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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Nov 11. 2020

아가미, 상처로 숨 쉬다

'아가미' 구병모 作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붕이 온몸의 힘을 다해 한번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바다가 움직이면 이 새는 남명으로 날아간다. 남명이란 천지(하늘 못)이다. 재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책)이다. 재해의 말(기록)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을 계속 난 뒤, 비로소 한 번 큰 숨을 내쉬고 쉰다"  (장자, 소요유 1장)


태초에 어둠이 덮여있는 깊고 아득한 물이 있었다. 그 물에서 작은 알이 하나 생겨나고 물고기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하늘을 덮는 구름이 된다. 물에서 태어나 물로 돌아가는 순환. 그 흐름을 따라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큰 것을 덮는 절대적 공허와 자유를 만난다. 거대한 곤이도 거대한 붕새도 서로 다르면서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니다.  끝없는 변화. 무명과 유명. 삶과 죽음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우는 바람. 숨. 바람을 타고 흰 새가 날고 푸른 물이 흐른다.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깜빡깜빡 잊혀져 혼자 외로웠던 아이. 썩은 우유를 마시면서도, 물바다가 된 갇힌 방에서 목만 내밀고서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기다렸던 아버지였건만, 아버지는 자신을 데리고 물에 빠져 같이 죽으려 한다. 아니, 이미 세상의 물에 빠져 죽어있었을까. 생명의 요람이자 무덤이기도 한 물. 죽음의 물이 눈과 코로 몰려들어 왔을 때 그 아이는 안간힘을 다해 자기 안에 있는 태초의 물, 울음의 덩어리를 밀어내었을 것이다.  그때, 죽음의 물과 생의 물이 만나 터지면서 생긴 깊고 어두운 틈. 아가미. 상처. 그 상처로 숨을 쉬는 아이. 곤이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아이가 있다. 폐지처럼 버려진 아이. 눈부신 것, 빛나는 것, 귀한 것, 좋은 것은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거야.. 남하고 나누는 게 아니란다.라고 말해준 엄마는 그 말을 하자마자 아이를 버린다. 그렇게 자신의 빛을 빼앗긴 아이. 그래서 누구보다 빛이 그리운 아이. 강하. 어느 밤, 강하는 어두운 호수에서 곤을 건져, 자신의 어린 등에 업는다. 곤의 아가미와 비늘을 처음으로 알아본 이도. 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준 이도 강하다. 결핍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부재한 강하에게 곤의 비늘(날개)은 그 자체로 부인할 수 없는 강한 존재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 곤을 통제하며 곤의 빛에, 존재에 동일시되고, 바람을 타고 같이 날아오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눈부시고 빛나는 것을 찾아 이 세상으로부터 숨겨놓고 혼자만 알고 싶었던 아이. 그러나 남과도 나눌 줄도, 자신과도 나눌 줄도 몰랐던 아이. 


그 둘을 지켜보며 둘을 위로하는 해류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이 이야기는 흘러간다.  곤이 목숨을 구해주고, 다시 태어난 그 생명으로 강하를 품어주는 해류를 통해 이야기는 물처럼 순환하면서  과거의 사건 사건을 굽이쳐 흐르고 만난다. 그 흐르는 강물 속에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이 있다. 곤, 강하, 해류, 이녕, 바닥 없는 세상의 물속에서 침잠하는 사람들. 땅이 물처럼 느껴져 뻐금거리는 사람들. 그래서 더 새가 되기를 갈망하는 물고기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보지만 어긋나고, 어긋나지만 사랑하고, 그렇게 물거품처럼 아스라이 사라져 더욱더 가슴 아프게 시린 이야기.


“관계란 것은 그것이 어긋날 때에 비로소 거기에 관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관계가 서로 쌍방이 잘 통하면 왠지 모르게 그것에 익숙해져서 관계라는 것이 없어지는.. 그런 느낌.. 그래서 관계를 끝까지 의미 있게 남겨두려면 어긋나는 것이 맞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병모 작가, ‘이동진의 빨간 책방’ 팟캐스트 276회 '파과' 인터뷰 중)


어긋난 관계가 남기고 가는 선득선득한 날것의 아픔.  그 진한 아픔을 따라가다 보면 모래 위에 더 깊게 찍힌 그리움의 발자국이 보인다. ‘돌아오는 발걸음마다, 다가오려는 슬픔이 앞코에 채어 밀려나가는 걸’ 보면서도 ‘너, 예쁘다’라고 말해주는  이 지독한 작가의 시선이 아파서 따뜻하다. 선혈이 그렇듯이. 사는 게 그렇듯이.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 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 


물고기도 아닌, 사람도 아닌, 새도 아닌 이들, 세상이 버리고 잊어버린 이들에게 ,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아가미)가 되어 힘겹게 숨 쉬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살아줘’라고 말하는 것,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것,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 한 음절, 한 ‘숨’을 피 흘리는 뜨거운 심장으로, 아가미로 벅차게 불러주는 것. 

그걸 위해 인어 왕자님은 터질듯한 울음을 주고 다리를 얻은 것일까? 찰나의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 버려도 괜찮을 만큼 그들은 찬란하게 사랑했을까? 하늘 못으로 날아간 곤이 거기에서 강하를 찾았으면 좋겠다. 함께 구만리 상공에 올라 이제 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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