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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Nov 15. 2018

결혼 안 해도 되나 카레니나

결혼 안 하면 피곤한 시대에 읽는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2012년 개봉한 키이라 나이틀리, 주드 로, 애런 존슨 주연의 영화 <안나 카레니나>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가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주드 로, 애런 존슨이 연기한 <안나 카레니나>이다. 극 중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타는 사랑이 연극처럼 연출된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래서 콘텐츠는 역시 원작이지, 하는 마음으로 올해 초 총 3부작의 기나긴 안나 카레니나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동안 2차 가공된 영화나 뮤지컬 등을 통해 접했던 것보다, 책은 더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세 권에 삶과 죽음, 부르주아와 농노의 계급 사회, 결혼과 연애, 종교와 정치 등을 모두 꾹꾹 눌러 담았다.


다른 주제의식들 모두 느끼는 바가 컸지만, 특히 나는 결혼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았다.


2008년 개봉한 손예진, 故김주혁 주연의 <아내가 결혼했다> 포스터.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벗어난 내용으로 원작부터 이슈가 됐다


결혼 제도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결혼 제도가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는 명확하게 짚을 수는 없지만, 각 시대마다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결혼 제도가 필요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원시 시대 때에는 자식이 아버지와 같은 핏줄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결혼 제도가 생겼다 한다(*나무 위키). 자본주의 초기에는 계속해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화두로 올랐고, 그래서 건강한 노동력을 끊임없이 제공받기 위해 결혼 제도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는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동안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여겨왔지만, 이렇듯 인류가 본래, 반드시 행해야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게 우리가 만든 결혼이라는 제도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


만약 결혼 제도가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고 있다고 하니 아는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 그 불륜 소설?'. 톨스토이의 3권에 해당하는 대서사시가 한순간에 불륜 소설로 귀결되는 순간이었다. 안나는 단순히 불륜녀일까? 물론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표면만 보면,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을 놔두고 내연남과 불륜을 저지른 파렴치한 여성이다. 
하지만, 책 세 권에 녹아있는 그녀의 고뇌를 보노라면, 그녀가 결혼제도로 인해 불행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랑도 하지 않는, 20살이나 차이나는 카레닌과 결혼을 했어야만 했던 안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세도 없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속되었다. 그 제도 안에서, 자신이 카레닌의 ‘부인’으로서 행해야 할 일을 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제하며 그렇게 ‘자신’을 잃으며 살아왔다. 특히나 매우 보수적이고, 경직되어있는 카레닌의 아내로 살기 위해 그녀는 더더욱 자신을 절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는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이 잊고 있던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두 사람. 그러나 결국 그들의 사랑도 결혼이란 제도에 억눌려 안나는 비극적으로 삶을 끝내고 만다. 자신과 안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위해 안나가 이혼하기만을 바랬던 브론스키, 그와 동시에 똑같이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위해 이혼을 불허했던 카레닌 사이에서 안나는 시름시름 앓아갔다. 물론 이것을 두고 불륜녀라면 당해도 싸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본다면, 애초에 결혼이란 제도가 없었으면 모두 이토록 불행하진 않았을 터다.


이건 너무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케이스가 아니냐고?

이들과 달리, 해피엔딩을 맞은 키티와 레빈을 봐도 마찬가지다. 140년 전에 쓰인 <안나 카레니나> 소설에서 남성은 자신이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에게 반드시 청혼을 해야 하고,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면 여성은 선택권이 없다. 그녀가 레빈을 마음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렸던 이유다. 하지만, 만약 그랬던 남성이 청혼을 하지 않으면 불행이 시작된다. 그 여성은 마치 결혼을 못하여 불행한 여자로 낙인이 찍힌다. 키티가 한동안 얼마나 불행했는지 생각해 보라! 지금 보아도 이런 결혼 문화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똑같이 강압적이다.


2018년 듀오 회원수 및 성혼 회원수



1877년 발행된 <안나 카레니나> 속 사회, 그리고 2018년

이런 모습은 21세기인 지금의 모습과 아주 다르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 적령기가 되면 으레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결혼을 하지 못한 여성과 남성은 모두 자신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을 빨리 결혼이란 제도에 떨이로라도 팔아버리고자 초조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보다, 결혼할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결혼이란 제도는 결국,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우리를 억압한다. 물론, 결혼의 장점도 많고, 결혼이 너무 좋다는 부부들도 많다. 하지만, 그건 결혼이란 제도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왜 우리는 이토록 제도에 억압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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