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인연
'사소한 보리라떼: 고소한 아몬드와 수제 보리크림과 보리과자까지 달콤함, 고소함, 바삭함의 행복한 만남'
어느 날 SNS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의 새로운 겨울 메뉴를 판매한다는 게시글을 읽었다. 이곳에서 웬만한 음료와 디저트를 다 접해본 나는 사소한 보리라떼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궁금스러운 겨울 메뉴를 온전히 마셔보는 날을 기대하며 최대한 평범하고 무난한 하루를 찾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바로 어제,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은 햇살이 무척 따스했다. 이 나른한 오후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며 우선 점심은 간단하게 '스팸계란덮밥'을 해 먹기로 정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니 아침에 창문 가장자리로 드리운 햇빛이 서서히 가운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책상에 풀과 나무들을 옮겨 놓고 나도 햇살을 맞이할 채비를 마쳤다.
걸어서 10분 거리, 정말 이상적인 거리이다. 적당한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기분 좋게 걸어갈 수 있는 위치에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이어폰을 통해 흐르는 세 번째 노래가 끝나가니 어느새 카페 앞에 다다랐고 잠시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가볍다
손잡이도 문도 문에 달린 창문도 모두 가볍다. 그래서 날 더욱 반겨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곧바로 사장님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습관처럼 메뉴를 확인한다. 역시 보리라떼를 맛보기로 결정하고 주문을 하는 동안 사장님과 첫 소담을 나누게 되었다. 내가 SNS에서 신메뉴를 보고 먹어볼 날을 기대했다는 이야기에 이어 서로의 SNS 개인 계정의 팔로우를 보냈고, 이곳 3층에는 본인의 작업실 겸 생활하는 공간이 있으니 나중에 편한 시간대에 한번 놀러 오라는 설레는 이야기를 나눴다. 자리에 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 사장님의 계정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주를 잇는지 구경을 했다.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들, 저마다의 감성이 있는 크고 작은 소품들, 식당에서 판매할 거 같은 음식 사진들.
곧이어 사장님께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직접 보리라떼를 전해주셨다. 누구나 그렇듯 궁금한 음식이나 음료 앞에선 각자의 신중한 태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대게 그렇다. 음식이 나오고 나면, 먼저 '보고', 그다음 '맡고', 이어서 '머금고', 마지막으로 '느끼는'것 까지가 나의 태도이다. 향에서 느껴지는 보리와 곡물이 섞인 듯한 연하지만 깊은 향, 되게 부드럽고 묽은 보리크림이 보리의 향을 더 받아들이고 라떼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었고, 마지막으로 목구멍에 삼킨 뒤 콧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날숨에 고소한 보리향이 가득하여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너무 꽉 차지도 비어있지도 않은 적당한 북적거림에서 안정감이 전해졌다. 각자의 업무를 맡는 동안 나 또한 제 할 일을 하며 열심히 카페를 채웠다. 아마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타닥타닥하는 소음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여덟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할 일도 여유도 다 즐긴 터라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동시에 주방에선 사장님이 나오셨고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저녁 함께하는 게 어떠냐는 조심스러운 초대를 요청했다. 이런 즉흥적인 만남이 나에게는 난처한 상황에 속했지만 왜인지 모를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작업실을 직접 구경할 수 있다는 기회가 나를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공간에 서다
3층의 공간에 대해 처음 알게 되고 직접 본 순간부터는 내가 꿈을 꾸는 듯하였다. 정말 꿈에만 그리던 영화 같은 삶을 평범한 일상처럼 지내고 있는 이가 있구나. 이러한 공간에 감히 내가 발을 들이는 것도, 누군가의 프라이빗한 작업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인테리어를 비롯하여 이 공간에서 처음 느낀 건 빈티지스러워 낡은 듯 하지만 깔끔한 가구들의 배치와 잔잔한 조명의 조화가 집을 되려 풍성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흰색 벽면에 짙은색 나무 가구들이 주를 이뤘고 사이사이 신경 써서 배치해 놓은 크고 작은 소품들이 공간을 완성했다. 거기에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음악과 따스한 향까지 울려 퍼지니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이 되어 신비로운 그 공간에 와있는 듯하였다. 거기에 작은 창문이 달린 다락방까지 구경을 하고 나니 자연스레 그곳에 누워 창문 너머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상대방에 대해 알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인상보다 더 따스하고 섬세한 면이 보였다.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있었고, 상대의 사소한 반응이라도 소중히 여겨주는 배려까지 돋보였다. 그리고 나에 대해 '특별한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을 하셨다. 사실 나는 특별하다는 것에 관심이 없고 경계하는 편이기까지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내 글은 특별하고 특출하기보단 누구나 평범하게 언제든지 들여볼 수 있는 가볍고 무심한 글이 되기를 바라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 동화 속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어볼 수 있는 특별한 날엔 나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달갑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순간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세계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눠 순간순간 많은 것을 알고 배웠다. 너무 긴장한 탓에 나의 세계를 많이 소개해주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혹시나 실수한 것이 있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자리에 일어나니 갖고 계시던 필로우 미스트를 선물로 주셨다. 그렇게 3층에서 다시 1층까지, 마지막까지 나를 배웅해 주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오랜 벗과의 다시 만남을 기약하며 이별하는 사소하지만 따뜻한 안녕이 느껴졌다.
다시금 찾아온 일상
다시 특별한 날에서 현실로 돌아와 집으로 향하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실감이 가지 않았고, 불과 일 분 전에 있었던 그 상황까지 금세 흐려졌다. 방금 전 있었던 일과 선뜻 손을 내밀어주고 서로를 알아가던 그 사람까지 모두 사실 꿈이라고 해도, 그래도 그 꿈만 같은 시간을 느꼈다는 사실이 나의 내일을 더 설레고 힘차게 해 주었다. 문득 삶은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세상에 정말로 신이 있다면 나에겐 오늘이 내 인생에 신이 찾아온 그런 한순간이 아닐까 싶고, 우리 각자에게 저마다의 모습과 형태로 찾아올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보잘것없이 작고 적은 내게 잔잔한 힘과 용기를 전해준 그런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