블한 와인이라고나 할까. 마체테(Machete)는 '칼이 넓고 무거운 칼'을 뜻하는 단어로, 패션모델 같은 여성이 큰 칼을 들고 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레이블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다.
양고기와 티본 스테이크와 페어링 한 오린 스위프트 마체테
마체테는 쁘띠 시라를 베이스로 시라와 그르나슈가 블렌딩 된 캘리포니안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다. 모든 사람의 이와 입천장을 보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강렬한 와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두운 과실의 쥬이시하고 스파이시한 향, 월넛 향이 주를 이룬다. 드라이 에이징 된 티본스테이크와 먹었더니, 바닐라 느낌이 올라오면서 마치 호두 마루 아이스크림을 먹는 듯 부드러운 풍미가 입안을 감돈다. 생각했던 강렬한 느낌의 와인이 아니라 의아했지만,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이것이 마리아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차이브를 뿌린 양고기를 페어링 해보니, 이전과는 다른 가죽의 터프함과 페퍼의 스파이시한 풍미가 올라왔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은 전자였지만, '마체테 다움'은 후자의 페어링에 있었다.
같은 와인이라도 같이 먹는 음식과 시간에 따라 느껴지는 풍미가 다른 것이 와인을 마시면서 제일 즐거운 포인트인데, 이런 변화가 굉장히 두드러지는 와인 중 하나였다.
잡지 콜라주로 만들어진 오린 스위프트 앱스트랙트 레이블
Orin Swift Abstract 2019
오린 스위프트 앱스트랙트 2019
Red Wine from California, USA
Pairing with 토마호크 스테이크, 양고기
오린 스위트프 앱스트랙트는 마체테와 마찬가지로 쁘띠 시라와 시라, 그르나슈가 블렌딩 된 캘리포니안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다. 여러 사진들이 콜라주 된 듯한 와인 레이블은 와인 메이커가 3년 간 수집한 잡지 중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모아 2주간 작업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스테이크와 페어링 한 오린 스위프트 앱스트랙트
앱스트랙트는 정말 맛있어서 하와이에 있을 때 한 병을 마시고, 한 병을 더 사온 와인이다. 고로 짧은 기간 내 두 번을 마셔보았는데, 페어링 한 음식에 따라 색다른 풍미를 경험할 수 있었던 와인이었다.
처음 마셨을 때는 타바코, 스파이스, 찐찐한 블루베리나 진한 스트로베리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혀에 아주 강하게 남는 탄닌, 그러나 또 심하게 드라이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베테랑의 느낌. 한잔에도 온몸이 뜨끈뜨끈해지는 힘이 있는 와인이었다. 양고기와 페어링을 했더니 스파이시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 마셨을 때는 열자마자 화사한 꽃과 블루베리 향이 병목을 지나 미친 듯이 퍼져 나왔다. 다른 말 다 필요 없이 내 기분까지 화사하게 만드는 와인이었다. 토마호크 스테이크와 페어링 하니 고급진 바닐라의 피니쉬가 느껴진다. 처음 이 와인을 마셨을 때는 분명히 베테랑의 남성 느낌이었는데, 두 번째 마실 때는 머스크 같이 화사한 중성의 느낌이 났다.
뭐랄까, 하나로 표현되지 않음이 그야말로 추상적인(Abstract) 느낌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사막을 표현한 오린 스위프트 에잇 이어즈 인 더 데저트 레이블
Orin Swift 8 Years in the Dessert 2018
오린 스위프트 에잇 이어즈 인 더 데저트 2018
Red Wine from California, USA
Pairing with 삼겹살, 목살, 이베리코
오린 스위프트 에잇 이어즈 인 더 데저트는 오린 스위프트의 캘리포니아에 대한 오마주이다. 레이블에는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사막이 다양하게 담겨있고, 캘리포니아 품종인 진판델을 필두로 쁘띠 시라와 시라를 블렌딩 한 캘리포니안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다.
삼겹살, 목살, 이베리코와 페어링 한 오린 스위프트 에잇 이어즈 인 더 데저트
처음에 향을 맡고서 너무 놀랐다. 진판델을 이렇게 은은하게 소화할 수 있다니. 그동안 마셔왔던 미국의 진판델은 비교적 묵직하고 검푸른 과실 향이 넘실 거리는 캐릭터를 가졌었다면, 오린 스위프트의 진판델은 마치 향수 같은 은은한 매력이 있었다. 보랏빛 소박하고 은은한 꽃, 향수, 허브의 스파이시함, 마실 수록 올라오는 초콜릿 느낌이 합쳐져 은은하고 가녀린 느낌의 진판델이 탄생했다.
내가 오린 스위프트에 완전히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미국 와인에 편견이 깨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에잇 이어즈 인 더 데저트였다.
나비의 의미와는 대조적인 거칠고 투박한 농부의 손이 올려진 오린 스위프트 빠삐용
Orin Swift Pappillon 2017
오린 스위프트 빠삐용 2017
Red Wine from Napa Valley, USA
Pairing with 피자, 훈제고기
오린 스위프트 빠삐용은 가히 모순적인 와인이다. 프랑스어로 '나비'를 의미하는 빠삐용은 섬세하고 우아하지만, 와인 레이블에 표현된 농부의 손은 그렇지 않다. 거칠고, 투박하다. 이 와인의 풍미 역시 와인의 이름인 '나비'와 레이블의 '농부의 손'의 관계처럼 변증법적이라고 와인메이커는 표현하고 있다. 첫 시작은 압도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열릴수록 우아한 와인으로 변한다는 것.
오린 스위프트 빠삐용은 까베르네 쇼비뇽, 까베르네 프랑, 말벡, 쁘띠 베르도, 메를로 총 5가지의 포도가 보르도 스타일로 블렌딩 된 레드 와인이다.
가장 놀라운 건 와인을 열자마자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향이다. 흙과 찐찐한 말린 자두, 스파이스, 약간의 마가린, 보랏빛 꽃향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탄닌감도 세고, 바디감이 묵직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메이커가 말한 것처럼 은은하고 그윽한 매력을 풍긴다. 향수같이 은은한 꽃 향, 짙은 보랏빛 향, 혀에 남는 모든 풍미가 우아하고 완벽했다. 과연 '농부의 손'을 가진 '나비'라고 할만하겠다.
오린 스위프트를 연달아 몇 병을 마셔보니 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미국 와인은 굉장히 직선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린 스위프트 와인은 은은한 구석이 있다. 마치 여러 가지의 노트가 차곡차곡 레이어링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풍미를 자랑하는 잘 만들어진 향수 같다고나 할까. 페어링 하는 음식에 따라서 180도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