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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Nov 09. 201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가벼움과 무거움, 지난한 체코역사로 읽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번도 읽기 힘들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양한 기회로 인해 벌써 세번이나 읽게 되었다. 대학생 때 처음 읽었을 땐 중간 쯤 읽다가 집어던졌고, 작년말에 읽었을 땐 이들의 관계에 빗대어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올해는 체코 여행이란 타이밍 좋은 기회 덕분에 체코의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 소설을 정말 깊게 이해한 것 같다. 만약 네번째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땐 니체의 사상에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1. 가벼움은 곧 무거움, 무거움은 곧 가벼움

밀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번 사는 인생은 한 번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러므로 깃털처럼 가볍다고. 만약에 우리의 삶이, 전쟁이, 고통이 2번, 3번 반복된다면 그 아픔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무겁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가벼움이 나쁜 것이고, 무거움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이지, 좋고 나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결국,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것이 꼭 양극단에 있는 것인지, 결국 그 두가지는 가까이 있는 사이, 혹은 같은 것이 아닐지에 대한 모순적인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 이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딱 한 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거운 게 아닌가? 보통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 제대로 살자!’라고 다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지금의 삶을 두 번, 세 번의 삶을 반복한다면 오히려 더이상은 이렇게 열심히 사는게 지겹기 때문에 처음부터 더욱 가볍게 인생을 살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

너무나도 고귀한 삶을 살았던 스탈린의 아들이 이야기하기도 뭐한 똥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처럼 결국 무거움과 가벼움도, 고귀함과 천박함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가릴 수 없을뿐더러, 양극단과 동일함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라는 자못 무겁고 진지한 문장에서 태어난 토마시는 이성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영혼과 육체의 사랑을 분리하며 우리가 통속적으로 얘기하는 가벼운 사랑을 하는 듯 하지만, 또 동시에 어느날 자신에게 던져진 테레자의 운명을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직업이나 사상에 있어서는 무겁게 삶을 이어나가는 만큼 토마시는 무거우면서도 또 가벼운 인물이다.


테레자는 어머니 육체의 희생으로부터 태어나 원죄의 의식을 달고 무겁게 태어난 캐릭터이다. 자신이 체코를 위해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묵직하게 해냈던 사진 찍는 일이 결국에는 공산당을 위해 한 행동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벼움으로 치부되어 무차별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이 소설에서 그 누구도 극단적으로 가볍거나 무겁지 않고, 또 그들의 행동이 무조건 가볍거나 무겁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가벼운가? 그래서 가벼운 건 나쁜 것이고, 무거운 건 좋은 것인가?

사람들은 결과만을 보고, 테레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녀를 나쁘다 비난할 수 있을까? 반대로, 테레자의 행동이 무거운 사명감에 의해 행해졌더라도 결국엔 바보같은 행동이었다면 테레자는 비난받지 않아야 할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이다.


'프라하의 봄', '벨벳혁명' 등이 일어난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201810, 오수진
프라하의 존 레논의 벽. 공산당이 집권 시 존 레논의 'Imagine'을 들으며 자유를 갈망했던 체코인들, 201810, 오수진



2. 국가의 역사 속에서 참을 수 없이 가벼웠던 개인의 역사

체코의 역사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이야기한다면 주제 넘는 것일까. 물론 내가 이야기하는 가벼움은 입이 가볍거나 줏대없이 팔랑거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체코는 나치집권 때부터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단 한번도 본인들의 의지로 역사를 써내려갈 수 없었다. 주변국에 의해 많이 흔들렸다는 의미다. 뮌헨 협정 때에는 나치가 프라하를 둘러싸,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설득으로 인해 프라하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프라하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붕괴된 건물이 구시청사 한 곳 뿐이었고, 쿤데라는 이를 가리켜 체코인들은 그 역사를 부끄러워했다고 서술한다. 나치가 물러나고 공산당이 집권할 때에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프라하의 봄이 소련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이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그 후 20년간 체코는 뭘 해도 안되리란 냉소주의에 쩌들어 있었다. 두 명의 체코 대학생들이 자신들은 공산당 보다 체념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체코인들이 싫다며 '체코인들이여, 깨어나라'라고 분신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냉소주의는 체코를 뒤덮었다. 그렇기에 쿤데라의 어조는 이다지도 냉소적이었고, 공산당 집권이 끝난 후에 1988년에 이 소설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국가의 역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체코인들의 역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토마시가 반동분자로 여겨져 공산당이나 개혁당에 끝없이 의지를 종용당하다가 결국 의사직을 그만두고 시골의 유리창닦이로 살게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의지나 의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고 그러한 시대에서 그들 개개인의 운명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았다.



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의미에 대해

그래서 나는 이렇게나 매력적인 이 소설의 제목을 두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 양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울 수도 심지어 같은 것일수도 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토마시는 9번의 우연들이 합쳐져 테레자를 만난 것이, 결국 그 우연을 다른 사람이 겪었다면 테레자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거란 생각 때문에 이 사랑이 가벼운 산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우연이 하나하나가 중요했고, 그 중요한 점 하나 하나가 만나 인연을 이루었으니 이건 가벼움인 동시에 무거움이라 여길 수도 있다.

결국 무거움과 가벼움은 양극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같기도 때로는 가깝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곧 존재의 무거움일 수 있.

두번째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곧 체코의 지난한 역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주변국들에 치여 역사를 스스로 써내려갈 수 없었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그들 국가의 역사 속에서 개인들의 역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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