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사회', 카롤린 엠케
오늘도 내 페북 친구들은 열정적으로 여혐반대 포스트를 올린다. 오랜만에 찾은 친정집에선 아버지가 극우 성향의 유투버 방송을 귀청이 떨어질 듯한 볼륨으로 듣고 계신다. 남편은 오늘 아침에도 ‘캠리 몰고 다니는 아시안 아줌마들’의 서툰 운전을 욕하고 레드넥과 트럼프가 없어져야 이 미친 세계가 좀 제대로 돌아갈 거라 굳게 믿고 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가까운 사람들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기로 결심한 지 오래되었다. 어차피 나는 이 ‘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니티니까. 옳고 그른 것보다는 관계가 더 소중하니까. 아끼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라는 이유를 대며 나는 입을 점점 닫았다. 호주 신문을 읽기보다 다음 연예 뉴스를 읽기 시작한 지도 한참이다. ‘내’ 사회가 아니야. ‘내’ 사람이 아니야. ‘내’ 할 일이 아니야.라는 치졸한 변명으로 스스로 목소리를 폐기한 후, 나는 점점 밋밋해지고. 보이지 않아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N번방의 소녀들은 울고 있었고, 프랑스 교사는 테러 집단에 참수당했으며, 내 아이는 눈이 작다고 백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30년 전 내가 당하던 것처럼.
자주 눈을 감았다. 때때로 울컥했고, 아주 가끔 인어공주 이야기를 떠올렸고.. 주로 잠을 잤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 어느 쪽이 맞다고 쉽게 손을 들어주기엔 아주 약간, 조금 깊게, 그들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것이 때로 연륜과 함께 찾아오는 지혜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를 안다. 그건 게으름이었고 협소한 이기심이었다는 걸. 다치기 싫어서, 귀찮아지기 싫어서 만들어낸 헛된 희망과 거짓된 평화라는 것을. 혐오에 맞서지 않는 나를 내가 누구보다 혐오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리와 이름이 없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 불안을 가리기 위해 자주 감정을 이용한다. 사랑. 걱정. 희망. 증오와 혐오.. 이러한 감정은 강하게 우리를 어느 위치로. 소속으로. 자리로 데려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을 준다. 그러기에 혐오하는 사람들이 가장 혐오에 갇혀있다.
내 안에 가득 눌러놓은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래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우선 혐오 그 자체를 직면하는 것이어야 했다. 내 안의 혐오와. 우리의 혐오와. 이 사회의 혐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바라보기. 그리하여 내가 어느 위치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지 알고, 말하고, 듣고, 행동해야만 자유로 나아갈 수 있기에.
그런 의미에서 카롤린 엠케의 ‘혐오 사회’(2017)란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돌아보는 것 같았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또한 성소수자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취재를 바탕으로 현 사회에 만연한 혐오라는 증상에 대해서 분석하고 이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그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의 사회와 역사 안에 존재했던 ‘보이지 않는’ 타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 책은 시작한다. 이 책의 차별성은 혐오의 현상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원인, 즉 누구는 보고, 누구는 보지 않는 소외와 차별의 시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증식되는지를 심층적으로 관찰해가며 ‘혐오’의 구조적 배경과 메커니즘에 집중한다는 데 있다.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인간의 감정들, 사랑. 희망. 걱정. 증오라는 감정을 차례차례 고찰해간다. 그 감정들의 원천과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조건, 그리고 어떻게 그 감정들이 왜곡될 수 있고 감춰질 수 있는지를 여러가지 사례를 통하여 관찰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이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조작되고 만들어진다는 것, 즉 혐오라는 감정 또한 만들어지며, 훈련되고 양성된다는 것이다.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이라는 요소로 무장한 ‘우리’라는 ‘사회적 표준’이 어떻게 혐오를 생성해내며 우리와 ‘다른/ 모호한/불순한’ 타자를 소외시키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선적인지를 저자는 난민, 인종, 성소수자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취재를 예로 들어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혐오와 폭력에 대한 관찰에 멈추지 않고 그 구조적 기저를 밝혀냄으로 인해 그것들이 중단되거나 전복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제시한다. 그것은 ‘차별을 감지해 내는 일, 사회적 공간이나 담론의 공간에서 추방된 이들에게 그 공간들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의 존엄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이런 일은 오늘부로 끝나야 한다’라고 선언하는 목소리, 고립되지 않는 태도, 자기 바깥으로 나와 다른 이를 포용하고 함께 하는 연대에서 혐오를 전복시킬 힘을 발견한다.
저자는 개인성은 서로 함께 하는 관계,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철저한 고립과 자기 파괴뿐이다. 그러므로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개별 존재들이 함께,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옹호되고 보호받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서로를 다 좋아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서로를 ‘보고’, ‘귀 기울일 수 있는’ 나와 너. 느슨히 열려있고 자유롭게 흐르고 끊임없이 배워가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를 저자는 푸코의 파르헤지아(진실 말하기) 개념을 빌어 말한다. 파르헤지아는 상대에 대한 반대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용기 있는 자아 성찰, 고백이기도 하다. 혐오에 가려 자신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스스로를 찾은 ‘우리’로써 대항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혐오에 대한 가장 온화하고 동시에 가장 강력한 저항의 형태"이다.
인권에 대한 영화를 주로 만드는 변영주 감독은 한 티비 프로에서 "(사람, 풍습, 생활환경에 대한) 혐오는 취향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했다. "싫어하는 것은 내 자유"라고 말하던 많은 이들에 대한 통쾌한 일갈이었다.
용서를 이야기 전에 먼저 혐오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도 나도, 우리도 우리 안의 혐오로 인해 고통받고 있기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게 느낀 것은 우리는 모두 때때로 그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고, 동시에 방관자라는 부끄러움이다.
시드니에서 마디그라가 열릴 때,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마디그라 대항 집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동성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른’길로 인도한다며 통성으로 기도하던 그들 사이에서 함께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하고 그저 이 모든 것이 참담해서 울기만 했던 나를 기억한다. 인종차별의 말을 내뱉는 이들의 천박한 혐오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를 더 혐오했던 나를 기억한다. 나 혼자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고 말하며 아무도,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기억한다.
혐오는 혐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혐오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혐오를 이기는 것은 공감과 소통, 용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