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가 그리는 꿈은 현실에서 시작한다.
코로나 시절 다녀왔던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INSIDE MAGRITTE>
한국에 르네 전이 잘 찾아오지 않는 듯하여
복기해 보는 후기!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일생 내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꿈속에서 보는 듯한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렇기에 그림 속 그가 숨겨둔 코드를 찾아내는 게 흥미롭다.
사실 그것들이 현실 속의 느낌, 감정, 이치를 보여주기도 하기에.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아무리 가까운 연인들이라도 결국 서로의 본모습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그 감정 자체를 느끼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소위 콩깍지가 씐다는 말처럼,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기 어렵고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랑이라는 그 감정 자체를 사랑하게 되기도 하니.
달걀을 통해 새를 본 투시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다.
르네 마그리트는 사물의 눈에 보이는 모습 말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르네마그리트가 '달걀'과 관련된 일반적인 개념들을 한 공간에 함께 그려 넣은 것이다.
앞에서 본 '투시'처럼 달걀을 통해 새를 보고, 달걀을 가둔 새장을 그려 넣은 것이 확 와닿았다.
개별적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개념들이 모여 하나의 스토리를 형성한다는 게 인상 깊었다.
만약 달걀-새-새장이라는 인지적 연결이 없었다면 이해될 수 없는 그림이니 말이다.
또한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제목이 인간에 의해 선택된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친화력- 으로 해석이 됐다.
제목에도 띵- 한 느낌을 받은 작품이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물들이 정렬되어 있는데, 그 밑에 적힌 단어들은 각각의 사물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림 - 단어의 관계로 보자면, 계란-아카시아, 검은 여성화-달, 중절모-눈(雪), 촛불-천장, 유리컵-폭풍, 망치-사막이 함께 적혀 있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작품처럼, 상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사물들의 개념 파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지시어와 지시체 사이의 당연한 일치를 기대한 관객에게 르네는 당혹감을 주고자 했고, 일반적인 언어 관습을 부정하고 회의하는 사고는 르네 마그리트가 1920년대 후반에 몰두한 중요한 주제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맹세. 맹세를 왜 돌로 굳어진 사과로 표현했을까 생각했다.
돌로 표현된 이유는 누군가에게 단단하게 변하지 않는 맹세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사과는 그 풋풋함과 간결함 때문일까?
또 유달리 마그리트의 그림에 사과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
사과가 마그리트에게 무언가 의미를 갖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가장 흔하고 일반적이기에, 상식을 깰 여지가 많은 오브제인 걸까.
꼬불꼬불. 휘어져 올라가 밝은 불을 밝히고 있는 촛대가 길게 휜 콧대와 어울려 철학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고민을 하고 하다가 구부러져 생각이 가득 담긴 파이프에 쏙 들어가 버린 코. 주름진 이마. 불만 있어 보이는 듯 심각해 보이는(?) 눈빛. 어두운 배경까지 '철학자의 램프'라는 제목과 너무 잘 어울렸던 작품.
이 그림을 보자마자 그리스신화 속 피그말리온이 떠올랐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되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조각가.
저 화가도 눈앞의 여성에 애착을 갖고 있고 여성의 눈빛이 금방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
작품 설명에 의하면, 제목 <골콩드>는 마그리트의 친구이자 시인, 루이 스키트네르가 고안한 것으로
17세기말에 폐허가 된 인도 남부의 도시라고 한다.
근처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어 부의 원천이란 의미도 갖게 되어
그림 속 교외 주택가 위의 신사들 이미지와 잘 어울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설명을 보기 전에, 이 그림을 보고 당시 산업 사회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획일적으로 같은 차림을 한 신사들이 모두 같은 자세로 미동 없이 떠 있는 모습이
일률화, 타인화되어 안착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존재들로 보였다.
'삭막함'이 가장 먼저 느껴졌던 작품이다.
보자마자 마음이 고요해졌던 작품.
서늘한 이슬이 공기에 떠 있는 새벽,
초승달이 떠오르고 밤하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늦저녁을 가만히 바라보는 느낌.
"우주에는 달이 한 개뿐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달을 본다. "
이 문구가 참 와닿았다.
내 기억 속 그날의 달, 어제의 달, 오늘 떠오를 달을 생각했다.
밤하늘에 나만의 달이 있다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기억>은 여성 조각상의 관자놀이에 무언가 맞은 듯한 주황 자국이 무척 와닿았다.
누구든 저렇게 머릿속에 깊게 자욱이 남은 기억이 있지 않을까.
때로는 한 대 맞은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기억되는.
<개인적 가치>는 일상 속의 사물들을 비상식적으로 크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개인적 가치에 따라 같은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전시의 막바지 즈음, 르네의 사진.
유독 르네 작품에 사과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기서도 사과 등장.
이쯤 되니 르네 머릿속에서 사과는 어떤 오브제인지 묻고 싶어 진다.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르네와 같이 상식을 비틀어볼 수 있다면
조금은 삶이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직장인이 되면서 상상, 공상 등은 비생산적인 일이라 치부하게 되는 것 같다.
성과를 내는 것이 보장된 일만 반복하다 보니 일상이 지루해지고.
상식대로 사는 것이 사회적인 자아를 유지하는 데에 안전하기에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되고.
그렇다고, 맞다고 생각했던 것을 살짝 비틀어보면
당장의 내일이 살짝 더 즐거워지고,
나아가 생각지 못했던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하지 않으려나?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에 생각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