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막스 리히터 "On the Nature of Daylight"
(이 글은 글 크로키 모임에서 진행했던 '음악 듣고 연상 글 쓰기' session을 위해 적은 글입니다.
함께 나눈 음악 모티브는 Max Richter의 작품, 'On the Nature of Daylight'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_YHE4Sx-08
(Resource - MaxRichterMusic Youtube Channel)
진공의 어둠 속. 빛이 하나 들어온다. 음(音)이 하나 떨어진다.
나비가 포로로 날아오른다.
깜깜한 우주에서 어떤 사람은 별을 보고 어떤 사람은 끝없는 어둠을 본다
당신이 보는 것은 어느 것일까. 어느 쪽이든 거기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셋, 둘, 하나,
- 저기요, 잠깐만요!
고개를 돌린다. 빛을 뒤로하고 당신이 서 있다.
- 이것, 떨어뜨리셨어요.
- 감사합니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하나, 둘, 셋,
- 잠깐만요... 저... 혹시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네.
- 아뇨. 처음 뵙는데요.
- 아니… 이게 제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자꾸 그쪽을 어디에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나는데…
- 이상하진 않은데…. 좀 진부하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대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웃음을 터트린다. 도서관을 나서는 나를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당신의 뒤로 그 웃음이 따라온다.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마주치는 순간마다 당신의 얼굴에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물들어간다. 나는 자꾸 웃는다.
- 이상해요. 제가 원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러진 않거든요.
알아요.
도서관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공원으로. 자꾸만 핑계를 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놀이터에 앉아 노을이 지는 걸 바라보면서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는다. 북적거리는 야시장에서 군것질로 저녁을 때우면서 아이들처럼 킬킬거린다. 집시 할머니가 펼쳐놓은 자판에서 내가 꽃잎에 레진을 부어 만든 반지를 만지작거리자 당신은 재빨리 할머니에게 돈을 건네고는 소년처럼 나에게 웃어 보인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연분홍 꽃잎이 피어난 내 손과 당신의 손이 깍지를 끼고 걸어간다.
- 저기... 잠깐 우리 집에서 차 한잔하고 갈래요?
- ……
나는 대답 대신 붉은 꽃잎이 내려앉은 그의 뺨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익숙하게 계단 화분 밑에서 열쇠를 찾아내고 문을 연다. 우리는 미끄러지듯 함께 여름밤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진공의 어둠 속. 빗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꽃이 진다. 나비가 날아와 포개어진 당신과 나의 손 위로 앉는다.
깜깜한 우주에서 우리는 함께 별을 본다.
- 이상하지.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이렇게 될 것만 같았어.
- 이상하지 않아.
나는 아이 같은 당신의 머리를 안고 내 품으로 더 끌어당긴다.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어제도, 그제도 이렇게 이 침대에서 함께 잠이 들었으니까. 나비 모양의 자수가 놓인 이불보를 고른 사람도. 당신의 잠옷을 고른 사람도 나였으니까.
- 내일은 뭐해?
- 도서관에 가려고. 거기에서 찾아볼 책이 있거든. 어쩌면 당신도 좋아할 거야. 장자라는 사람의 꿈 이야기인데.. 어느 날 장자가 잠을 잤는데 꿈에서 나비가 된 거야. 나비가 되어서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면서 기쁘게 하루를 보내고 잠에서 깨었는데, 순간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아직 꾸고 있는 것인지 잘 몰랐다는 거야.
- 신기한 이야기네. 근데 왠지 슬픈 기분도 들어.
- 글쎄, 나비는 아마 슬픈 것도 모르지 않았을까.
당신이 슬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 나 사실 아침엔 잠깐 볼일이 있어. 일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갈게. 나랑 같이 커피 마시자.
- 응. 지금은 일단 좀 자고…. 자꾸 잠이 오네..
가만히 내 품 안에서 당신이 잠이 드는 걸 바라본다. 당신이 깨지 않게 살며시 빠져나와 옷장을 연다. 옷장에는 나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들이 가지런히 걸려있다. 내일은 당신이 좋아하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어볼까.
무엇을 입든, 당신은 나를 알아보겠지. 어디에 있던, 나는 당신에게 가겠지.
셋, 둘, 하나,
고개를 돌린다. 빛이 거기 있다.
(22/04/10. 수진. “On the Nature of Day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