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라서 행복합니다. 이과가 아닌 건 죄송합니다.
AI, 그린에너지, 수소경제, 전기 배터리...
요즘 들어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쇵합니다)"라는 말이 더욱 실감 나는 요즈음, 원룸 방에서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을 읽으며 입을 쩍쩍 벌려대는 내가 마치 사림파 같다.
오늘날 사회는 멀티형 인간을 원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 라던가, 적어도 코딩 정도는 할 수 있는 공학형 인문학도를 원하고 있다.
특히나 사람들은 인문학의 중요성과 인문학을 속성으로 배우기 위해 TV를 켜서 책을 대신 요약정리해주는 프로그램들로 머리를 채워간다. 소비시간은 줄이고 학문은 취하는 21세기형 사림파가 탄생했다. 디지털 서원들은 사람들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문학의 소외가 불 보듯 뻔한 일이기에 더욱 열을 올린다.
거기다 훈구파는 또 어떠한가? 인문학자들이 수 천년 전부터 일궈온 인문학을 디지털 서림을 통해 겉핥기식으로 익히며 '인문학, 사회과학은 '암기' 과목인데 어려울 것도 고민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속단한다.
취업을 위해선 인문학보단 공학을 택해야 하고, 그렇게 인문학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또다시 21세기 사화는 훈구파에 밀려 사림파들이 서원에 갇힐 위기에 놓였다.
취업 전 1년가량 학사행정조교를 할 때였다. 연구실 조교를 맡으며 과사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며 졸업사정과 취업 현황조사를 해야 했다. 내가 받는 입장에선 그런 전화가 그저 짜증 나고 싫기만 했는데, 막상 입장이 뒤 바뀌어 전화를 받아주지 않으면 교육부에 현황 제출을 할 수가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정치외교학과. 사회과학대 중에 가장 낮은 취업률을 자랑하는 학과에서 조사하는 취업률이라니. 그리고 대학 평가 및 과 평가 시 취업률을 반영한다니. 마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서 하향지원을 시킬 바와 다름이 없었다.
교수님들은 나름의 4대 보험이 되는 취업자리를 찾아왔다. 대형 문구점, 선배가 운영하는 소형 출판사 등등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취준생들에게는 아직은 조금 더 급박해졌을 때 도전하고 싶은 곳들이었다. 그 마저도 네 분의 교수님 중 두 분만이 자리를 만들어 오셨다.
전공에는 각자가 원하는 길이 담겨있고, 꿈이 있다. 설령 직업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도 평생 나의 이름표가 된다. 그런 학생들이 전공을 부끄러워하고 점점 멀어만 진다. 교수님들 역시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쓸 시간에 이런 일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며 결국엔 연구실로 씁쓸하게 향하신다.
우리들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를 아는지, 과연 대학교 4년 내내 대신 읽어주는 고전이 아닌 제대로 된 고전을 한 번이라도 읽는 학도는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문과와 이과는 정반의 개념이 아님을 깨우친 민족이다.
퇴보하지 말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것을 갈고닦으며, 상대를 알면 나의 것이 더 풍족해지듯 교양으로 다른 분야의 것들을 배워나가자. 그렇게 꽉 찬 지혜를 얻어나가면 언젠가 빛을 보지 않을까?